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7화
227화
바란을 붙잡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아.”
밭은 숨을 몰아쉬던 바란은 눈동자만 옆으로 굴려 에르제를 노려보았다.
“오늘…… 오늘 드디어 새 하늘이 열리는 날이었는데.”
“새 하늘?”
그 말에 에르제는 이마를 찌푸렸다.
“무슨 뜻이지?”
그러나 바란은 에르제의 말에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오늘 일만 끝내고 나면, 드디어 카얀 님이…… 카얀 님이 새 세상을 지배하는 날이 도래하는데……. 왜, 어디서부터 아니, 언제부터?”
카얀.
1장로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했는데.’
에르제는 미친 사람처럼 구는 바란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카얀 사피엘. 1장로의 옛 이름이었다.
뱀파이어를 배신하기 전, 그러니까 어렸을 때 에이리스와 함께 뱀파이어 일족들 사이에 어우러져 놀던 그 시절.
카얀은, 아니 1장로는…… 뱀파리스를 만든 에이리스 쪽에 붙으면서 그 이름을 버렸다.
다시는 그 이름을 쓰지 않겠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바란한테 그 이름을 댔다.’
1장로가 에이리스를 배신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닐 텐데.
그렇다면, 카얀이라는 이름을 바란에게 알려 준 것은 얼마 전의 일일 것이다.
‘그렇다는 건 바란이 1장로에게 붙었다는 뜻인데.’
그나마 바란이 에이리스에게 붙지 않았다는 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1장로에 붙었다는 사실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오늘 미끼를 물기 위해 바란이 필요했던 건가.’
굳이 머릿속을 뒤져 보지 않아도 진상을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추측보다는 명확한 사실이 더 낫다.
에르제는 멍하니 중얼거리는 바란을 라하임 쪽으로 던졌다.
라하임까지 전투에 합류했기 때문에, 친위대는 거의 대부분 정리된 상태였다.
“확인해.”
에르제는 라하임에게 그렇게 말하고 남은 친위대 둘을 제압하는 데 동참했다.
그리고 상황은 금세 종료되었다.
모두 기절한 채 제압을 당했고, 주동자인 바란만 라하임에게 붙들려 있는 상태였다.
“나는 이쪽이랑 먼저 이야기하고 있을 테니까 정보를 얻는 대로 바로 내게 오도록 해.”
“예, 로드.”
대답과 함께 라하임은 바란을 질질 끌고 사라졌다.
아마 비어 있는 방을 찾아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확실히 전투력은 아주 믿음직스럽네.”
대마녀는 깨끗하게 정리된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에르제는 그녀를 보고 말했다.
“미끼에 관한 이야기부터 들어 보죠.”
“그래. 그래야 내가 바란을 막아선 이유까지 설명할 수 있을 테니까.”
남은 뱀파이어들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에르제와 대마녀는 단둘이서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거의 쓰지는 않지만 구색을 맞추기 위해 만들어 둔, 로드 에르제의 집무실이었다.
“여기가 좋겠군요.”
에르제는 화려한 책상을 보며 그 뒤에 놓인 의자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푹신한 느낌의 의자였다.
‘숙소로 가져가고 싶네.’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에르제는 의자를 빙글 돌려 대마녀 쪽으로 향했다.
그 의도를 알아챈 대마녀는 에르제가 묻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미끼는……. 음.”
조금 망설이던 대마녀는 이내 상관없겠지, 하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네 부모님이야.”
“?”
“정확히는 네 껍데기. 서은우의 부모.”
“아아!”
말뜻을 이해한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대마녀의 말이 이어졌다.
“에이리스는 서은우의 부모를 1장로에게 미끼로 던졌어. 마치 중요한 인물들인 것처럼 가장해 강원도에 있는 별장에 숨겨 두었던 거지.”
“……1장로가 강원도에 간 건 그들을 데려가기 위해서였겠군요.”
“맞아. 서은우의 부모가 1장로에게 어떻게 이용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거기까지는 확실해.”
대마녀가 뱀파리스 내부에 잠입시켜 둔 끄나풀로부터 입수한 정보였다.
그녀가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터.
에르제의 표정이 굳었다.
‘……에이리스에게도 서은우의 부모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나?’
분명 자신은 그렇게 추측했다.
서은우가 대악마로 강림했을 때, 그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막기 위한 보호 수단.
‘하지만 그걸 1장로에게 고스란히 넘겼다고?’
미끼는 상대가 물 거라고 상정하고 꾀어내는 물건이나 수단이다.
당연히 빼앗길 것을 목적으로 에이리스가 저지른 일이라는 뜻이다.
‘도대체 뭘 위해서?’
본인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지금으로선 추측할 만한 실마리가 없었다.
자신이 에이리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에르제가 눈을 가늘게 뜨자, 대마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나랑 같은 상황인가 보네. 나도 솔직히 에이리스가 왜 서은우의 부모를 1장로에게 넘긴 건지는 당최 모르겠어.”
“……1장로도 에이리스가 서은우의 부모를 어떻게 이용하려고 했는지는 알고 있을 거예요.”
대악마가 된 서은우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인질.
1장로도 분명 그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그 미끼를 문 것이다.
“에이리스는 그 사실을 이용했고,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테죠.”
“그래.”
에르제는 집무실 문을 바라보았다.
“라하임이 바란의 머릿속을 뒤진다고 해도 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할 거예요. 1장로가 가장 믿는 부하가 바란이라고 해도요.”
“1장로가 자신도 모르는 걸 바란에게 어떻게 말하겠어?”
“그렇죠.”
에르제는 대답을 한 후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에이리스의 진짜 의도는 뭘까. 어째서 자신을 지킬 수단을 없앴을까.
‘……혹시 애초에 서은우의 부모를 자신의 보호 수단으로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에이리스가 뱀파이어 무리에서 서은우의 부모를 빼내 간 것은 대체 무슨 의도로 그랬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서은우의 분노를 1장로에게로 돌리기 위해? 아니, 그건 억측에 불과해. 애초에 그건 서은우가 지구에 강림한 뒤의 일일 테니까. 무엇보다 에이리스는 1장로를 제물로 바칠 생각이야. 서은우의 강림 이후 1장로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어.’
에르제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그렇다고 하면…… 서은우의 강림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는 건데…….”
“…….”
대마녀는 중얼거리는 에르제를 보고 조용히 침묵했다.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에르제는 무언가 알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서은우를 완벽하게 강림시키기 위해서.”
“응?”
에르제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1장로는 자신이 제물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번 미끼도 그래서 문 거죠. 보호 수단이 사라졌으니 에이리스가 서은우의 강림을 돕지 못할 거라고 여긴 거예요.”
“그렇겠지. 에이리스가 안전장치 없이 서은우를 강림시킬 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에르제는 서은우가 자신의 몸을 차지했을 때를 떠올렸다.
서은우는 에이리스를 찾아갔고, 둘은 모종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에이리스가 1장로를 제물로 삼겠다며 태도를 바꾼 것도 바로 그 시점이었다.
“단순히 명분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에르제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단순히 1장로가 에이리스를 먼저 공격했다는 명분을 얻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일단 단순히 보이는 정보들만 나열해 보면, 에이리스는 이제 1장로를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어요. 1장로가 먼저 에이리스를 공격했으니까요.”
“……그렇지. 그리고 아마 곧 그렇게 되지 않을까? 에이리스도 슬슬 움직일 텐데.”
“그렇죠. 만약 그렇다면, 1장로는 가만히 있을까요?”
“……1장로가 할 수 있는 게 있나?”
“서은우의 부모를 재차 인질로 삼겠죠.”
에르제의 말에 대마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설마? 아무리 그래도…….”
“맞을 거예요. 1장로는 분명 이런 생각을 할 겁니다. 서은우의 부모가 없다면, 네가 과연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서은우를 정말 지구에 강림시킬 수 있겠느냐면서요.”
“하지만…….”
에르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게 에이리스가 바로 원하는 바일 겁니다. 1장로가 서은우의 부모를…….”
뒷말을 삼킨 에르제는 너무나도 끔찍한 계획에 얼굴을 찡그렸다.
대마녀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은우의 부모를…… 희생시키겠다고.”
대마녀의 중얼거림에 에르제는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마……. 서은우의 부모와도 이건 얘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요.”
“……그들의 몸에 혈석을 증폭시킬 수단을 만들어 두고…… 1장로가 자포자기할 때를 기다리겠다고…….”
너무 미친 계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리스…… 도대체……. 너는 대체 어디까지 추락할 생각인 거냐?’
에르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가 배어 나왔다.
“그건 막아야 해요.”
“……그래. 그게 아니어도 1장로가 서은우를 강림시키게 할 수 있으니까.”
“예.”
에이리스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이 났다.
첫 혈석은 자신이 차지했고, 그다음 타자로 준비된 제이의 몸에 있던 혈석은 이제 1장로에게로 넘어갔다.
‘원래였다면, 1장로에게 제이를 죽이게 해서 대악마를 강림시키려고 했겠지만.’
그게 틀어졌으니 이제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는 거다.
서은우의 부모를 죽인 것은 1장로이니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아마 그렇게 빠져나갈 생각이겠지.’
그렇다고 한다면, 1장로에게 서은우의 분노를 돌리려고 하는 의도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 방법은 아니야.’
아무리 서은우가 대악마가 되었고, 이 세계를 망치려 한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대마녀는 악귀처럼 일그러진 에르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어왔다.
에르제는 그녀의 말에 집무실 문을 노려보았다.
“바란이 1장로의 거취를 알고 있기를 바라야겠죠. 그게 아니면, 추측이라도 할 수 있는 단서를 알아내야만 합니다.”
“……만약 모른다고 하면, 내가 엄청 바빠지겠네.”
“그때는 부탁드리겠습니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마녀들을 총동원해서라도 1장로와 서은우의 부모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해야 했다.
꽈악.
에르제는 주먹을 피가 날 정도로 꽉 쥐었다.
현재 상황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방비는 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에르제는 라하임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대마녀와 에르제, 둘 사이의 침묵이 더욱 무거워질 즈음.
똑똑―.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드.”
라하임의 목소리였다.
에르제는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직접 열어 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잠시 당황한 눈빛을 띠었던 라하임은 에르제의 분노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오른손에는 기절한 상태의 바란이 잡혀 있었다.
에르제는 녀석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공손한 자세로 서 있는 라하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건질 게 있었어?”
“예. 대마녀의 추측은 정확했습니다. 바란은 꽤 오랫동안 1장로와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저번에는 1장로의 도움을 받아 용케 빠져나갔겠지만, 이번에는 아닌 모양이다.
고스란히 머릿속의 정보를 라하임에게 들키고 말았다.
에르제는 “후!” 하고 긴 숨을 뱉고는 라하임에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1장로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카얀은 지금 어디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