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207화
이윤이 보여 준 것은 새로 시작되는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었다.
‘청화에서 제대로 밀어준다고 말한 건 무슨 의미지?’
에르제는 이윤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청화는 토트윈을 후원하는 것 말고 방송 쪽으로는 달리 연을 맺은 곳이 없을 텐데.
그렇게 에르제가 궁금해하고 있으니, 이윤이 궁금증을 해결해 주려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청화 쪽에서 최종 상금이나 소품 등을 지원한다고 나섰더라고. 그 덕분에 상금 규모도 처음 기획보다 더 커진 모양이야.”
“오오!”
멤버들 모두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곧 민주혁 쪽으로 시선이 모아졌다.
이윤이 처음 민주혁을 콕 집어서 말한 이유도 있었으나, 프로그램의 특성상 그가 토트윈 멤버 중 제일 적격자였기 때문이다.
‘그럼 청화가 지원해 주는 것도 당연히 민주혁이 하게 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겠네.’
저번에 이야기를 잘 마무리하지 못한 것 때문인지 아들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안병인의 노력이라고 봐야 할 듯싶었다.
‘그런데 이거 괜찮은 거 맞나…….’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민주혁을 밀어주는 것은 위험할지도 몰랐다.
다른 아이돌이나 연예계 내부 쪽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팬들.’
민주혁은 어머니 혼자서 키운 아들이었고, 지금도 팬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민주혁에게는 아버지가 없는 것으로.
자세한 내막을 밝히지는 않아서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나셨다느니, 버리고 간 거라느니 하는 이런저런 추측들이 나오긴 했으나.
어찌 되었든, 현재 팬들이 알고 있는 민주혁 개인의 서사는 그랬다.
하지만, 만약에.
‘사실 민주혁의 아버지는 청화 회장인 안병인이었다.’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래서 토트윈을 기업 차원에서 후원했던 것이고, 이번 프로그램의 지원을 맡은 거라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겠는데.’
에르제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민주혁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인간들은…… 늘 그래 왔으니까.’
동정심을 유발하는 과거를 가진 민주혁이 알고 보니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었다고 밝혀지는 것은 결코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팬이 아닌 이들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팬들까지도 배신감에 악담을 쏟아 낼지도 모른다.
배신감이라는 말로 포장된 박탈감이겠지만 말이다.
‘아마 전후 사정을 다 밝힌다고 해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겠지.’
기존의 스토리로 동정 여론이 깔리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으나, 그 반대가 되면 더욱 심각해질 거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에 대한 질투심과 박탈감은 더욱 심해질 테니.
‘그게 청화 같은 대기업 회장이 아버지라면 더욱 그럴 테고.’
가슴을 꾹 누르는 답답한 숨을 뱉어 내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은 사라지질 않았다.
‘시작이 잘못됐어.’
그때는 자신이 너무 이 세계에 대해 몰랐던 게 문제였다.
그저 아버지와 아들이 오해를 풀고 화해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안병인이 기업 후원을 하게 두는 건 막았어야 했다.
‘……그렇다고 마땅한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쩌면 서은우가 했던 대로, 둘이 만나게 해서 터놓고 이야기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사정을 들먹이는 것만큼 나쁜 것도 없으니까.
에르제의 허탈한 시선이 민주혁에게 머물다가 이내 흩어졌다.
“…….”
최근 민주혁이 했던 말.
그냥 같은 그룹의 멤버 정도로 선을 긋자는 말이 에르제의 폐부를 쿡쿡 쑤셨다.
그냥…… 그 말대로 그랬어야 하는 게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에르제는 씁쓸한 감상을 뒤로한 채 민주혁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심 제안을 거절하기를 기대했지만, 그걸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역시 세상일이라는 게 뜻대로 돌아가진 않는다.
“할게요.”
민주혁은 고민 끝에 대답을 내놓았다.
청화라는 이름이 마음에 걸려서 고민을 오래 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매력이 컸던 듯하다.
“그럴래!?”
이윤이 손뼉을 치며 화답했다.
그런 그의 손에는 프로그램의 이름과 콘셉트가 나온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하아.”
에르제는 들리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 화면을 바라보았다.
‘민주혁이 거절하기 어렵기는 했지.’
그도 그럴 것이 프로그램의 콘셉트가 춤이었으니 말이다.
참가하는 인원수를 보니, 거의 무명 아이돌까지 참가하는 모양이었다.
각 팀마다 한 명씩 뽑아서 예능을 하게 되는 거였는데, 아직 기획 단계여서인지 어떤 방식으로 한다고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민주혁의 마음을 잡아끈 것은 ‘서바이벌’이라는 단어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기 싫어하니까.’
그리고 인정받고 싶어 하니까.
겉으로는 차갑고 도도한 이미지이지만, 알고 보면 그 속을 가장 읽히기 쉬운 녀석이 민주혁이었다.
어릴 때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민주혁은 칭찬 받는 것을 좋아했고 또 그것을 자기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편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토트윈을 위해 어떻게 하면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늘 생각하는 기특한 녀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바이벌이라는 단어에 꽂힐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자신이 춤으로 상위권에 오른다면, 토트윈의 위상도 그만큼 높아질 테니까.
‘그리고 참가하는 아이돌이 많은 만큼, 다른 팬들이나 일반인들의 관심도 많이 끌 수 있을 테고.’
댄스 챌린지로 최근 팬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기는 했지만, 토트윈 멤버 중 어느 누구도 아직 만족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마 팬들을 확보하는 것까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에르제는 장 대표에게 전화하는 이윤을 보며 다시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민주혁의 아버지가 안병인이라는 사실은 그냥 묻혔으면 좋겠네.’
둘 사이의 관계가 좋아지고 민주혁이 그를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냥 관련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도록.
에르제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뱀파이어 쪽 인원을 끌어와 볼까.’
주변의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을 막는 용도로 말이다.
시작은 자신이 벌인 판이었다.
의도의 선함을 떠나서 지금은 결과만을 생각해야 할 때였다.
그날 밤.
에르제는 연습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뒤 플랑에게 전했다.
주변에 수상한 인간들이 있는지, 뱀파이어 쪽의 믿을 만한 이들을 불러서 확인해 보라고.
* * *
새벽, 모두가 잠에 깊이 빠진 시간.
민주혁은 한참을 뒤척이며 잠을 자려고 애썼지만, 생각이 많은 탓인지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다들 피곤했나.”
민주혁은 작게 중얼거리며 결국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방 안에는 윤치우와 안단테의 깊은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느덧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잠들어 있는 그들을 바라보던 민주혁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결국 고개를 털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스마트폰을 챙겨서 자는 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거실로 나왔다.
‘……조용하네.’
다른 방에 있는 에르제와 태현우도 자고 있는지, 거실 쪽 방에도 별다른 소리가 들려오질 않는다.
민주혁은 적막한 새벽을 고스란히 느끼며 거실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스마트폰을 들어 무튜브 영상들을 주르륵 올려 보았다.
평소 춤 영상과 토트윈 영상을 제외하고는 잘 보지 않아서 거의 그것과 관련된 영상들만 알고리즘에 의해 떠 있었다.
‘춤…….’
민주혁은 며칠 전, 이윤이 말했던 프로그램을 떠올리며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춤 관련 예능 프로그램이라……. 그것도 서바이벌이란다.
당연히 처음 프로그램 얘기를 듣자마자 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자신이 거기서 유의미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면 분명 토트윈에 유리하게 작용할 테니까.
아이돌 그룹의 입장에서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노래는 쟁쟁한 솔로 가수들이, 춤은 전문 댄스 팀이나 비보이 팀들이 있다.
그리고 요즘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랩도 늘 래퍼들에게 비교당하는 것이 일상.
심지어 랩의 경우에는 현직 래퍼들이 아이돌을 조롱하는 경우까지도 있지 않나.
‘그것도 TV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그러니 춤과 랩 두 가지를 맡고 있는 민주혁으로서는 ‘실력’에 더욱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그램에 나와서 늘어나게 될 팬들도 물론 중요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청화가 끼어 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사실, 저번에 에르제를 사이에 두고 안병인과 만나게 되었을 때.
민주혁은 그동안의 앙금을 어느 정도는 풀어낸 상태였다.
안병인에게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사정이 있었고, 그날 사과를 하면서 흘린 안병인의 눈물에서 진심이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물론 당시에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예전처럼 안병인을 미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뭐가 되었든 잘못을 깨닫고 직접 사과하러 온…… 자신의 아버지였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겠지.’
에르제가 했던 고민을 그대로 떠올리며 민주혁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청화에서 지원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그냥 직접 이야기를 해 볼까.
민주혁은 스마트폰에 저장해 둔 안병인의 번호를 화면에 띄우며 고민했다.
새벽이니 전화는 어렵고, 코코아톡으로 보내면 괜찮으려나.
그렇게 지원해 주지 않아도 자신은 프로그램에 나갈 거라고, 괜히 나중에 관계가 밝혀졌을 때를 생각해 일을 크게 키우지 않는 게 좋지 않겠냐고.
“……후우.”
한참 동안 내용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던 민주혁은 결국 아무것도 적지 못하고 스마트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원래는 유명 댄서들의 영상이나 보면서 안무 아이디어나 좀 얻을까 했는데, 그러기에는 기분이 너무 다운되어 있었다.
‘……은우한테도 그때 말을 너무 심하게 한 것 같고.’
한번 그쪽으로 생각이 흘러가니, 최근에 있었던 안 좋았던 기억들이 마치 밀물처럼 밀려온다.
그냥 속에 있는 말들 다 하면서 편하게 살면 좋을 텐데.
이럴 때 보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에르제가 정말 부러웠다.
민주혁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끼익,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거실로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쿵.
“악!”
문턱에 발을 찧은 걸 보니, 에르제가 틀림없었다.
‘얘는 왜 이 시간에…….’
저번에 자신이 한 말도 있어서 에르제를 대하기가 어색한 민주혁은 황급히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드르렁, 푸우.”
그러고는 눈을 꾹 감고 작게 코 고는 소리를 냈다.
처음부터 그냥 거실에서 자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대충 물이나 마시고 들어갈 줄 알았는데, 더 이상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질 않았다.
‘대체 뭐 하길래…….’
민주혁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슬쩍 실눈을 뜨고 부엌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에르제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방으로 돌아간 건가?’
화장실을 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 아마 발소리를 죽이고 방으로 다시 돌아간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한 민주혁이 슬쩍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눈빛을 한 채 주먹을 들어 올리고 있는 에르제를 발견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