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219화 (219/307)
  • 제219화

    219화

    에르제가 플랑에게 시킨 것은 숙소 주변이나 멤버들 주변에 수상쩍은 자들이 없는지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뱀파리스 같은 것들이 걸리면 좋겠지만, 사실 주문한 건 기자들에 관한 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민주혁과 안병인의 관계가 밝혀질까 걱정하고 있었고, 분명 이를 파헤치려는 기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역시나.

    [ 수상한 자를 찾았다, 로드. ]

    댄스 예능이 출범한 이후, 움직인 기자가 있었는지.

    에르제가 미리 쳐 두었던 거미줄에 누군가 걸려든 모양이었다.

    다만 그 결과가 생각보다 좀 과하게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뭐 하러 납치까지 했니?”

    [ 그자는 민주혁의 집을 도청까지 했다. 합당한 처우라고 생각한다. ]

    에르제는 플랑의 연락을 받은 뒤, 가족을 만나러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라하임이 동행한다고 하니, 매니저인 이윤도 크게 뭐라 하지는 않았다.

    “플랑이 도청이라는 단어를 알아.”

    에르제는 라하임과 서울에 마련해 둔 은신처로 향하며 그렇게 말했다.

    “놀라운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게 말이야.”

    그 말에 라하임이 피식 웃었다.

    “로드도 많이 변하신 거 아십니까?”

    “내가?”

    “예. 처음에는 지구 생활에 적응을 거의 못 하시지 않았습니까.”

    “기억 안 나는데.”

    에르제가 딴청을 피우니, 라하임이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그때는…… 좀 위태위태한 점들이 많았죠. 그래도 지금은 보기 좋습니다.”

    “…….”

    라하임은 백미러로 말이 없는 에르제를 슬쩍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라하임은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다.

    “이번에 에이리스하고 서은우와 관련된 일이 끝나면, 그때는…….”

    라하임이 말끝을 흐렸다가, 이내 꾹 감정을 눌렀다.

    “로드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십시오. 저희는 저희가 알아서 잘 살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에르제가 물끄러미 라하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 민주혁과 관련된 기자 일에도 이렇게 직접 나서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한테까지 신경 쓰시기에는 할 일이 많으실 겁니다.”

    “……너는?”

    에르제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에이리스와 서은우의 일이 끝나고 나면 매니저 그만둘 거야?”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하임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로드께서 아이돌을 하고 계시니 제가 일족들을 보살펴야지요.”

    “됐어.”

    에르제는 그 말에 손을 내저었다.

    “네가 얘기하기 전에 나도 생각을 많이 했거든.”

    실제로 이번 큰 사건을 마무리 짓고 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 왔다.

    음유시인으로서 지냈던 행복한 기억들. 그걸 아이돌을 하면서 채우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 일에 정신을 쏟게 된다면, 당연히 일족들에 관한 일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을 터.

    아니, 어쩌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멋대로 아이돌을 하면서 살고, 그러면서 너한테 모든 짐을 떠넘기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닐까 싶은데.”

    “괜찮습니다. 지난 2,500년 동안 로드께서는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에르제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광대뼈 부근이 간질간질한 것이 머리카락이 닿았기 때문인 듯해서였다.

    “2,500년이나 뱀파이어끼리 뭉쳐 살았으면,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예?”

    에르제는 숨겨 두었던 속마음을 꺼냈다.

    “처음에는 말이야. 내가 너희들을 찾고 싶었던 건 일족들을 다시 모아서 지구에 정착할까 싶어서였거든.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웃겨.”

    “…….”

    “다들 날아온 시간대도 다르고, 그러니까 지구에서 살아왔던 시간도 다를 텐데. 내가 다시 로드로 그들을 통치하고 그 위에 서는 건 좀 그래서. 카테이아 대륙도 아니고, 여기는 지구니까.”

    “……그렇긴 하죠.”

    “그러니까 당분간만 뭉쳐 있자. 너희들 얼굴을 봤고, 무사히 살아 있는 거 확인했으니까 괜찮아, 나는. 이제 너희들도 너희들의 삶을 살아. 너도,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에르제는 가만히 눈을 감고 몸을 기댔다.

    “뱀파이어 말고, 지구의 인간들처럼.”

    “…….”

    라하임은 그 말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에르제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모양이었다.

    사실상 그가 한 말은 일족들을 해체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뱀파이어 종족. 그들은 이제 흩어지게 될 거고 자신의 삶을 새로이 살아갈 테니까.

    그리고 고민이 끝났는지 라하임의 표정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하고 싶은 거, 저도 있습니다.”

    “그래? 뭔데?”

    “나중에 자연스럽게 아시게 될 겁니다.”

    라하임은 운전대 위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고는,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저는 그 일이 천성인 것 같거든요.”

    * * *

    플랑이 잡아 두었다고 보고한 사람은 양선호 기자였다.

    그를 보러 가기 전에 검색을 해 보니 기자임에도 참으로 문제가 많은 작자였다.

    연예인들의 공공의 적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연예인들의 비밀을 캐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때문에 처음부터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채 에르제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고생했어, 플랑.”

    에르제는 플랑의 노고를 치하하며, 양선호의 앞에 섰다.

    밧줄을 풀려다가 제풀에 지쳤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연예인 처음 보는 건 아닐 텐데.”

    아, 이 정도 외모는 처음 보는 건가. 그럼 그럴 수도 있지.

    ‘내 원래 모습을 보면 기절하겠네.’

    에르제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음, 양선호 기자님?”

    “예, 예……. 아니, 아니지. X발.”

    초면에도 거리낌 없이 욕하는 걸 보니, 평소 어떤 인성으로 살아왔는지 훤히 보인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 뒤에 나온 말도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너, 이거 불법인 건 알아? 너 뭐야? 네가 뭔데, 날 이런 식으로 납치하고 감금해? 내가! 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불법은 그쪽이 먼저 저질렀지요.”

    에르제는 그가 가지고 있던 도청 장치를 가리키며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민주혁 집에서 양선호가 설치한 도청 장치를 플랑이 회수해 왔고, 그 증거물들이 저기 놓여 있었다.

    그러나 양선호는 소문의 주인공답게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그래서? 불법행위에도 경중이 있는 거 모르냐? 그리고 내가 도청했다는 증거는 있고?”

    이제는 낄낄 웃으며 말하는데, 반쯤 정신을 놓은 거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내 차 유리, 그거 변상해야 할 거야.”

    계속 두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계속 지껄일 것 같아서 에르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글쎄요. 조금 더 본인의 상황을 자각해 보는 게 어떨까요. 여기서 그쪽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 후 묻으면 시체도 못 찾을 텐데.”

    “…….”

    협박이 먹히기는 했는지, 양선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에도 진짜 죽이지 않을 거라고 여겼는지, 눈빛은 여전히 적대감이 가득한…… 좀 마주하기 싫은 눈빛이었다.

    ‘본인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니, 저렇게 뻔뻔하게 계속 그런 기사를 써 왔겠지.’

    그저 민주혁 문제만 해결하고 이런 이들을 놔 줘선 안 될 것 같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죽이실 겁니까?”

    곁에 있던 라하임이 묻자, 에르제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인간 때문에 손에 피 묻히기는 싫어.”

    “로드께서 직접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들이 처리하지요.”

    고저 없는 라하임의 목소리에 양선호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로드라니, 그건 또 뭐야. 이제는 적대감이 아니라 혼란스러워하는 눈빛이었다.

    이를 확인한 에르제가 피식 웃었다.

    “아냐. 죽이는 것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거든.”

    그는 라하임에게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양선호의 앞에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새 삶을 살 기회를 줄게. 물론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무슨 개 X…….”

    양선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르제의 몸 주변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양선호가 헉, 하는 소리를 냈다.

    도청 같은 불법행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면서 이런 건 또 무서워하는 건가?

    하긴 이런 인간들은 늘 그렇다.

    보다 강한 힘 혹은 이해할 수 없는 걸 마주치면 두려워하더라고.

    에르제의 주변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 속에서 붉은색 눈동자가 눈을 떴다.

    꿈벅, 꿈벅.

    “히이익!!”

    기괴한 모습에 양선호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동안의 죗값을 치르고 밖에 나와서는 평범한……. 아니, 평범하게는 안 되려나. 아무튼 착하게 살아.”

    감히 토트윈 멤버를 건드리려 하다니 그러고도 목숨을 붙여 준 것에 감사해야 할 거다.

    이제야 겨우 부자 상봉을 한 민주혁인데, 그 관계를 이런 방식으로 파탄 내려 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에르제는 뱀파이어 로드답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내고는, 그대로 매혹의 힘을 양선호에게 사용했다.

    검은 연기 속에서 뜬 붉은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양선호의 몸이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고, 곧 그의 눈은 몽롱하게 풀렸다.

    “그동안 네가 했던 짓을 자백해.”

    “알겠……습니다.”

    “민주혁에 관한 것들은 모두 잊도록 하고. 아, 방금 우리가 나눈 대화도 마찬가지야.”

    “……예.”

    “형량이 얼마나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네 죗값이니까 제대로 받도록 하고.”

    “……싫……!! 알겠, 알겠습니다.”

    잠깐의 반항이 있었지만, 에르제의 타는 듯한 눈동자를 마주한 양선호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너 때문에 자살한 연예인 유가족들한테 진심 어린 사과도 좀 해.”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한 에르제는 정신적으로 버티지 못하고 그만 기절해 버린 양선호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 정도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민주혁에 관한 기사가 나온 뒤였으면 모르겠는데, 그 전이니까.”

    카테이아 대륙이나 지구나 언제나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이는 건 같은 인간이었다.

    에르제는 기절한 양선호를 한 번 노려봐 주고는 이내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에르제는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위해 움직였다.

    강석구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날짜가 조금 조정되어 예상보다 늦어진 드라마 ‘1년’의 종방연이었다.

    “종방연은 그냥 회식 같은 수준이 아니구나.”

    바닥에 레드 카펫까지 깔려 있었는데, 기자들까지 와 있어서 그런지 마치 시상식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다.

    [ 그동안의 일을 모조리 털어놓은 양모 기자, ‘유가족들에게 사과’ ]

    에르제는 기사 전문과 그 밑에 달린 욕밖에 없는 댓글들을 읽으며 피식 웃었다.

    “이쪽은 잘 해결된 것 같네.”

    “로드께서 직접 하신 일인데,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그렇지. 그런데.”

    에르제는 차에서 내리지 못하게 하는 라하임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차에서 내리지 못하게 하는 수준이 아니라, 운전석에서 내려서 아예 차문을 막고 섰다.

    “좀 비켜 주지.”

    “안 됩니다. 아직 입장할 차례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상관없다니까.”

    평소 자신의 말이라면 껌벅 죽는 라하임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다.

    “저는 라하임이 아니라, 매니저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에르제는 완고한 고집을 부리는 그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