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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95화 (195/307)

제195화

195화

연습실에서 강제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에르제는 민주혁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들을 수 있었다.

생일 선물이랍시고 안병인 회장을 만나게 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시키려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한 번에 관계가 회복될 리는 만무했다.

민주혁이 뱀파리스에 대해 알고 있으면 모를까.

뱀파리스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또 그에 대해 말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민주혁이 안병인이 했던 행동을 어떻게 쉽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민주혁은 그럴듯하게 꾸민 변명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래서 용서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래서 내가 시간을 두고 지켜보고 있었던 건데…….’

아무리 불가피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민주혁의 입장에서는 긴 세월이었다.

아버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그 긴 시간을 고작 1, 2년 만에 해결하려고 들다니.

혹시 몰라 의식을 잃기 직전에 중요한 기억들은 술법을 이용해서 막아 두었는데…… 이런 일을 벌이고 사라지다니.

이렇게까지 미성숙한 인간인 줄은 정말 몰랐다.

‘……그렇다고 자기가 해결하고 간 것도 아니고.’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다고 하더니.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앞으로 나한테 더 이상 관심 가지지 마.”

그동안 쌓아 왔던 우정 게이지가 다 깎인 것인지, 민주혁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냥 같은 멤버. 그러니까 회사에서 같은 부서, 같은 일 하는 동기. 그냥 딱 그 정도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다.”

“…….”

에르제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변명이야 수십, 수백 가지도 할 수 있었지만 어차피 소용없을 테니까.

“네 건강이나 잘 챙겨. 내 가족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민주혁은 그 말을 남기고, 결국에는 자리를 옮겨 앉았다.

“후우.”

에르제는 멀어지는 민주혁을 잡지 못한 채,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나마 좋은 의도로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아직도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민주혁과 얼마나 더 같은 멤버로서 토트윈 생활을 할지 모르지 않나.

이렇게 지내는 것은 정말로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상담이라도 받아 봐야 하나.’

그나마 상담할 만한 대상이면 라하임밖에 없는데, 인간과의 일에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

고개를 저은 에르제는, 무릎을 모아 앉았다.

‘……아니면 상담사 선생님?’

저번에 몇 번 상담을 한 이후 바빠져서 찾아가지 못했는데, 장 대표한테 부탁하면 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해결책을 떠올리던 에르제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떤 것도 시원스런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이 모든 것을 해결하려면.

뱀파이어와 뱀파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그때 있었던 일은 자신이 한 게 아니라고 밝혀야 할 테니까.

‘거짓으로 덮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

민주혁의 입장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일투성이일 테니까.

‘……일단은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부터 물어보겠지.’

하지만 그것을 아직까지 물어보지 않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입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몸이 안 좋아서 병원 신세까지 진 자신에게 더 이상 따지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이대로 묻어 두기로 한 거겠지.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서 청화에 기업 후원을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 모양이고.’

안병인은 안병인대로, 민주혁은 민주혁대로.

그 둘은 뱀파리스 때문에, 평범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 기회를 잃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회복되지 못할 만큼 망가진 상태로 살지 모른다.

에르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에이리스와 1장로, 둘을 없애고 나면.’

친구를, 인간들을 좀먹는 뱀파리스도 같이 이 세상에서 지울 것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앞으로는 그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에르제는 새로이 마음을 다잡았다.

* * *

1장로는 영접실로 향하는 횃불을 지나 에이리스가 앉아 있는 곳까지 걸음을 옮겼다.

횃불로만 밝히고 있는 커다란 공동은 그 빛이 닿지 않는 곳은 어두컴컴했다.

밤의 일족이기에 밤눈이 밝긴 했지만, 에이리스가 앉아 있는 쪽의 높이도 높았기에 더욱 컴컴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에이리스는 자신을 불러 놓고 그 어둠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로 불렀어?”

1장로는 도착하자마자, 횃불이 걸려 있는 벽에 가만히 기대었다.

“…….”

에이리스가 침묵하자, 1장로는 되물었다.

“무슨 일로…….”

“너.”

언뜻 듣기에는 차분해 보였으나, 에이리스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대마녀 만났다면서?”

“아아, 그거.”

1장로는 휘유, 하고 휘파람을 불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쪽에서 불러서 한 번 갔다 왔지. 인간 주제에 아우라가 장난 아니기는 하더라. 괜히 대마녀가 아니야~.”

“……그곳에 갔다 온 게 언젠데, 왜 아직도 나한테 말하지 않았지?”

“흠.”

1장로는 에이리스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불쾌한 기색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내가 언제부터 너한테 내 행적을 일일이 보고하는 사람이었지? 네가 로드로서 뱀파리스들을 다스리는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나는 심지어 뱀파리스도 아니야. 뱀파이어지만, 그냥 너 때문에 따라온 소꿉친구 아니었나?”

1장로는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찼다.

“그런데, 내가 왜 너한테 일일이 보고를 해야 하는 건데?”

그의 말에 그제야 에이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체를 숙이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하얀 옷이 어둠을 뚫고 시린 빛을 냈다.

“그래서, 나한테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이야기할 생각은 없고?”

“아니, 말하려고 하기는 했어.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야.”

1장로는 양손을 들어 올려 항복 표시를 했다.

통하지도 않을 변명이었지만, 에이리스는 이에 대해 별말은 하지 않았다.

‘본 사람이 없었을 텐데, 누가 에이리스한테 말한 거지?’

속내를 감춘 1장로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내 그 상태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진짜야~. 표정 풀어.”

“……알았어. 그래서 대마녀가 널 왜 보자고 한 건데?”

1장로는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 냈다.

‘대마녀가 먼저 보자고 한 것까지 알고 있나.’

그렇게 생각한 1장로는 천천히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까지는 모르는 것 같으니까.’

적당한 떡밥만 던지면 되겠지.

1장로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일단, 대마녀는 에르제에게 도움을 준 걸 후회하고 있어.”

“후회하고 있다고?”

“어.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물자와 장비들을 받아 가더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불만이 많더라.”

1장로는 에이리스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녀들 생각이야 뻔하지. 우리와 에르제, 둘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도록 유도해서 그 중간에 이득을 취하겠다는 거.”

“……국가끼리 전쟁하는 것과 비슷한 취급을 해 주네. 고마워라.”

“뭐 무력으로 붙으면 그 정도 화력은 나올걸?”

킥킥 웃은 1장로는 손가락을 허공에 빙글빙글 돌렸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고 자꾸 뒤로 일을 해결하려는 것처럼 보이니 자기들이 불을 붙여 보겠다는 심산인 것 같더라고.”

“……전쟁을 우리보고 먼저 일으키래?”

“어. 바로 그거야.”

1장로가 빙글빙글 돌리던 손가락을 딱 멈추며 에이리스를 가리켰다.

“네가 직접 나서기를 원하던데. 그래야 에르제도 움직일 거라고.”

“……하아.”

에이리스는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다시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녀의 하얗던 옷이 어둠에 묻혀 사라졌다.

“카테이아 대륙의 마녀들과 비교하면 너무 머리를 굴리네.”

“그렇긴 하지.”

1장로는 팔짱을 낀 채 물었다.

“그래서 마녀들이 원하는 대로 네가 전쟁의 선봉이라도 설 거야?”

“아니.”

곧바로 나온 대답에 1장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하고 왔어. 에이리스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대악마나 혈석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겠지.”

“내가 그렇게 생각이 없어 보여?”

“……배신하지 마. 나한테는 너밖에 없으니까.”

“그래.”

1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처음 뱀파리스로 변했을 때 계약을 맺었잖아. 떠나지 않겠다고.”

“이제 가도 돼. 그거 물어보려고 했던 거야.”

“그럼, 수고~.”

1장로는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이내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영접실 밖으로 나왔다.

집사 뱀파리스가 문밖으로 나오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누굴 호구로 아나.’

밖으로 나와 데캄이 쓰던 방으로 돌아온 1장로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에르제의 몸에 들어왔던 그 대악마랑 하는 이야기는 들었다고 이미.”

에이리스가 자신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듯, 자신도 에이리스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었다.

조금 전 문을 열고 닫던 집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수족이 된 뱀파리스로 교체한 뒤였으니까.

‘에이리스는 날 대악마 강림의 제물로 바치려고 하고 있어.’

1장로는 에이리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손안에서 잔을 빙그르르 돌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대마녀와 했던 이야기를 숨겼다.

아니, 숨겼다기보다는 그냥 오늘 에이리스에게 했던 말은 모조리 거짓이었다.

에이리스가 전쟁을 먼저 일으키길 바란다는 그 얘기 말이다.

‘네가 먼저 시작한 일이다. 에이리스.’

1장로는 씁쓸한 표정으로 잔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그래도 죽이지는 않으마.’

뱀파이어 일족을 떠나는 날, 그렇게 맹세를 했고 계약을 맺었으니까.

로드의 힘, 혈석을 이용해 에이리스에게서 그 힘을 빼앗기만 하면 될 터.

대악마에게 묶여 있는 것은 에이리스 혼자니, 그 이후부터는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아니, 애초에 강림할 수 없도록 막아야지.’

앞으로 자신의 발아래 둘 세계가 망가지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근데, 썩 유쾌하지는 않네.”

오랜 친구의 등에 칼을 꽂아 넣는 일이라서 그런 건가.

그렇게 중얼거린 1장로는 스마트폰으로 대마녀가 주고 간 연락처를 꺼냈다.

오늘 에이리스와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은 정리했고.

이제 대마녀가 자신에게 건넸던 제안의 답을 해야 할 차례.

[ 제이의 몸에서 혈석을 제거하는 일, 제가 도움을 준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

그리고 대마녀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이 왔다.

[ 한 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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