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211화
이유 모를 싸한 분위기가 지나가고, 윤치우는 뮤직비디오가 공개되기 5분 전에 다시 거실로 나왔다.
슬쩍 눈치를 보니, 아까보다는 표정이 한결 괜찮아진 상태였다.
‘진짜 무슨 일 있나.’
전에는 서은우의 영혼 때문에 그런가 보다 싶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닌 듯했다.
지금까지 지켜봐 왔던 윤치우의 성격상, 다른 멤버들에게까지 그런 티를 내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뭔가 다른 문제가 있다는 건데…….’
하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그걸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겠지.’
윤치우는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에르제는 민주혁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뱀파이어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민주혁도 자신이 보통 인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덕분에 안병인과의 일도, 그것 때문에 민주혁과 껄끄러워졌던 것도 해결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악령 덕분에 어찌어찌 우당탕탕 해결되기는 했기에 에르제는 그 고마운 악령을 친히 소멸시켜 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꼭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이왕이면 대악마의 옆이면 좋겠다.
에르제가 그렇게 속으로 진심 어린 기도를 하고 있자니, 거실 소파 가장자리에 앉은 윤치우가 입을 열었다.
“모니터링 하자.”
윤치우의 말에 멤버들은 다소곳하게 앉아서 TV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번 ‘Prologue’ 곡 같은 경우에는 오랜만에 팬들에게 음원을 내는 것이라 거창하게 라이브 방송을 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온전히 뮤직비디오와 음원에 집중할 수 있도록 팬들의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모니터링 영상도 따로 찍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뮤직비디오를 모니터링 할 수 있게 됐다.
곧 뮤직비디오가 재생되고, 멤버들은 TV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뮤직비디오가 공개되고 난 이후, 팬들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나빴다는 것이 아니라, 예상보다 더 열띤 반응을 보여 준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에 연달아 내는 3개의 디지털 싱글의 콘셉트가 판타지였기에 세계관적으로 떡밥을 많이 뿌려 놓은 덕인 듯싶었다.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네.’
자칫하면 과한 콘셉트질로 되레 부담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곡의 장르 자체를 댄스로 풀어냈기 때문에 조금 완화된 모양이다.
기존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장르였는데, 저번 댄스 챌린지가 꽤 성공을 거두었듯.
이번에 칼군무와 더불어 난이도가 높아진 안무는 ‘Prologue’로 한껏 높아진 팬들의 기대를 한껏 채우기에 충분했다.
거기다 판타지 감성까지 한 스푼 넣었으니, 팬들은 어서 빨리 음악 방송에 나와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래서 모카 엔터테인먼트 측에서도 빠르게 음악 방송 출연을 계획했으나,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다.
외부의 다른 문제 때문이 아니었고, 바로 에르제의 스케줄 때문이었다.
어느덧 수도권 최고 시청률 11.3%까지 찍은 드라마 ‘1년’의 촬영으로 인해, 음악 방송 출연 시기가 며칠 뒤로 미루어진 것이다.
웬만한 상황이었다면 소속사 측에서 드라마 제작 팀에게 음악 방송을 위한 스케줄 조정을 부탁했을 텐데.
총 16부작으로 만들어진 드라마의 마지막 완결 부분을 찍는 상황이라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장 대표가 말을 해 보긴 한 모양인 듯한데.’
그러나 드라마 제작 팀에서 양보를 해 주지 않은 듯했다.
완결 부분이라 범인인 에르제의 촬영 장면이 제일 많아서 아무래도 조정이 어렵다고 말이다.
저번에 에르제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제작진 측에서 편의를 많이 봐주었기 때문에 장 대표도 어쩌지 못하고 순순히 물러났다고 한다.
‘어쩔 수 없지.’
아무리 자신이라도 미래를 내다보지는 못하니까.
드라마 촬영으로 인해 음악 방송 출연이 며칠 미뤄지게 되는 것은 장 대표로서도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병원에 입원했던 것 때문에 촬영이 더 몰린 탓도 있으니까.’
장소 섭외 때문에 원래는 미리 찍어 두었어야 했던 장면들이 지금까지 미뤄졌던 것은 오히려 이쪽 잘못이었으니.
그렇게 다른 배우들의 대사까지 외우고 있던 에르제의 곁으로 강석구가 다가와 앉았다.
배우들이 앉을 수 있도록 놓아 둔 간이 의자가 강석구가 앉으면서 아래로 푹 꺼졌다.
“우리 아이돌 배우님, 마지막 촬영 소감이 어떠십니까?”
그래도 몇 달 같이 촬영했다고 둘 사이의 친분은 꽤나 깊어진 상태였다.
“뭐, 시원섭섭해요.”
에르제는 대본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말 그대로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카테이아 대륙에 있었을 때도 몇 번 연기를 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연기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지구로 보면 뮤지컬 연기라고나 할까.’
아니면 대학로 같은 곳에서 하는 연극 정도?
총 러닝타임 1시간에서 2시간가량의 연기를 몇 날 며칠 똑같이 하는 게 그곳의 연기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몇 달 동안 촬영하고, 그것을 TV라는 마도구로 방송하는 방식은 에르제에게도 처음이었다.
때문에 그 길었던 여정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시원하면서도 섭섭한 감정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감정이 없는 언데드 정도는 되어야 아무 생각도 안 들지 않을까?
강석구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처음엔 그랬어.”
“지금은 안 그래요?”
“익숙해지기는 했지.”
강석구는 팔짱을 꼈다.
“넌 본업이 아니지만, 나는 본업이니까. 지금도 이거 말고 다른 드라마에 출연 중이기도 하고.”
“아아.”
에르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강석구가 아이돌 체험을 한다면 비슷하지 않을까?
자신은 앨범이나 이번 활동이 끝났다고 해서 시원섭섭하다거나 하는 감정을 딱히 느끼지는 않으니까.
그것과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강석구가 목소리를 작게 죽이며 물었다.
“근데, 그거 알아?”
“?”
“가수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그런 이야기 유명하잖아. 녹음실 귀신이나 곡에 귀신 붙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
갑자기 나온 귀신 이야기에 에르제가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최근 민주혁과의 일이 있었기 때문에 괜히 기분이 이상해서였다.
헛기침을 한 에르제는 그에게 되물었다.
“근데 그건 왜요?”
“왜 그런 이야기 들어 보면, 그게 대박 날 징조다 뭐 그러잖아.”
“그냥 미신일 뿐이에요.”
에르제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귀신이 붙으면 그냥 안 좋은 거다.
그들의 성향은 악에 가깝고,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으니까.
‘오히려 해를 입혀서 자기들이 이득을 취하지.’
인간들에게 귀신은 해충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귀신이나 악령을 본 적이 없는 강석구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미신이기는 한데, 나 저번에 드라마 촬영할 때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
“비슷한 일이요?”
“어어. 막 물건이 갑자기 떨어지기도 하고, 스튜디오 촬영할 때였나. 아무 이상도 없었는데, 갑자기 정전되기도 했거든.”
한번 이야기를 시작한 강석구는 신이 나서 계속 떠들어 댔다.
“그래서 그때 다들 드라마에 귀신 붙은 거 아니냐면서 무서워했거든.”
“음……. 네.”
에르제가 떨떠름하게 대답하니, 강석구가 몸을 더욱 숙였다.
“근데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그 드라마 초대박 났어. 내 필모 중에서 제일 잘된 게 그거다.”
“아하.”
“너, 그 드라마 뭔지 모르지?”
강석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섭섭하다는 투로 말했다.
“실망인데~, 나는 너희 그룹 곡을 다 아는데 말이야.”
“선배, 거짓말이 많이 늘었네요.”
“응, 맞아. 거짓말이야.”
낄낄 웃은 강석구는 다시 뒤로 몸을 빼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어디 귀신 안 나오나? 시청률은 잘 나오고 있긴 한데, 귀신 붙어 주면 마지막 회 방영될 때 딱 최고 시청률 찍어 줄 것 같단 말이지.”
“귀신 이야기 하면 진짜 귀신 나와요.”
“그래? 그럼 이야기 더 해야겠다.”
큰일 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강석구를 보며, 에르제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악령은 부름에 이끌리는 성향을 지녔다.
악령이 나오기를 바란다거나 그들의 이름을 계속 부른다거나 하는 행위를 계속하면 실제로 악령이 붙거나 새로 태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카테이아 대륙에 있을 때는 인간들의 기본 상식이었는데.’
이곳의 인간들은 다른 종족이 없다고 믿는 탓인지 그런 상식들이 참으로 부족했다.
‘나중에 책 같은 걸 써 볼까.’
그렇게 에르제가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형은 뭐 얘한테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조금 거리가 있었음에도 용케 들었는지, 문휘영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을 툭 내뱉었다.
“너는 뭐 닌자냐? 맨날 어디에 있다가 이렇게 툭툭 튀어나오냐?”
“제가 뭘요.”
“이 정도면 병이야, 병.”
“병이요?”
“은우한테 관심이 너무 많잖아. 맨날 얘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갑자기 튀어나오고 말이야.”
“어우,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문휘영은 몸서리를 치며 얼굴을 팍 구겼다.
에르제는 그런 그를 보며 픽 웃었다.
문휘영과의 관계는 그래도 전보다 나아진 편이었다.
입원하고 난 뒤로 태도가 조금 달라졌는데, 에르제가 자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거 아닌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심약해서는.’
그러니까 악마한테 홀리고 그러는 거다.
뭐 덕분에 더 이상 촬영장에서 기 싸움 할 일은 없어서 편했다.
‘좀 놀려 볼까.’
에르제는 강석구와 티격태격하는 문휘영을 보며, 손가락으로 그의 어깨를 가리켰다.
“어, 귀신 붙었다.”
“……!!”
“눈물 흘리고 있는데 빨간색이에요.”
문휘영은 화들짝 놀라며 짜증을 냈다.
“야! 뭐 그런 기분 나쁜 장난을 쳐!”
에르제와 강석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학!! 얘 진심으로 놀랐는데?”
강석구는 거의 폭소 수준이었다.
그만큼 문휘영의 반응이 찰지기는 했다.
반쯤 기절하는가 싶었으니까.
괜히 찝찝해서 자신의 어깨를 흘긋 보던 문휘영은,
“에이씨, 괜히 왔어. 대본이나 볼걸.”
그렇게 이야기하며 자리를 떴다.
“저번처럼 대사 까먹지 마요.”
그런 그의 뒤통수에 대고 한 마디를 더한 에르제는 이내 자신의 촬영 차례가 왔기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먼저 다녀올게요.”
“그래. 조금 이따 보자. 징글징글하게 내 얼굴 봐야 할 텐데,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두고.”
지금은 에르제 혼자 찍는 장면이었으나.
곧 강석구와는 지긋지긋하게 많은 신을 촬영해야 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물론 강석구뿐만 아니라, 손유진과의 촬영도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슬슬 끝이 보이네.’
어느덧 마지막 회 촬영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며 에르제가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이었다.
“어.”
에르제는 촬영 구경을 하겠다고 온 손유진을 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귀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