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210화
쌀쌀한 바람이 부는 새벽, 남자는 외투의 깃을 여미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 전해야 해.’
긴급한 상황이었다.
혈석은 탈취되었고, 뱀파리스 로드의 계획은 어그러질 위기에 처했으니까.
‘누구인지 모르겠어.’
제이는 입술을 아래로 짓누르며 발걸음을 더욱 빨리 놀렸다.
자신이 어디에 갇혀 있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분명 혈석을 가져간 이들이 존재했다.
뱀파리스 로드인 에이리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전하면, 아마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애초에 혈석을 누가 가져간 건지 모르겠어.’
그러나 사실 가져간 게 누구든, 가져간 이유가 뭐든 제이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당장 에이리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어쩌면 대마녀에게 납치를 당해 자신의 몸속에 있는 혈석이 제거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을지 모르지만.
직접 가서 고해성사를 하는 편이 살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은 자명해 보였다.
‘만약 에이리스가 누가 가져갔는지 알 수 있다면, 살 확률은 더욱 높아질 테고.’
제이는 머리를 굴리며 산을 따라 열심히 오르막길을 올랐다.
산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곳을 한참이나 걸어 올라가자, 곧 결계가 쳐져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 제이는 결계에 손바닥을 올렸다.
혈기를 두르고 결계의 문을 여는 술법을 외우자, 곧 사람 하나가 지나갈 수 있는 틈이 생겼다.
치지직―.
결계의 경계를 두고, 서로 다른 세계가 나뉘어 있었다.
결계의 밖은 평범한 산이었으나, 결계의 안쪽에는 거대한 성이 보였으니까.
대마녀에게 납치를 당한 이후 시간이 꽤 많이 흘러서인지, 오랜만에 돌아온 뱀파리스 본부의 분위기가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제이는 조심스럽게 성 쪽으로 향했다.
‘후우, 침착하자.’
마치 칼날 위를 걷는 기분이라 가슴이 뻐근했다.
제이는 몇 번이나 성문 앞에서 망설인 후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음? 제이 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뱀파리스 하나가 아는 척을 해 왔다.
“한동안 안 오시더니,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급히 로드를 만나 뵈어야겠다.”
제이의 대답에 보초는 가슴에 손을 붙이고 허리를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제이는 보초를 지나쳐 성안으로 들어섰다.
로드를 접견하기 위해 익숙한 길을 따라가던 제이는 곧 성 내부 관리를 총괄하는 집사와 만날 수 있었다.
“로드를 뵈러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제이는 공손하게 대답하고, 집사의 안내를 받아 영접실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십시오.”
집사는 영접실 문까지 바래다 준 이후, 한쪽 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뒤에서 거대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양쪽에 늘어선 횃불을 따라 이동하자, 곧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바닥에 깔려 있는 붉은 카펫의 끝에는 높은 단상 위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곳이 에이리스가 하루를 보내는 곳이다.
꿀꺽―.
긴장한 기색을 숨기고 제이는 붉은 카펫의 끝까지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흐음.”
에이리스는 그런 제이를 보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고 연락도 안 되더니 무슨 일로 왔을까?”
“……일단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올립니다.”
제이는 나머지 무릎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그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에이리스가 상체를 세워 앉았다.
“무슨 일이지?”
대번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오자, 제이는 어깨를 움츠렸다.
“혈석을 빼앗겼습니다.”
“…….”
서늘한 공기가 주변을 휘감았다.
“누구에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이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말을 이었다.
“처음 시작은 대마녀로 인해 발생한 일입니다. 그자가 절 납치해 혈석을 제거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로드께 아무런 소식도 전할 수 없었던 겁니다.”
“……하.”
에이리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대마녀가 혈석에 대해 어떻게 안 거지?”
“……아마 에르제가 말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에이리스가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물론 내가 네 말을 믿는다는 전제하에.”
“……예?”
“네가 대마녀에게 자발적으로 혈석을 가져다 바친 걸 수도 있고, 뭐가 됐든 혈석을 빼앗겼다면 가져간 누군가가 있을 거란 이야기잖니?”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얀 박쥐가 날아와 제이의 앞에서 날개를 접었다.
‘역시 기억을…….’
하지만 꺼릴 건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은 모두 기억에 의거한 사실이니까.
제이는 무릎을 꿇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기억을 읽힐 때의 고통을 생각하니,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귀찮게 버둥대지 말고 가만히 있으렴.”
에이리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이의 의식이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제이의 기억을 다 읽고 난 뒤.
에이리스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하.”
그녀는 제이가 나간 자리를 노려보며 입술을 씹었다.
‘그게 진짜였단 말이지.’
제이의 기억은 그가 말했던 정보와 정확히 일치했다.
다만 한 가지, 제이의 기억에는 중요한 정보 하나가 있었다.
‘1장로…….’
분명 녀석의 기억에서 혈석을 탈취한 것은 1장로였다.
1장로의 본모습은 아니었으나, 도플갱어 술법으로 변해 있던 것이 확실해 보였다.
‘대마녀랑 1장로가 결탁한 건가.’
왜? 어째서?
에이리스는 미간을 좁혔다.
‘내가 1장로를 제물로 바치려고 한다는 건 모르고 있을 텐데.’
설마, 그걸 눈치를 챈 건가?
하지만 대악마와 만났을 때는 이 안에 아무도 들이지 않았는데.
“후우.”
이건 1장로의 머릿속을 직접 뒤져 보지 않는 이상 그 이유를 알기 어려울 터.
‘순순히 기억을 읽게 해 주지는 않을 거고.’
에이리스는 검지로 입술 위를 매만졌다.
‘아니, 차라리 잘됐어.’
대악마 때문이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자신도 1장로를 제물로 바치려고 하지 않았던가.
원래는 1장로가 제이를 죽이도록 만들어 소환 의식을 진행하려고 했는데.
지금 상황을 따지고 보면, 1장로가 알아서 제물이 되려고 하는 중인 것이다.
‘혈석을 빼앗아 간 건…… 분명 내 힘을 빼앗기 위함일 터.’
에이리스는 차라리 그것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서로 비수를 숨기고 틈을 노리고 있는 상황.
제이가 무사히 이곳까지 와서 보고를 해 준 덕분에, 칼자루는 자신이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은 계획을 알고 있고, 1장로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테니 말이다.
‘1장로가 내 힘을 얻기 위해서는 혈석을 먹어야만 해.’
그리고 혈석을 흡수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자신에게 접근할 터.
‘그럼 그때, 대악마를 바로 강림시킨다.’
혈석을 섭취한 1장로라면 거의 자신과 비등한 힘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하면, 대악마를 소환할 제물로서 충분하다.
생각을 정리한 에이리스는 곧 구겼던 얼굴을 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피보다 붉고 짙은 입술이 일렁이는 횃불에 비쳤다.
* * *
라하임이 제이의 기억을 조작해 그를 뱀파리스 본부로 보낸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
에르제는 수시로 뱀파리스 쪽 상황을 보고 받고 있었고, 1장로가 확실하게 혈석을 흡수했는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만약 혈석을 흡수하지 않았는데 독을 발현시키면 금세 눈치챌 테니 말이다.
따라서 에르제는 수시로 대마녀에게서 오는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준비가 끝났다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차피 제이는 조작된 기억이 진짜라고 믿고 있을 테니까 에이리스에게 보고한 이후 살아 있다면 더 이상 공격받을 이유가 없다.’
아마도 1장로에게 들키지 않도록 어딘가에 숨겨 두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혹시나 1장로를 제물로 바치는 일이 원활하게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제이를 다시 제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겠어.’
에르제는 다시 한번 스마트폰을 확인하곤, 이내 사라지지 않는 코코아톡의 1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오늘은 좀 바쁘니.’
에르제는 스마트폰을 소파 위에 얹어 두고,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오늘 그가 이러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드디어 ‘Prologue’가 발매된 지 한 달이 지났고, 이제 그다음 곡인 ‘Parados’의 뮤직비디오가 오늘 공개되기 때문이다.
“으으, 긴장돼여.”
안단테는 잔뜩 쫀 채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곡은 안단테가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곡이었다.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이어지는 토트윈 세계관의 서사, 그 중간의 연결 고리를 맡은 게 이번 곡이었고.
이는 곧 두 곡의 유기성을 높여 줘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발매는 한 달 간격으로 이루어지지만, 최종적으로 에필로그까지 음원이 나오고 나면.
3곡을 연달아 들었을 때, 한 편의 대서사시가 완성될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이번 음원에서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하면, 다음 곡까지 연달아 망할 가능성이 높아지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안단테로서는 마치 심판대에 오른 기분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태현우가 심각한 얼굴로 불안해하는 안단테에게 말했다.
“나는 이번 곡 별로더라.”
“……!”
상당히 충격 받은 표정으로, 안단테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내 마음의 별로.”
찡긋 웃으며 태현우가 드립을 마무리하자, 곧장 안단테의 베개가 날아들었다.
“아! 놀랐잖아여!!”
“쟤들은 어떻게 하루를 안 쉬냐.”
어느새 베개 싸움으로 변질돼 버린 모습에 에르제의 옆에 앉아 있던 민주혁이 혀를 찼다.
“재미있어 보인다.”
그리고 에르제는 민주혁이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마침 뮤직비디오가 공개될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아 있던 차에 놀 거리로 아주 적당해 보였다.
에르제는 손가락으로 민주혁의 어깨 너머를 가리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민주혁 뒤에 귀신!”
“……!!”
기겁한 민주혁이 고개를 뒤로 휙 돌리자, 에르제가 기습 공격을 가했다.
있지도 않은 귀신을 언급한 건 지금을 위해서였다.
“나의 분노를 받아라!”
에르제가 웃음을 터뜨리며 베개를 집어 들고 민주혁을 공격했다.
“야! 너까지, 아! 아파!”
결국 참다못한 민주혁도 베개 싸움에 합류했다.
4명이 뒤엉키는 거실에서 윤치우만 홀로 한 마리 학처럼 고고했…….
“하아.”
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윤치우는 한동안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던 스마트폰을 떨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뮤직비디오 공개될 때 불러 줘.”
“응? 어디 가. 같이 놀자!”
“싫어. 애들도 아니고.”
저도 모르게 사납게 대답한 윤치우는 이내 말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 그래.”
윤치우는 그렇게 말하며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
“…….”
항상 인자하던 맏형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멤버들은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태현우가 코끝을 긁적이며 말했다.
“응, 조용히 있자.”
“그, 그게 좋겠어여.”
“처음부터 그랬으면 좋았잖아.”
쭈굴쭈굴해진 멤버들은 헛기침을 하며 뮤직비디오 공개 시간까지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