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196화
“이제 한 달밖에 안 남았다, 얘들아.”
이윤은 디지털 싱글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토트윈에게 열심히 격려해 주었다.
쪼는 건지 격려인지 구분은 잘 안 가지만 말이다.
“솔직히 한 달 아니잖아요오.”
태현우가 나무늘보처럼 몸을 늘어뜨리며 투덜댔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에 1곡씩, 총 3번.
10월부터 12월까지 총 3곡을 준비해야 하는 건데, 곡과 곡 사이의 간격이 그리 길지 않았기에 3곡을 준비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민주혁도 태현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뮤비도 찍어야 하고 방송도 나가야 하니까 사실상 3곡 준비하는 거지. 공개 시점만 다른 것뿐이고.”
“그렇지!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태현우가 손가락으로 민주혁을 가리키며 엄지 척을 해 주었다.
“그래도 저번 정규 앨범 준비할 때보다는 훨씬 낫잖아.”
윤치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수록곡 녹음 없어진 대신, 타이틀곡이 늘어났다고 생각하자.”
“암, 그렇지!”
이윤이 윤치우의 말에 적극 동의했다.
그렇게 멤버들과 이윤이 앨범 준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에르제는 스마트폰으로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 밑 작업을 마치는 데에 한 달 소요 예정. ]
발신자는 윤소희였다.
[ 알겠어요. 에이리스와 1장로를 묶어 둘 유예 기간이기도 하니까 일정을 당길 필요는 없어요. ]
[ 알았어. ]
금세 도착한 답장을 확인하며, 에르제는 스마트폰을 옆으로 치워 두었다.
‘시간을 벌기는 했는데…….’
서은우와 에이리스가 나눴을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1장로는 현재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끔 만들어 두었으나, 에이리스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에이리스는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워낙 즉흥적이기도 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본인이나 1장로를 제물로 바쳐서 대악마를 강림시키는 것만 아니면 되는데.’
에이리스가 최소한의 인내심을 가지고 있길 바라는 수밖에.
‘서은우…….’
대악마, 서은우, 에이리스. 이 셋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최소한 저번에 그림자에서 잘라 낸 악마와 관련이 있을 텐데.’
분명 그 악마는 ‘찾았다’라고 말했고, 그 이후에 서은우의 영혼이 자신의 몸에 들어왔다.
악마들이 어떠한 방식을 사용하는지는 알려진 게 거의 없었기에 무슨 방법을 썼는지 추측하기 어려웠으나.
적어도 서은우의 영혼과 자신이 서로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찾았다고 했던 게 두 영혼 사이의 통로 같은 걸까.’
언뜻 악마들이 인간의 몸에 들어올 때 그런 방식을 사용한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이럴 줄 알았으면, 카테이아 대륙에 있을 때 친한 악마라도 좀 만들어 둘걸 그랬나.’
그렇게 고민하던 에르제는 문득 누군가를 떠올렸다.
뱀파이어보다는 마족들과 더 친했던 종족의 과거 우두머리.
‘지서후한테 한번 물어보는 게 낫겠다.’
혹시나 이번에 영혼이 바뀐 사태에 대해 뭔가 추측할 만한 정보 같은 게 있는지 말이다.
‘정 안 되면 알아봐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고.’
지서후는 모르더라도, 다른 늑대인간은 알 수도 있으니까.
지구에 있는 뱀파이어들과 서큐버스는 아무도 이에 대해 모르는 상태였기에 현재 기대 볼 만한 곳은 그들밖에 없었다.
‘라하임과 내가 영혼이 다시 바뀌는 일이 없도록 술법을 걸어 두기는 했지만…….’
서은우가 정확히 어떠한 방법으로 이 몸을 차지한 것인지 모르니, 그 술법이 먹힐지 아닐지도 알 수 없었다.
‘만약 또 몸을 빼앗기고, 서은우와 에이리스가 만나게 되면…….’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촉박한 시간이 더욱 촉박해질 터.
‘지구에 온 이후로 상황이 더욱 복잡해지는 기분이네.’
도대체 신은 자신을, 그리고 다른 종족들을 왜 이곳으로 보낸 건지.
그리고 도대체 뭘 하고 있길래 말도 걸지 않는 건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늪에 빠진 에르제는 마른세수를 한차례 한 후 상념을 털어 냈다.
‘차근차근 하자.’
조급해하면 그저 머리만 아플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으니, 태현우가 에르제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뭐 하냐?”
“아, 그냥. 생각하고 있었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하고 있는데?”
태현우가 킥킥 웃으며, 자신의 은발을 흐트러뜨렸다.
그러자 에르제는 태현우의 머리색 때문에 살짝 거리를 두었다.
늑대인간과 친구를 맺기는 했지만, 본능적으로 은색털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고개만 자라처럼 쑥 옆으로 뺀 에르제는.
“세계의 평화.”
그렇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며칠 뒤, 앨범 준비로 안무와 보컬 연습을 마친 후.
에르제는 퇴원 이후 처음으로 드라마 촬영장을 찾았다.
에르제가 언제 퇴원할지 몰라 드라마 촬영 순서가 뒤바뀌었고, 그렇기에 퇴원한 주에는 에르제의 촬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서 다음 주, 그러니까 바로 오늘.
에르제는 정말 오랜만에 드라마 세트장을 찾아 반가운 해후를 나누었다.
“은우! 몸은! 괜찮고?!”
감독은 병문안까지 오겠다던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아주 격하게 반겨 주었고.
“내가 은우 씨 때문에 드라마 스토리도 조금 바꾸었어요.”
드라마 작가도 뼈 있는 말을 뱉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장기 입원이 아니라서 그런지, 어떻게 스토리를 잘도 끼워 맞춘 모양이었다.
“아니, 은우야. 들어 봐라. 내가 작가님 말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에이, 말만 그렇게 한 거지. 말만.”
“무슨 말만이에요, 작가님. 시나리오 수정해서 들고 와 놓고서는?”
“큼.”
작가는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감독에게 눈을 흘기고 자리를 떠났다.
뭐 이후 감독의 말씀에 따르면, 에르제의 분량은 찍어 두었던 것까지만 나가고.
범인을 바꾸는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고쳐 써 와서 말리느라 고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에르제는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당연히 작가는 드라마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출연자를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을 테니까.
‘오히려 일하게 만든 것 같아서 내가 더 미안하지.’
에르제는 전혀 속상하지 않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잘못한 건데요, 뭐.”
“하지만 나는 이렇게 돌아올 줄 알았지.”
감독은 껄껄 웃으며 에르제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 쓸개즙은 진짜 쓰던가? 그래서 쓸개즙인가?”
그런 이상한 농담을 던지더니, 이내 본인의 일을 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기다려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한 에르제는 촬영장 그늘을 찾아 들어갔다.
윤소희가 준 선크림의 성능은 좋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햇볕이 직접 몸에 닿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늘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에.
“아씨.”
문휘영과 같은 그늘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안 보여서 좋았는데.”
쟤는 악마도 없애 줬는데, 왜 변하지를 않을까.
기본적으로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너는 그게 이제 겨우 회복해서 돌아온 사람한테 할 말이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에르제를 발견하고 다가오던 강석구가 한마디 톡 쏘아붙였다.
“아, 뭐요~.”
문휘영은 짜증스럽게 대답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하여간 저놈 저거. 어휴.”
강석구는 문휘영과 에르제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씩 웃었다.
“네가 이해해라. 날씨가 더워서 그래, 더워서.”
“괜찮아요.”
그냥 왜 저러나 싶을 뿐, 딱히 불쾌한 것은 아니었기에 에르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완전 괜찮아진 거고?”
“네. 멀쩡해요.”
“좀 걱정이 되기는 한다, 야. 오늘 너 좀 격하게 움직이는 장면 많을 텐데.”
“아아.”
에르제는 그 말에 대본 내용을 떠올렸다.
오늘은 또 다른 범행을 하는 장면과 도망가는 장면, 그리고 강석구와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이어진다.
게다가 그동안 대역으로도 해결이 안 되었던 장면들도 찍어야 해서 촬영해야 할 분량도 많았고 말이다.
“못 할 거 같으면, 그냥 나한테 넘기든가.”
옆에서 문휘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진짜 큰 병을 앓다 온 것도 아니고, 생명력만 있으면 전과 다름없는 상태였기에.
“문제없다고 이미 감독님께 말씀드렸어요.”
에르제는 그렇게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래? 그럼 이따가 안 다치게 잘 부탁한다.”
강석구는 에르제의 팔을 툭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 왜요! 더운데!!”
“네가 시비를 걸잖냐, 계속. 이리 와. 나랑 놀아.”
“아, 진짜!”
그러고는 문휘영을 잡아끌고 갔다.
강석구에게 그동안 촬영이 어땠는지 묻고 싶기는 했으나,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어차피 오늘 촬영장에 오기로 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사람은 아니지만.’
에르제는 멀리 세워져 있는 차들을 뛰어난 동체 시력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타고 다니던 익숙한 차는 보이지 않았다.
‘촬영 끝날 때쯤 오려나.’
그렇게 촬영 전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곁에 서 있던 라하임이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 저거.”
“응?”
“커피 트럭 아닙니까?”
“커피 트럭?”
에르제가 최대한 그늘에서 나오지 않은 채 고개만 쭉 빼서 촬영장으로 들어오는 차를 발견했다.
트럭이었는데, 겉에 꾸며진 것을 보니 누가 봐도 커피 트럭이었다.
“누가 보냈나 보네.”
종종 보았던 장면이라 에르제는 이내 흥미를 잃었다.
“밥차였으면 좋았을 텐데.”
“식사하고 오시지 않았습니까?”
“성장기잖아.”
“예?”
라하임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되물었으나, 에르제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20대 초반, 인간 기준으로 한창 성장기야.”
“그…… 예, 알겠습니다.”
라하임은 큼, 헛기침을 하고는 커피 트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그럴까. 그 ‘어서 오세요. 환상의 초콜릿 나라에’ 그거 있으면 그거로 부탁해.”
“여기서 춤추기는 좀…….”
“아, 내 생명력…….”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라하임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가 이내 후다닥 커피 트럭 쪽으로 달려갔다.
저번에 있었던 일 이후로 참 빠릿빠릿해졌다.
피식 웃은 에르제가 스마트폰을 만지며 기다리고 있으니, 곧 라하임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왔다.
“메뉴가 별로 없어서 제일 단것으로 가져왔습니다.”
라하임은 에르제에게 커피를 내밀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했다.
에르제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커피를 받아 들었다.
빨대가 천천히 에르제의 입술과 가까워지고, 라하임은 긴장한 기색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라하임이 원했던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아, 이거 말고 그냥 아메리카노 먹을래.”
“예?”
“너, 아메리카노지?”
“……예, 예.”
얼떨결에 커피를 바꿔치기 당한 라하임은 울상을 지으며 ‘시럽 10스푼’이 들어간 커피를 옆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아메리카노를 마치 물 마시듯 마시고 있는 에르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커피 트럭이 로드 앞으로 온 거더군요.”
“내 앞으로 왔다니?”
“지서후 씨가 로드 앞으로 보낸 커피 트럭입니다.”
“지서후가?”
에르제는 어느새 비어 버린 아메리카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온다고 하더니, 무슨 커피 트럭까지 보냈대.’
친구 좋다는 게 이런 건가.
사실 다른 사람들 앞으로 이런 것이 올 때마다 은근 부러워하지 않았던가.
괜히 흐뭇해져서 코쓱한 에르제는 커피 트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기.”
뒤를 따라오던 라하임이 손가락으로 등신대 하나를 가리켰다.
연미복을 입고 최대한 매혹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자신의 등신대였다.
‘미친.’
그런데 그 사이즈는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절로 의문이 들 정도로 아주 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