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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204화 (204/307)

제204화

204화

대마녀의 손등에 힘줄이 살짝 솟았다. 언제든지 혈석을 부숴 버릴 것처럼.

그러나 에르제는 가볍게 웃어넘기며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라하임과 세리나가 그를 지키듯 양옆에 서서 허리를 꼿꼿이 폈다.

“나한테는 그걸 부수는 게 손해가 되지는 않아요.”

“글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혈석을 제거했다는 건 이게 필요하다는 뜻 아닌가?”

“필요하긴 하죠.”

에르제는 어깨를 위로 으쓱 올렸다.

“하지만 지름길로 가로질러 가지 않는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요.”

“흐음.”

대마녀는 손가락을 움직여 혈석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것은 붉은 혈기가 반사되는 빛에 섞여 요기를 뿜어냈다.

“여유 있는 얼굴 보니까 좀 짜증이 나네?”

대마녀는 픽, 웃으며 이내 혈석을 손바닥 안에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에르제 쪽을 향해 던졌다.

“!”

에르제가 앉아 있는 것보다 조금 높게 날아간 혈석은 다행히 곁에 서 있던 라하임이 낚아챘다.

대마녀는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처음에 나한테 제이 보낸 거, 너지?”

“네.”

에르제가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 대마녀가 미간을 좁혔다.

“하긴. 저 녀석 정도의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지는 못했겠지.”

에르제는 라하임에게서 혈석을 넘겨받고는, 이를 자세히 확인했다.

확실히 제이의 몸에서 자라나고 있던 혈석이 맞았다.

데 캄과 그 외의 희생양들이 가지고 있던 힘, 그것들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에르제는 고개를 들어, 못마땅한 얼굴의 대마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혈석은 진짜인 것 같네요.”

“그럼 내가 사기라도 쳤을까 봐?”

“셈을 해야 한다고 해 놓고, 갑자기 넘겨주길래 확인해 본 거예요.”

에르제는 혈석을 준비해 온 조그만 상자 안에 집어넣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도움을 받았으니, 그쪽 말대로 값은 치러야겠네요.”

“입을 싹 닦는 타입은 아니라서 좋네.”

“에이리스가 없어지고 나면,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으니까요. 윤소희 실장도 그렇고.”

“이후에 얼굴 볼 일이 있을까 싶지만.”

코웃음을 친 대마녀는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원하는 게 뭡니까?”

처음 제이가 대마녀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때 제시했던 내용은 대마녀에게 그리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뱀파리스나 뱀파이어의 세력을 마녀들에게 넘기겠다는 것 말이다.

혹시라도 그게 필요했다면, 지금처럼 뱀파이어인 자신들을 도와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원하는 게 따로 있다는 뜻인데.’

하지만 자신도 그렇고 대마녀도 그렇고, 겉으로는 협력하는 듯 보이지만 속내를 숨기고 있어서 알기가 어려웠다.

에르제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곧 잠깐의 침묵을 대마녀가 깼다.

“마녀들과 뱀파이어가 협력 관계에 있고 사이가 좋다는 것은 다 옛말이야. 아마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너희들이 퍼뜨린…… 뭐랄까 일종의 세뇌 같은 느낌?”

그녀의 말에 에르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지구에는 뱀파이어가 없었을 테니까.

마녀가 먼저 생겼는지, 카테이아 대륙의 뱀파이어가 먼저 지구로 넘어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존 카테이아 대륙에서의 가치관이 지구에서도 이어졌다는 것은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굳이 뱀파이어와의 좋은 관계를 끊어 내려고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닐 터.

에르제는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대마녀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대마녀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허공에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런 건 어떨까? 너희들을 도와주는 대가로 그 관계를 바꿔 보는 거지.”

“……어떻게요?”

“너희들이 우릴 섬기는 건 어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그녀의 말에 곧장 라하임이 발끈했다.

에르제 또한 기분이 썩 좋지 않았기에 라하임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우리는 이번 일이 끝나면 더 이상 이쪽 세계에 관여하지 않을 거예요. 조용히 살고 싶은 일족들은 살 터전을 마련해 줄 것이고, 그게 아니면 저처럼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살아갈 수도 있겠죠.”

에르제가 언짢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섬길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어요. 그리고 우리 또한 다른 이들을 발아래 두지 않을 겁니다.”

“그래?”

대마녀는 심드렁한 태도로 대꾸했다.

“너희들이 또 다른 에이리스가 되는 것은 아니고?”

“…….”

그녀의 말에 에르제는 입을 잠깐 닫았다.

대마녀의 말에 억울하기는 했지만, 그쪽 입장에서 보자면 충분히 고려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 세력이 다투고 있고, 마녀는 그중 한 세력을 도와주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만약 도와주던 세력이 승리하고 나면, 마녀들을 이전처럼 협력 관계로 대해 줄까? 동등하게 여길까?

“토사구팽을 걱정하는군요.”

“오, 그런 말도 알아?”

대마녀의 말에 에르제가 뿌듯한 얼굴로 가슴을 폈다.

“사자성어도 공부한 지 좀 되었으니까요.”

“하긴. 은근 사자성어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지.”

사실은 예능 나갔을 때 무식하게 보이지 않도록 이윤이 강제로 공부시킨 거지만.

나름 재미가 있어서 현재 에르제는 웬만한 이들보다 사자성어에 해박한 편이었다.

“일취월장하여 그동안의 구곡간장을 끊어 냈어요. 이런 게 바로 마부위침이 아닌가…….”

“……그만해.”

신난 에르제를 말리며, 대마녀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어느 순간, 에르제의 페이스에 휘말려 정신을 놓을 뻔해서였다.

“후우.”

심호흡을 한 대마녀는 원래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우리는 지구에서 계속 살아온 인간들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너희들은 달라. 다른 세계에서 왔고, 인간이 아니지.”

“…….”

“그러니까 너도 목숨을 걸어.”

“?”

에르제가 고개를 갸웃하자, 대마녀가 준비해 온 무언가를 꺼냈다.

“너만 목숨을 건다면 억울할 테니까 나도 같이 걸지.”

대마녀가 꺼낸 것은 저울이었는데,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았음에도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특이한 저울이었다.

“약속의 저울이라는 물건이야.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종의…… 유물이라고나 할까.”

대마녀는 가벼운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와 내 피를 이쪽에 담을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목숨의 무게가 되어서 올려지겠지.”

픽 웃은 대마녀는 그 이후로 설명을 조금 더 해 주었다.

아래로 내려간 쪽에는 약속을, 반대편에는 약속을 하는 두 사람의 피를 담는다.

그리고 그 약속을 깨면 목숨을 단 쪽이 무거워진다고 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약속을 어긴 이의 목숨을 앗아 가도록 만들어진 마도구.

‘약속과 목숨의 무게를 다는 저울인가.’

카테이아 대륙에서도 비슷한 마도구가 있었기에 그리 생소하지는 않았다.

“나도 그쪽을 다 믿을 수는 없으니까 확인부터 할게요.”

에르제는 손에 혈기를 둘러 저울에 이상한 장난질을 해 놓은 건 아닌지 확인했다.

꼼꼼하게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살펴보았으나, 다행히 수작을 부린 낌새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마녀는 양손을 들어 올린 채 말했다.

“나는 그런 비열한 짓은 안 해.”

“그런 것 같네요.”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톱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쭉 그었다.

핏방울이 떨어지지 않고, 손바닥의 상처에 맺혔다.

이를 확인한 대마녀도 손바닥에 상처를 내서 핏방울을 만들었다.

“서로 끝까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어느 누구 하나 서로를 배신하거나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약속이 저울에 올려지고, 둘의 핏방울은 그 반대편에 후두둑 떨어졌다.

“음…….”

그러나 저울에서는 별다른 특수 효과 같은 게 나오지는 않았기에, 에르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끝인가요?”

“원래 이래.”

대마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전에도 몇 번 사용해 봤는데, 뭐 겉보기에 특별한 건 없더라고. 하지만.”

대마녀는 저울을 다시 들고 왔던 상자에 그대로 넣으며 말했다.

“약속을 어기면, 가장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야. 내가 어기면 마녀들 모두가, 네가 어겼을 때는 뱀파이어 모두가.”

“무섭네요.”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내 제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제부터는 서로 믿고, 계획을 공유해 보기로 할까요?”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면, 얼마든지 도와주도록 하지.”

대마녀는 짐 정리를 마치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뭘 하면 되지?”

“전력은 부족하지 않아요. 늑대인간들 쪽에서도 도움을 주겠다고 연락이 왔거든요.”

“흠……. 그럼?”

“뱀파리스의 1장로.”

에르제는 그렇게 말했다.

“애초에 혈석을 제거한 가장 큰 이유는 1장로 때문이에요. 녀석을 낚아서 에이리스를 고립시키는 것.”

1장로가 대마녀의 거래에 응했다는 것은 분명 에이리스를 배신하겠다는 뜻이었다.

서은우, 에이리스 그리고 1장로.

셋의 속내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에이리스와 1장로 둘 사이의 관계는 틀어졌으리라.

‘1장로가 우리를 역으로 낚으려는 의도였으면, 혈석을 제거하는 일에 동의했을 리 없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대악마를 소환하는 일이 한참은 늦어지니 말이다.

“에이리스가 1장로를 새로운 제물로 선택했든, 혹은 1장로가 더 이상 에이리스의 만행을 두고 보지 못하게 되었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뭘 하면 되는 건데?”

“어부요.”

“……어부?”

“1장로를 낚을 어부가 되어야 해요.”

대마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럼 미끼는 뭐로 하려고?”

에르제는 상자 안에 넣어 두었던 혈석을 다시 꺼냈다.

“이거, 열화판 충분히 만들 수 있죠?”

“……음.”

대마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은 해. 그 대신, 그러려면 혈석을 내가 다시 가져가야 할 것 같은데. 1장로를 속일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그 안의 기운을 좀 뽑아내야 해.”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혈석을 넘겨주었다.

약속의 저울로 인해서 서로 배신할 수 없는 상황이 된 덕분이었다.

대마녀는 혈석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피고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충분히 속일 정도로 만들 수 있겠네. 진품을 직접 본 건 여기 있는 우리들밖에 없으니까.”

“다행이네요.”

에르제는 제이가 누워 있는 침대 근처를 서성이며 생각했다.

‘1장로가 제이의 혈석을 제거하는 일에 동의한 건 분명 그걸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서일 텐데.’

귀찮은 건 싫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1장로의 성격상.

에이리스와 갈라졌다고 한다면, 굳이 혈석을 이용해 대악마를 부르려고 가져가는 것은 아닐 터.

‘그냥 혈석의 힘을 자신이 흡수해서 에이리스가 가진 로드의 힘을 뺏으려는 생각일 가능성이 높아.’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 위를 두드리던 에르제가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럼 이후에,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에이리스에게 알린다면.’

꽤나 볼만한 집안싸움이 될 것이다.

자신은 그저 그 약해진 틈을 찌르기만 하면 될 것이고.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에르제는 대마녀 쪽으로 몸을 틀었다.

‘보험 하나만 더 들어 두자.’

“가짜 혈석을 만들 때, 그 안에 다른 것도 추가할 수 있나요?”

“어떤 거?”

“독이요.”

에르제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혈석을 흡수하든 아니면 그 혈석으로 대악마가 강림하든…… 두 경우 모두 거의 죽을 정도의 치명적인 독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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