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6화
226화
1장로가 에이리스가 던진 미끼를 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에르제는 약속했던 시간보다 일찍 뱀파이어 본부에 도착했다.
예정 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도착한 것은 매니저 일을 하면서 라하임의 운전 실력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요즘 토트윈의 로드 매니저 일을 전담하다 보니, 느는 건 운전 실력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스케줄이 워낙 많아서요.”
기쁜 소식을 전하는 라하임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살짝 피곤에 찌든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제가 로드만 담당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마치 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모습에 에르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뭘 말씀이십니까?”
“이번 일 끝나면 네가 하고 싶은 일 찾아서 떠나라고.”
“……그렇게 되면.”
라하임은 입술을 꾹 눌렀다.
“지금처럼 로드께서 어디 가고 싶으실 때, 이렇게 모시고 나올 수 없게 되지 않습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에르제는 차에서 내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곳은 카테이아 대륙이 아니야. 다들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앞으로는 더 이상 일족에게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고.”
“음.”
라하임은 차에서 내리는 에르제를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로드께서는 진정 일족들의 일에 신경 쓰시지 않고 사실 수 있겠습니까?”
“응?”
“에이리스가 없어지고, 서은우와 관련된 일까지 모두 해결된다고 해도…… 그러실 수 있습니까?”
라하임은 다소 쓸쓸한 눈으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로드께서는 처음 이곳에 오셨을 때부터 일족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셨습니다.”
“그거야 이제 막 이 세계로 넘어왔고, 다들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니까……. 에이리스에 관한 일은 그 이후에 터진 거고.”
“예. 그렇지요. 하지만 만약 일족들이 모두 흩어지고 난 뒤에는요? 그들이 살아 있는지,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는지 걱정하지 않으실 자신이 있으시냔 말입니다.”
“그건…….”
“아마 어려우실 겁니다. 로드께서는 그런 분이시니까요.”
라하임은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저도 곁에서 같이 그 짐을 짊어지고 싶습니다.”
라하임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전 에르제가 내렸던 차의 문을 퉁퉁 두들겼다.
“매니저 일도 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라하임은 고개를 돌려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꾸밈없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이 일이 앞으로도 제가 하고 싶은 일입니다. 매니저 일이 힘들기는 해도…… 서울의 극심한 교통 체증을 뚫고 무사히 스케줄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했을 때, 예능이나 드라마 PD가 제가 맡은 아이돌을 칭찬할 때, 음악 방송 무대에서 좋은 무대를 보여 주어 팬들이 기쁨과 환호를 주체하지 못할 때 등등……. 예. 저도 같이 뿌듯합니다.”
“…….”
에르제는 그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온갖 이유를 대고 있기는 하지만, 그가 하고 있는 말은 결국 하나이지 않은가.
옆에서 끝까지 자신을 보필하겠다는 것.
‘어쩐지 최근에 진심을 다하는 듯 보이더라니…….’
드라마 ‘1년(1Year)’의 종방연 때도 그러지 않았던가. 원래였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자신이 차에서 내리는 순서를 뒤로 미루기 위해 아득바득 고집을 부렸던 일 말이다.
라하임이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경우는 흔치 않았고, 심지어 그런 일이 몇 번 있지도 않았는데, 그중 하나가 종방연 때라니 생각해 보면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었다.
에르제는 한숨을 살짝 내쉬며 그제야 대답했다.
“나는 네가 연예계에 뜻이 있으면 배우를 하면 어떨까 싶었는데 말이야.”
“배우요?”
“응. 아이돌을 하기에는 사람들이 네 나이가 몇인지 알고 있으니 그건 좀 어려울 거고, 배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에르제의 말에 라하임은 질색했다. 예상한 반응은 아니었다.
“싫습니다. 저번에 로드 촬영하는 거 제가 다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라하임은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저는 연기는 못합니다. 어려워서.”
“그래? 아쉽네.”
꽤나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에르제는 피식 웃었다.
“장 대표한테 말해 볼까 했는데, 그만둬야겠네.”
“예. 배우는 제 길이 아닙니다. 저는 그냥 로드 곁에서 천년만년 매니저가 되겠습니다.”
“……그래.”
결국 카테이아 대륙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겠구나.
그때도 늘 곁에서 자신을 보필하던 라하임이었으니 말이다.
헛헛한 표정을 지은 에르제는 “가자.”라고 말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라하임도 그의 뒤를 따라 뱀파이어 본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움직였다.
라하임이 고안한 보안문의 절차에 따라 내부로 들어선 둘은 갑자기 느껴지는 묘한 낌새에 발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예.”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 둘은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공기가 찌릿찌릿했다.
‘누가 침입해 왔나?’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피 냄새는 나지 않는데.’
그렇다는 건 전투가 벌어진 것은 아니라는 뜻.
하지만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준비해.”
에르제는 라하임에게 언제든지 혈기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이르고, 자신 또한 로드의 힘을 명치 근처까지 끌어올렸다.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해 둘은 긴장감의 농도가 가장 짙게 느껴지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뱀파이어 특유의 뛰어난 동체 시력 덕분에 에르제는 곧 대치 중인 두 세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란……!’
그리고 적대 세력으로 보이는 쪽을 확인하고 주먹을 꾹 쥐었다.
그래, 결국 너였구나.
친위대를 만들 때부터 아니, 뱀파이어들의 자식들을 뱀파이어로 만들겠다고 무리수를 둘 때부터.
뭔가 수상쩍다고 의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럼, 이번에 1장로가 움직일 때 바란도 같이 움직이려고 했던 건가?’
라하임에게 바란의 뒷조사를 하라고 맡겨 두었는데, 그 얘기는 당연히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일 때 그를 막으라는 의도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게 지금이고?’
에르제는 앞으로 몸을 날려 대치 중인 두 세력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에르제!!”
그리고 그런 그를 발견한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대마녀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도착한다고 말씀 드렸던 시간보다 10분 빠릅니다.”
에르제의 말에 대마녀가 머쓱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되지도 않은 억지소리를 하며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로드라면 말이야.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미리 알고 있었어야지.”
“그게 무슨 억지예요?”
에르제는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무슨 일이긴. 배신자 놈을 잡았고, 지금 못 가게 막고 있었지.”
대마녀는 손가락으로 바란을 가리켰다. 그의 친위대도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바란을 포함해 총 열 다섯.
‘열다섯이나 배신자라고?’
에르제는 눈을 가늘게 떴고, 대마녀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미끼 얘기를 해서 그쪽과 관련된 이야기를 접수했거든. 그러고 하나씩, 하나씩 짚으며 올라갔지. 2장로의 죽음까지. 솔직히 그때까지는 확신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오늘 자기 친위대를 이끌고 뱀파이어 본부를 나가려고 하더라고. 수상해서 막고 있던 참이야.”
“단순히 수상하단 이유로요?”
“응. 뭐 다른 이유도 있긴 하고.”
꽤나 당당한 태도였기에 에르제는 일단 그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마녀가 머리가 빈 인물도 아니고, 그녀 역시 마녀들을 총괄하는 자리에 있는 인물이다.
이런 경우, 신뢰할 만한 존재라는 뜻이다.
‘다른 이유는 조금 뒤에 듣고, 먼저 이쪽부터 확인해 볼까.’
에르제는 이번에 바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가 배신자라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단순한 모함입니다.”
바란은 침착하게 대답하고 있었으나, 그 속에 감춰진 분노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이글거리는 녀석의 눈을 보며, 에르제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럼 내가 묻지. 그 대단한 네 친위대까지 끌고 대체 어디로 가려고 했던 거지?”
“그저 순찰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근방에 수상한 자들은 없는지 조사하려던 것뿐입니다.”
“웃기고 있네.”
그 말에 대마녀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에르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1장로는 현재 강원도 인근 산속의 별장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다른 이유가 그것입니까?”
“맞아. 타이밍이 너무 수상쩍지 않아? 1장로는 미끼를 물고 움직였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야. 그런데 때마침 바란, 저 배신자가 몰래 친위대를 불러 모아서 움직이고 있다? 글쎄, 난 순찰이라는 말을 절대 납득할 수가 없는걸.”
“…….”
에르제는 한숨을 살짝 내쉬며, 바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에르제는 가라앉은 눈으로 바란을 응시했다.
“뒤져 보면 밝혀질 일이죠.”
그의 말에 라하임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바란.”
“…….”
“바란.”
이미 에르제의 말을 듣고 뭘 하려는지 알아챈 바란이었다. 그는 그의 주군인 라하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라하임은 그런 그의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네가 당당하다면, 혼자 이쪽까지 걸어와.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후우.”
라하임의 말에 바란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군까지 제 저의를 의심하시다니 몹시 실망스럽습니다.”
그는 이내 라하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슬슬 그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지고 있었다.
“만약 아니라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그 말에 라하임은 피식 웃었다.
“오늘 일이 아니어도 나와 로드는 너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와 상관없는 대마녀까지 너를 의심하고 있지. 아니라면 아닌 것일 뿐. 오히려 아니라고 한다면, 그동안 네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는 소리이니 네가 반성을 해야지.”
“……억울하군요.”
바란은 얼굴에 조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억울하다는 말과는 달리, 몸의 혈기를 끌어올렸다.
“싫습니다. 저는 제 머릿속을 누군가 들여다보는 걸 질색하니까요.”
“그럼 강제로 하는 수밖에.”
바란은 대마녀와 그녀의 뜻에 따라 대치하고 있던 뱀파이어들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에르제와 라하임까지 합세했으니, 사실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상황.
“늦었지만, 그래도 시간에 맞춰 가야 한다.”
바란은 입술을 깨물며 그렇게 말했다.
“가라.”
그러고는 친위대를 앞세워 공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말 1장로 쪽에 붙어 있었던 거냐.’
그런 그들을 보며 에르제는 서늘한 눈빛을 띠었다.
“제압만 해. 죽이지 말고. 바란은 내가 맡는다.”
에르제는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 로드의 힘을 전신에 흘려보냈다.
끈끈하게 얽힌 혈기들이 온몸을 타고 맹렬히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친위대를 먹이로 던지고 도망가는 바란이 시야에 잡혔다.
‘도망?’
이 와중에 도망이라…….
너는 친위대를 거느릴 자격조차 없는 놈이구나.
에르제는 발가락 끝에 힘을 주고, 그대로 쏜살같이 정면으로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