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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97화 (197/307)

제197화

197화

“와! 은우 5명을 합쳐서 커다란 은우가 됐어.”

“그러게. 이런 게 제작이 되나?”

에르제가 등신대 앞에 도착하기 전, 커피 트럭을 발견하고 다가온 사람들이 나눈 이야기다.

손유진은 까치발까지 들고 손을 뻗었으나, 결국 등신대 머리에도 닿지 못하고 포기했을 정도.

“……폭 80cm에 길이는 정확히 3m 8cm네.”

걸어오면서 정확하게 수치를 잰 에르제가 놀라 혀를 내둘렀다.

곧 등신대의 주인을 발견한 사람들이 손에 든 커피 잔을 마치 와인 잔처럼 들어 올렸다.

“등신대에 치얼스.”

“커피 잘 마실게요, 은우 씨.”

에르제는 얼음만 남아 있는 일회용 컵을 들어 올려 화답해 주었다.

그러고는 가까이서 등신대를 구경하고 있는데, 손유진이 다가와서 물었다.

“그나저나 서후랑 많이 친한가 봐요? 이런 것도 보내 줄 정도면.”

“서후? 아, 지서후요. 네. 조금요.”

“에이. 조금 친한데, 저런 등신대도 제작해 줘요?”

손유진이 풋 하고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서후하고 같이 술 마시면 좋겠네.”

그 말에 에르제가 대답하기도 전에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바로 마시러 갈까, 누나?”

지서후였다.

그는 이 더운 날씨에 양복까지 차려입고 온 상태였는데, 여기 오기 전에 다른 곳에서 인터뷰 약속이 있었단다.

지서후는 뚜벅뚜벅 걸어와서, 에르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커피 트럭만 받을게. 저건 가지고 돌아가라.”

“왜~. 너희 숙소에 가져다 놓으면 딱이겠구먼.”

“높이 때문에 안 들어갈 것 같은데…….”

“아, 그런가?”

지서후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턱을 빼며 끄덕거렸다.

“하긴. 너희 숙소 나오는 영상 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둘이 친한 거 맞네~.”

그러고 있으니, 곧 둘의 대화를 듣고 손유진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지서후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야, 오늘 같이 술 먹기로 약속한 거다?”

“어어. 알았어.”

지서후는 멀어지는 손유진에게 손을 흔들어 주다가 이내 어깨동무를 한 채 에르제를 끌고 갔다.

“뭐야, 어디 가? 나 곧 촬영인데.”

“촬영 전에 잠깐 커피나 마시자고.”

지서후는 에르제의 말에 커피 잔을 부딪치고는 말을 이었다.

“요즘 통 연락이 없어서 바쁜가 했더니, 내가 바빠졌을 때 연락을 주고 그래.”

“바쁜 거 맞아?”

에르제는 턱으로 커피 트럭을 가리켰다.

“바쁘면 촬영 끝나고 오면 되지.”

“오늘 하루 널 위해서 뺐다 이거 아니냐~.”

지서후는 에르제의 등을 툭 두들겼다.

“친구잖냐.”

“……부담스러워.”

에르제는 뻣뻣하게 대답하고는, 왼손을 들어 오른쪽 어깨에 올려진 지서후의 팔을 내렸다.

“그래서 왜 일찍 온 건데?”

“그냥, 연기 선배로서 조언해 줄 거 없나 하고.”

지서후는 입꼬리를 올리며, 멀리 떨어진 문휘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 자식, 너한테 까부는 것도 단속할 겸.”

“뭐야,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지서후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저거, 저번에 SNS에 글도 올렸었잖아.”

“아.”

그때를 떠올린 에르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시에는 악마가 붙어 있었거든. 저 녀석한테.”

“악마? 뭐야, 문휘영이 악마랑 거래라도 한 거야?”

“응. 무슨 거래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다행히 거래 이행은 되지 않은 모양이야.”

“……설마, 그래서 그런 건가.”

지서후는 이마를 찌푸린 채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악마는 제거했고?”

“응.”

“흐음…….”

지서후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쟤, 악마 떨어지고 나서도 별다를 거 없지?”

“……!”

어떻게 알았냐는 듯 쳐다보는 에르제의 표정에 지서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줄 알았어.”

“어떻게 알았는데?”

“이거, 너만 알고 있어라.”

지서후는 다시금 에르제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원래는 이번에 네가 맡은 역할. 문휘영이 하고 싶어 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네가 별다른 오디션도 안 보고 뽑힌 거지.”

“…….”

“그러니까 쟤 입장에서는 속이 뒤집어지는 거야.”

지서후는 속삭이던 자세를 풀고, 에르제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아마 악마랑 거래한 것도 비슷한 내용일 것 같은데. 아무튼, 그러니까 악마가 떨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너한테 적대적이지.”

“……그랬구나.”

에르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니 이해가 간다. 어째서 악마가 없는데도 저렇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지.

“어려서 그래, 어려서.”

“하긴. 1,000살도 못 살아 본 애송이들뿐이니까.”

“그러게 말이다.”

지서후는 쯥, 하고 입술을 말아 넣었다.

“아, 담배 당겨.”

그렇게 말한 그는 담배를 품에서 꺼냈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와야겠다.”

“나는 촬영하러 갈게.”

“어어. 지켜보고 있을 거야.”

지서후는 검지와 중지를 세워, 손을 앞뒤로 움직였다.

“아주 매의 눈으로 지켜본다.”

“매의 눈은 무슨? 나보다 시력도 안 좋은 게.”

“보름달 뜨면 내가 이기거든.”

“한 달에 한 번 이겨서 좋겠다.”

에르제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이내 촬영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강현규(에르제의 배역 이름)는 주머니에 든 칼을 만지작거리며, 한 남성을 뒤쫓고 있었다.

사실 뒤쫓는다기보다는 들키지 않게 몰래 따라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했다.

비가 오는 거리.

짙은 남색 우비를 입은 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남자는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고, 점점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아마 본인의 집으로 가는 길인 듯했는데, 꽤 얼기설기 복잡하고 으슥한 골목길이다 보니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남자는 술에 취했는지 비틀비틀 가로등 밑을 걸었다.

깜박, 깜박.

간헐적으로 깜박이는 주황색 불빛이 남자의 뒷모습을 비추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자리를 지나는 강현규의 모습.

찰박찰박 빗물을 밟던 강현규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의 신발에 밟힌 물방울이 위로 강하게 튀어 올랐다.

탁―!

물방울이 무릎 높이까지 튀어 오른 순간이었다.

푹! 하고 살갗을 찌르는 소리가 골목길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는 남자의 입을 한 손으로 막은 뒤, 다른 손에 쥔 칼로 정확히 경동맥을 찔러 넣은 상태였다.

후두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마치 빗물처럼 강현규의 몸에 튀었다.

볼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피. 강현규는 피로 물든 골목길을 낮게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졌다.

다음 날.

신고를 받고 온 경찰들이 사건 현장을 노란색 테이프로 둘러쳤다.

남자의 시체는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진 뒤라, 바닥에 그어진 하얀색 선만이 그 자리에 누군가 있었음을 증명했다.

“X발.”

민찬혁(강석구의 배역 이름)은 조금 늦게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욕설을 뱉어 냈다.

“또 그 X끼야.”

“그런 것 같네.”

뒤따라온 이혜선(손유진의 배역 이름)이 손에 비닐장갑을 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법이 똑같아.”

이혜선은 눈썹을 찌푸렸다.

“경동맥을 찔러서 한 번에 죽이고, 피해자의 손가락을 꺾어서 이상한 모양 만드는 거.”

“부검 결과는?”

“뭐, 굳이 들을 필요 있나.”

이혜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노란 테이프 안으로 들어갔다.

민찬혁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 달에는 두 번이었는데, 이번 달은 아직 많이 남았는데도 벌써 두 번째야. 주기가 점점 빨라지는 거 아니냐?”

“그럴 수도 있고, 이번 달은 여기서 멈출 수도 있고.”

“그렇게 태평한 소리 하고 있을 때냐.”

민찬혁은 쯧 하고 혀를 찼다.

“피해자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도 아직 밝혀내지 못했는데.”

“……연쇄살인마야. 그냥 쉬운 표적이 있으면 죽이는 거 아닐까?”

“내가 그 X끼 꼭 잡아서 무릎 꿇리고 물어본다.”

“……잠깐만.”

분개하는 민찬혁을 뒤로한 채, 이혜선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민찬혁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범인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뭐 하긴.”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민찬혁도 이내 모든 행동을 멈췄다.

“……범인은 현장에 다시 돌아온다?”

“어.”

“지금?”

“여기 들어오기 전에 수상한 사람 못 봤어?”

이혜선이 굳이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민찬혁은 순간기억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그 능력으로 잡아낸 범인만 스무 명이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잠시만.”

그렇게 대답한 민찬혁은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떠올렸다.

붉은색 옷을 입고 양산을 든 채 구경하던 여자, 창문을 열고 무슨 일이 났나 싶어 고개를 내밀던 아저씨, 골목길을 막고 있다고 짜증을 내던 학생…….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표정한 얼굴로 마스크를 쓴 채 서 있던 남자.

“확실하진 않은데, 살인 현장을 구경하러 온 사람이라고 보기엔 너무 침착한 남자가 하나 있기는 했어. 굳이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도 수상하고.”

“접수.”

이혜선은 티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발을 떼어 움직였다.

“나는 앞으로 돌게. 네가 쫓아.”

“오케이.”

민찬혁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고는 일부러 큰 소리로 짜증을 냈다.

“야, 너 붓 안 가져왔지. 지문 어떻게 찾을 거야!”

“아, 차에 있을걸. 네가 좀 가져다주라.”

합을 맞춰 준 이혜선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민찬혁은 다시 노란 테이프 밖으로 나와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모자챙에 가려져 있었지만, 민찬혁은 놈의 서늘한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차와 남자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단숨에.’

민찬혁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차 문을 열다 말고 냅다 놈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

그러자 놈은 곧바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거기 서, 이 X끼야!!”

민찬혁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으나, 남자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빠르게 내달렸다.

그러나 스타트하는 속도가 달랐던 만큼, 민찬혁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 나갔다.

“…….”

그러다 놈이 도망가던 방향을 이혜선이 막아섰다.

좁은 골목길 앞뒤가 막혔다.

“지금 멈추면, 다리는 안 부러뜨릴게.”

이혜선이 무술로 단련된 신체로 자세를 잡으며 그렇게 말했고, 범인은 빠르게 고개를 돌려 틈을 찾았다.

까득, 범인이 이를 깨물었다.

“후우.”

그리고 심호흡을 한차례 하고는 냅다 몸을 옆으로 틀었다.

“잡았……!!”

그리고 허망하게 허공을 가르는 민찬혁의 팔.

그 잠깐의 틈을 이용해, 범인은 골목길의 담을 밟고 위로 뛰어 올랐다.

동시에, 에르제는 깨달았다.

‘……너무 높게 뛴 것 같은데.’

밑에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손유진이 작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음…….’

점점 땅이 가까워졌다.

체공 시간이 좀 길었던 것 같은데…….

‘일단은…….’

아직 촬영 중이니까.

‘착지하고 바로 뛰자.’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에르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완벽한 착지자세를 선보였다.

‘히어로 랜딩.’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에르제는 다시 앞으로 뛰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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