제228화
228화
“……카얀이라면, 1장로 말씀이십니까?”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하임이 고개를 저었다.
“바란의 머릿속에 있던 건 그동안 1장로와 함께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것과, 이번 계획을 위해 어디에서 모이기로 했는지 그 장소에 대한 기억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지금 1장로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에르제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만약 추측할 만한 단서라도 있었다면, 라하임이 진즉에 말을 꺼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단서조차 없다는 뜻이겠지.’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에이리스도, 1장로도 이제는 한때 같은 뱀파이어였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악마가 아닐까.
“1장로가 제물이 되어 서은우를 지상에 강림시키는 일은 우리의 개입이 있으면 할 수 있어요.”
에르제는 대마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대마녀는 양팔을 쭉 뻗으며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알았어. 나보고 움직여 달라는 거 아니야.”
“부탁드릴게요.”
시각을 다투는 일이었다.
대마녀도 이를 알고 있기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스마트폰부터 챙겼다.
그녀는 스마트폰을 살살 흔들며 입을 열었다.
“바로 찾아보도록 할게. 1장로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강원도 부근부터 찾아 나가면, 숨은 곳을 찾는 게 그리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 말에 나가려던 대마녀가 고개만 집무실 안으로 밀어 넣은 채 말했다.
“아, 지원군 있으면 불러 주고.”
“……!”
그 말에 에르제는 곧바로 지원군으로 쓸 수 있는 이를 떠올렸다.
“구하는 대로 바로 연락드릴게요. 나머지는 둘이서 이야기 나누고 일 진행해 주시면 될 거예요.”
“바로 생각이 떠오른 거 보니까 무척 믿음직스러운 상대인가 보네.”
대마녀는 픽 웃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럼 먼저 간다.”
에르제는 살짝 목례를 하고는 라하임의 손에 잡혀 있는, 기절한 바란을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 녀석이 1장로와 함께하게 된 이유가 뭐야? 도대체 그런 쓰레기들과 같이……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바란은 꽤 오래 전, 그러니까 제게 충성을 맹세한 시점 이전부터 1장로와 연이 닿아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아마 저번에 내부의 배신자를 찾기 위해 움직였을 때…… 기억을 지운 탓이겠지요.”
“그래?”
그렇다는 건 지금 라하임이 읽어 낸 기억은 1장로나 바란이 다시 복구시킨 기억일 거란 뜻이다.
한 번 용의선상에서 벗어났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라는 판단에서였겠지.
‘……그런데 대마녀는 바란이 수상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챘을까.’
처음 바란이 말한 대로라면 그렇게까지 의심스러운 구석은 없었다.
그저 주변 순찰을 위해서 나가겠다고 말한 것뿐이니까.
현재 자신과 라하임이 부재중일 때 뱀파이어 본부를 통솔하는 이는 바란이고.
그런 그가 안전을 위해 순찰을 나간다는 게 그리 수상쩍은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수상한 점이라고 볼 만한 건 친위대 전부를 끌고 나가려고 했다는 것뿐인데.’
그것도 어떻게든 둘러 댈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에르제는 라하임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바란이 대마녀에게 들키게 된 계기는?”
“아!”
라하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르제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저희는 뱀파이어 본부에 머무는 시간이 극도로 짧지 않습니까.”
“그래서 네가 따로 그림자를 붙였잖아.”
“예. 하지만 그건 제가 직접 보고 들은 게 아니니, 의외로 소실되는 정보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대마녀는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었기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말에 라하임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그것뿐이었다면, 아무리 소실된 정보라고 해도 제가 진즉에 알아챘을 겁니다. 로드께서는 이미 바란을 어느 정도 의심하고 계셨으니까요.”
“……그랬겠지.”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라하임이 말을 이어 갔다.
“며칠 전, 바란이 뱀파이어 본부를 잠시 비운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1장로가 더 이상 이곳에 도플갱어를 심을 수 없었기 때문이겠죠.”
그 뒤로 이어진 라하임의 말은 이러했다.
바란은 몰래 빠져나와 1장로가 보낸 뱀파리스를 만났고, 그때 이번 계획에 대해서 들었다고 한다.
당시 바란의 기억 속에서는 대마녀와 관련한 부분은 없었지만, 라하임의 생각으로는 그때 대마녀가 어느 정도 눈치를 채지 않았을까 추측된다는 것이다.
‘당시 바란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고 해도 수상쩍은 인물과 만나고 있었으니까.’
에르제는 라하임의 추측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곳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던 대마녀는 바란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바란에게 마녀를 붙였을 터.
뱀파이어 본부를 책임져야 할 바란이 외부에서 수상한 인물을 만났다는 것은 그 의심을 더욱 증폭시켰을 것이다.
‘그러다 바로 오늘의 사달이 난 거겠지.’
하지만 단순히 심증뿐이었을 테니, 대마녀가 바란의 앞을 가로막기만 하고 있었던 것이고.
직접적인 전투는 벌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오는 걸 알고 있으니 시간을 끌려고 했겠지.’
에르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순찰 때문이라는 명목은 시간이 좀 늦어진다고 큰 문제가 발생하는 건 아니니까……. 만약 바란이 배신자가 아니라고 해도 대충 무마할 수 있는 문제일 테고.’
“하!”
에르제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대마녀의 의도에 자신이 휘둘렸다는 뜻이었다.
심증만으로 에르제에게 ‘바란이 배신자다’라는 말을 했고, 그로 인해 자신과 라하임이 바란을 직접 제압하기에 이르렀으니까.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지를 자신에게 떠넘긴 거였다.
‘……대마녀 나이가 상상 이상으로 많다더니, 완전 능구렁이였네.’
하기야 혈석을 쥐고 자신을 협박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에르제는 라하임에게 시선을 돌렸다.
“라하임.”
“예, 로드.”
“지서후에게 연락해서 내가 도움을 요청한다고 전해. 내가 직접 가서 설명할 수는 없으니 나보다 조금 더 자유로운 네가 움직여 줘.”
“대마녀를 도와 1장로…… 혹은 서은우의 부모를 숨긴 위치를 알아내는 데 힘을 실어 달라는 로드의 의중을 전하면 되겠습니까?”
“응. 세부적인 사항은 너와 대마녀, 지서후 셋이서 진행해 줘.”
에르제는 스마트폰의 날짜를 확인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Epilogue’ 음원 발매까지 3일 남았다. 이번 프로젝트의 피날레인 만큼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 * *
지서후는 흔쾌히 대마녀를 돕는 일에 힘을 보태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늑대인간들의 우두머리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많은 모양이다.
지서후를 괴짜 늑대인간이라고 여기기는 하지만, 그만큼 그가 통치하던 시절이 나쁘지는 않았다는 반증이리라.
에르제는 라하임에게서 온 연락을 받고 일단 안도하는 듯한 낯빛을 띠었다.
‘누군가 찾는 일에 늑대인간만큼 뛰어난 종족이 없지.’
그들은 추적에 아주 탁월했으니 말이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전해지리라고 믿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에르제는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스마트폰을 치우며 고개를 돌렸다.
민주혁이었다.
“무슨 고민 있어? 내가 들어 줄까?”
민주혁은 악령 사건 이후 상당히 살갑게 변해 있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에르제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말하기 곤란한 거야?”
민주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다.
“아니, 진짜로 고민이 없어서 그래.”
“흐음.”
민주혁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오늘 처음 하는 거라 긴장되기는 하는데, 혹시라도 긴장돼서 그러는 거면 이거.”
민주혁은 열심히 자신의 스마트폰을 조작해서 에르제에게 코코아톡을 보냈다.
‘심신이 안정되는 Playlist’라는 제목의 무튜브 링크였다.
“라디오 들어가기 전까지 시간 좀 있으니까 그동안 이거 듣고 있어. 내가 자주 듣는 건데, 제목처럼 진짜 심신이 편해지거든.”
“아……. 응. 고마워.”
에르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민주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무언가 도움이 되었다는 뿌듯함이 드러나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마왕 민주혁을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일까.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그게 나쁜 변화는 아니었기에 에르제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민주혁이 나한테 너무 살갑게 굴어서 멤버들이 좀 질투하는 것 같기도 한데.’
뭐, 그렇다고 싸우거나 할 멤버들은 아니니까.
심해 봤자 저번에 책 가지고 투덜대는 수준이 다일 거다.
에르제는 대충 생각을 접어 두고, 민주혁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토트윈은 민주혁의 말대로 라디오 출연을 위해 방송국을 찾았다.
데뷔 이후 토트윈의 인기는 지속적으로 수직 상승하고 있었기에 그동안 라디오 출연 제의가 꾸준히 들어왔었다.
하지만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라디오 특성상, 에르제 때문에 계속 출연 제의를 거절해 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장 대표나 이윤의 입장에서 언제 돌발 발언을 할지 모르는 폭탄을 생방송에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렇다고 멤버 몇 명만 라디오에 출연시키는 건 팬들 사이에서 말나오기 딱 좋았고 말이다.
게다가 올팬을 지향하는 토트윈이기에 그동안 어쩔 수 없이 라디오 출연 거절이라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장 대표와 이윤의 인식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저번 STT와의 인터뷰였다.
그날 이후 ‘우리 은우가 달라졌어요!’ 같은 눈빛을 보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이렇게 라디오 출연까지 잡아 온 것이다.
― 이번에 ‘Epilogue’ 음원은 정말 중요하니까 가서 홍보 열심히 하고 와라!
12월에 발매되는 ‘Epilogue’ 곡 홍보와 더불어 이제는 라디오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기 위함이었다.
토트윈 멤버들은 당연히 라디오 출연에 긍정적이었고, 꽤 괜찮은 타이밍에 라디오 출연이 결정되었다.
STT와의 인터뷰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그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운 좋게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 한다.
원래 오늘 출연하기로 했던 게스트가 얼마 전에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출연이 어려울 것 같다고 방송국 측에 전해 왔고.
방송국 측에서는 구멍 난 자리를 메우기 위해 급히 대타를 찾고 있었단다.
‘하여간 장 대표도 은근히 운이 좋아.’
에르제는 속으로 웃으며 이쪽으로 오고 있는 스태프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에 걸린 명찰에는 ‘강보라의 행복한 8시’라는 라디오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오늘은 보이는 라디오라서 더 일찍 자리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스태프의 말에 에르제와 멤버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