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220화
드라마나 영화의 종방연 때, 입장하는 순서 때문에 출연 배우들끼리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고 한다.
“늦게 들어갈수록 좋다고 합니다.”
언제부터 매니저 일에 이렇게 적극적이었다고. 에르제는 황당한 눈으로 라하임을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배우도 아니고.”
“장르 드라마에서 범인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범인이 없는데, 장르 드라마가 어떻게 존재합니까.”
라하임은 단호박이라도 씹어 먹은 얼굴이었다.
“주인공은 나중에 등장하는 법!!”
결연한 어조로 라하임이 문을 막고 있을 때,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차창을 통해 문휘영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문휘영도 들어갔어. 이제 내 차례야.”
“강석구와 손유진이 먼저 들어가기 전에는…….”
“그 두 사람은 나보다 더 드라마에 중요한 사람들이잖아. 주연들인데.”
에르제가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에 혈기를 끌어올렸다.
“안 비키면 힘으로 한다.”
“…….”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본 라하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라하임이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도대체 오늘 왜 그러는 거야?”
심지어 평소 입지도 않던 정장까지 입고 왔다. 누가 보면 배우인지 알겠네.
에르제는 라하임의 변화에 의구심을 품으며,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파파파팟―.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에르제가 들어가는 모습을 찍었다.
‘눈부셔.’
이렇게 가까이서 플래시를 맞이한 게 오랜만이라 에르제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나 곧 적응을 해서인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서은우랑 같이 내린 사람은 누구야?’
‘몰라. 모카 엔터에서 새로 미는 신인 아니야?’
‘그러기에는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데. 배우인가?’
‘아, 나 저 사람 알아. 토트윈 매니저. 아주 유명해.’
‘얼굴로?’
‘응. 정장까지 입고 왔네. 핏 미쳤다.’
안으로 들어가니, 조금 전 그를 찍던 기자들이 라하임을 몇 컷 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보다 청력이 뛰어난 덕분에 그들이 하는 얘기까지 다 들렸고.
‘정장 입고 오더니, 아예 눈에 띄는구나.’
이참에 매니저 그만두고 자신을 따라 연예인이라도 되려는 건가?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안 그래도 라하임에게도 그런 말을 했지 않은가.
뱀파이어니 일족을 지키는 일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라고.
‘뭐든 잘하겠지.’
에르제는 휘적휘적 걸어서 배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라하임의 말대로 강석구와 손유진은 아직 입장하지 않은 건지 안에는 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배우들이 와 있었다.
“야! 네가 나보다 늦게 오는 게 말이 되냐?”
테이블에 앉자마자 문휘영이 던진 말이다.
드라마 촬영 초반처럼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툴툴거리는 말투는 여전했다.
그렇다고 친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서 에르제는 미소를 지으며 라하임이 한 말을 읊어 주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분량이 제가 더 많잖아요.”
“……!”
“드라마 비중도 그렇고요.”
“어우, 애를 왜 팩트로 패고 그래~.”
“휘영이 울겠다.”
“너, 너. 다음에 두고 봐. 내가 더 좋은 배역 따낸다.”
문휘영은 테이블 위에 머리를 콩, 박으며 씩씩거렸다.
전 같았으면 바로 멱살을 잡았을 텐데, 문휘영도 사람이 되고 있긴 한 모양이다.
‘하긴, 하고 싶은 배역을 뺏겼으면 그럴 만하기도 하지.’
비주얼에서 밀렸다고 하니,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은 그냥 캐스팅 단계에서 오디션도 없이 제작진 픽으로 뽑힌 거니까.
“너 연기 계속할 거지!? 나 기다린다!?”
문휘영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을 때, 마지막 주인공인 강석구와 손유진까지 종방연 자리에 도착했다.
‘왔구나.’
에르제는 손유진 쪽을 유심히 살폈다.
저번에 악령을 떼어 내기는 했지만, 그 잔재가 남아 있을까 싶어서였다.
다행히 깔끔하게 떨어져 나간 것인지, 악령의 잔재는 보이지 않았다.
“!”
그와 눈이 마주친 손유진은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아니라고.’
에르제는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해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손유진 측에서도 자신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낼 리도 없었으니까.
그냥 악령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종방연의 초반 분위기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나뉘어 있었다.
감독이나 메인 작가는 배우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었으나, 나머지 스태프들은 그들끼리 모여서 무사히 드라마가 마무리된 것을 자축했다.
“이번에 최고 시청률 20프로 넘긴 거 봤죠? 다 여기 작가님이랑 배우님들 덕분입니다.”
“에이,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그래요. 감독님이 잘 찍어 주신 덕분이죠.”
드라마의 결과가 대박이라 부를 수 있는 수준이었으므로, 종방연은 서로 띄워 주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마지막 화를 다같이 보기도 하고, 케이크 커팅식을 하기도 했다.
케이크를 준비한 것은 강석구였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혼자 다 먹고 싶다.’
에르제는 온갖 토핑과 생크림이 가득한 케이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입맛을 다시는 에르제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그게 마치 프린팅된 주조연 배우들을 보며 그러는 것 같아서, 기자들 사이에서도 작게 웃음이 터졌다.
물론 라하임은 ‘흡혈 욕구가 없어지셨다고 하시더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셨나?’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말이다.
그렇게 밥과 술이 함께하는 종방연 1차가 끝이 나고, 2차로 이동하기 전.
“서포트해 주시는 분들 오셨다고?”
“예. 제가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에르제는 종방연 서포트를 온 이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참……. 뭐 하러 이렇게 고생하게…….”
내가 뭐라고.
토트윈도 아닌, 멤버 하나의 서포트를 자처해 뒷정리까지 도맡아 하고 있는 건지.
“보고 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들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위해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데, 어떻게 얼굴 한 번 안 비치고 가 버릴 수 있겠는가.
뱀파이어의 세계에서 그렇게 한다면, 은혜도 모르는 뱀파리스 취급을 받기 십상이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라하임은 씩 웃으며 에르제를 저지하고는, 긴 다리를 이용해 먼저 그쪽으로 향했다.
“?”
매니저가 먼저 가야 하는 법이라도 있는 건가?
에르제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아직 밖에 나가지 않은 강석구가 다가왔다.
“뭐야? 2차 빠질 생각이야?”
“예?”
“2차는 배우들이 돈 내는 거 알지?”
강석구가 흐흐 웃으며, 에르제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단단한 근육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찌른 쪽이 아팠다.
“뭐지?”
강석구는 황당한 눈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무튼, 설마 돈 내기 싫어서 1차만 하고 쏙 빠지려는 거 아니냐고~.”
“그런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인가 갸웃거리고 있던 에르제는 그제야 알아듣고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저희 팬분들이 종방연 서포트를 하러 오셨다고 해서 잠깐 뵙고 가려고요.”
“이야, 쌩까고 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은우는 사람이 됐다, 됐어.”
강석구는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뱀파이어인데 사람이 됐다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에르제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곧 라하임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로ㄷ…….”
로드라고 하려던 라하임은 옆에 있던 강석구를 발견하고 말을 정정했다.
“로ㄷ…… 드 매니저 라하임입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얼떨결에 악수를 나눈 강석구가 에르제에게 귓속말을 했다.
‘너네 소속사는 매니저도 얼굴 보고 뽑냐?’
에르제가 웃음을 터뜨리자, 라하임이 그에게 말했다.
“먼저 가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해서 잠시 기다리게 했습니다. 이제 가시죠.”
‘매니저가 엄청 깍듯해.’
그런 그의 모습에 강석구가 다시 한번 귓속말을 했다.
참……. 첫 촬영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먼저 가 계세요. 저도 곧 따라갈게요.”
“그래~.”
강석구는 순순히 에르제를 보내 주었고, 에르제는 라하임을 따라 이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에르제가 종방연에서 만난 이브들에게 했던 행동은 커뮤니티에서 금세 화제가 됐다.
― 썬은 착하기까지 해…….
┖ 사진도 같이 찍어 주고, 사인도 해 줬다던데.
┖ 아, 나도 갈걸.
― 사인은 이벤트로 따로 추첨해서 준다고 하더라.
┖ ㄹㅇ? 이브들 양심 꽉 찼네.
┖ ㅇㅈ 솔직히 입꾹닫 해도 어쩔 수 없는데.
― 내 돌이 내 배우가 되었다…….
┖ 솔직히 이번에 드라마 스토리도 꽤 재미있었지만, 확실히 배우들이 연기 잘하니까 더욱 재밌더라.
┖ 드라마 첫 방 하기도 전에 우리 썬 연기력 폭망이라고 하던 까들 다 어디갔냨ㅋㅋㅋ
┖ 악성까들 냄비인 거 한두 번이냐? 이때다 싶어 그러는 거지.
┖ ㅇㄱㅇㅈ
― 토트윈 다른 멤들도 연기하는 거 보고 싶다.
┖ 앉닩태 아역 배우나 시켜라. ㅋ
┖ ㅅㅂ 꺼져, 좀!
에르제는 서치 방지가 되어 있는 글들까지 찾아 읽은 뒤에야 한시름을 놓았다.
‘이브들 보고 간 건 잘한 것 같네.’
2차, 3차까지 억지로 끌려갔다가 이제야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술도 꽤 많이 들어가서인지 몸이 좀 나른했다.
밤이 되면 기운이 불끈불끈 솟아야 하는데, 왠지 축 처지는 기분이었다.
‘진짜 인간이라도 되고 있는 건가.’
에르제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으며 생각했다.
어차피 카테이아 대륙으로 다시 돌아갈 것도 아니고 지구에서 계속 살게 될 텐데, 그렇다면 인간으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수명은 확 줄어들 테지만, 그만큼 더 치열하게 살지 않을까.
잠깐 고민하던 에르제는 이내 그런 생각을 접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이러니까 꼭 민주혁이 된 것 같네.’
픽 웃던 에르제는 그와 관련된 일을 떠올리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예전에 윤소희의 기억을 읽어 냈을 때가 떠오른 것이다.
‘……그때 서은우의 부모는 분명 뱀파이어 지부에 있었는데.’
바란이 뱀파이어 지부를 운영하고 있을 때였을 텐데, 시기상 지금과 그렇게 시간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일족을 찾았을 때, 뱀파이어들 중에서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에르제가 서은우의 부모를 떠올릴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 지금껏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에르제는 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긴 하네.’
혹시 서은우의 몸에 다른 이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 건가.
‘……하긴, 그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네.’
아들을 뱀파이어로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웬 다른 뱀파이어가 아들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괜한 죄책감이 들어서 에르제는 몸을 웅크렸다.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만.
‘혹시라도 나중에 마주치게 되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술기운 때문인지 가슴이 좀 답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