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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94화 (194/307)
  • 제194화

    194화

    편의대로 부르기 위해 ‘도플갱어 술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1장로 본인의 몸을 다른 몸으로 복제하는 능력이었다.

    일정량 이상의 피를 흡수만 할 수 있다면 누구든 모습뿐만 아니라 기억까지도 복제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라하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약 도플갱어였다면, 기억까지 모두 복제하는 능력은 단순히 머릿속을 확인하는 것으로는 확인되지 않았을 테니까.

    “2장로가 죽었을 때, 그녀를 죽인 이들이 아무도 없었기에 1장로의 능력을 의심하기는 했었는데…….”

    “그게 김지원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에르제는 이불을 말아 쥐었다.

    “애초에 지서후는 착각하지 않았던 거야. 김지원이 죽었다는 걸 제대로 본 거지.”

    “그런데 1장로는 김지원의 사체를 왜 그대로 두고 갔을까요? 본인이 의심받을 수도 있는데.”

    라하임이 고개를 갸웃하자, 에르제가 허탈하게 웃었다.

    “우리도 2장로가 죽고 나서…… 그러고도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이제 깨달았잖아. 김지원이 사실은 죽지 않았다고 믿었으니까.”

    “……아.”

    “후우, 그래서 1장로가 판에 끼어들면 정말 곤란한데.”

    에르제는 마른세수를 했다.

    말 그대로였다.

    1장로의 술법은 그 자체로 정말 귀찮은 술법이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라하임이 1장로라고 하더라도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니까.

    주변의 사람들을 믿기 어려워졌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스트레스다.

    물론 1장로가 피를 흡수했을 이들을 추려내면 어느 정도 범위를 좁히는 거야 가능하지만, 실상은 그것 자체도 쉽지 않았다.

    ‘어쩌면 에이리스가 노리고 있는 게 이것일지도 모르겠어.’

    이쪽의 분열을 유도함과 동시에, 제이의 몸 안에 혈석을 키우는 것.

    ‘결국 2장로의 힘은 1장로에게 넘어갔을 테고.’

    그걸 제이에게 먹였을까, 아니면.

    ‘본래의 계획을 바꿔서 제이의 힘을 1장로가 흡수해 스스로 제물이 될까.’

    아니.

    에이리스와 1장로는 어렸을 때부터 알던 소꿉친구인데다 특별한 계약 관계로 묶여 있는 사이다.

    그래서 뱀파이어인 1장로가 뱀파리스 로드의 곁에 머물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에이리스도 1장로를 함부로 제물로 바치지는 못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최종적으로는 제이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결론이 나온다.

    ‘1장로와 대마녀를 만나게 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을 텐데.’

    제이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주었다면 말이다.

    ‘아, 머리 아파.’

    모든 계획과 생각들이 얽히고설켜서 이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매듭처럼 되어 버렸다.

    에르제는 눈을 꾹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어.’

    여기까지 왔으니 자신의 생각대로 계속 밀고 나가는 수밖에.

    ‘1장로를 누가 제대로 이용하느냐, 그게 핵심인가.’

    에이리스는 1장로를 단순히 이쪽에 혼선을 주는 용도로만 사용하지는 않을 거다.

    ‘일단 확인이 우선인가.’

    에르제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스마트폰을 꺼내 제이에게 연락을 취했다.

    [ 혹시 언제라도 좋으니 피를 제공하거나 빼앗긴 적이 있었나요? 에이리스든, 혹은 정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든……. 그냥 누구든지요. ]

    지금은 한가했는지 답장이 곧바로 왔다.

    [ 없는데, 왜 물어보는 겁니까? ]

    [ 없다니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그런 일 없도록 주의해 주세요. 잘 때도요. ]

    [ 잘 때 예민한 편이라.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겁니까. ]

    [ 조심하세요. ]

    [ 왜 물어보는……. ]

    에르제는 제이의 답장을 대충 훑어보고는,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다행히 제이는 당하지 않았구나.’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집요하게 왜 물어보는 거냐고 하는 걸 보니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았다.

    ‘……제이의 몸에 계속해서 자라고 있는 혈석……. 그것만 어떻게 처리하면 되는데.’

    에르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내 피를 윤소희 편에 보냈으니까 두 혈석 간의 반응은 없는지 그 결과물을 기다리는 수밖에.’

    지금의 상황에서 제일 좋은 해결책은 혈석 그 자체를 없애 버리는 거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모든 일이 해결되고 나면.

    에르제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병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카테이아 대륙 때부터 미루고 미뤄 왔던 일.

    그리고 지금까지도 자신의 업보로 남아 있는 일.

    ‘그때가 되면, 에이리스를…….’

    피를 나눈 여동생이었기에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정신을 차릴 거라고 믿었지만.

    그녀는 새로 그은 선을 너무도 많이 넘어 버렸다.

    ‘……이제는 내 손으로 끝내야겠지.’

    이 세계까지 망가뜨리게 둘 수는 없었다.

    이미 소중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생겼기에.

    에르제는 라하임을 바라보았다.

    “김지원, 당장 내 앞에 데려와.”

    “예.”

    “아, 저도!”

    명령을 받은 라하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움직였고, 세리나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에르제는 플랑과 둘이 남은 병실에서 보글보글 앱을 실행했다.

    * * *

    에르제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 후 퇴원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틀 동안 몇 번의 검사를 더 받은 이후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병원 측에서도 에르제를 더 이상 붙잡을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경우에는 몸이 안 좋은 환자가 급격히 회복되니 그게 이상해서 더 오래 입원시켜 지켜보고 있었던 것뿐.

    “이곳도 늘 환자가 많구나.”

    어떤 세계든 어째서 고치는 사람보다 아픈 사람이 더 많은 건지.

    에르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자리하고 있던 라하임은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곤, 이내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 일단 예상이 맞았네.”

    에르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전.

    김지원을 잡아 오라고 라하임을 보냈을 때, 녀석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라하임이 올 것이라고 예측한 것은 아닌 듯하고, 2장로를 죽였던 시점 이후에 틈을 봐서 도망친 모양이었다.

    “로드께서 입원한 시점부터 훈련에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미 다른 몸으로 변했겠지. 지금은 1장로를 찾기 좀 어렵겠어.”

    고개를 끄덕이던 에르제는 문득 라하임이 말한 입원한 시점에 대해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서은우의 영혼에서 다시 자신의 영혼이 돌아왔을 때 말이다.

    달싹이던 에르제의 입술이 결국 열렸다.

    “너희가 서은우였던 나를 붙잡은 게 뱀파리스 본거지 근처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아마 서은우와 에이리스가 만난 것은 아니었을지.”

    “그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맞을 거야.”

    에르제는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일정한 리듬으로 두들겼다.

    서은우가 이 몸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는, 단 2개의 정보 중 하나.

    그게 제일 골머리를 썩였다.

    ‘서은우가 도대체 에이리스를 왜 찾아갔을까.’

    그날 이후로 내내 생각해 봤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애초에 평범한 인간이었던, 그리고 뱀파이어가 되기 위해 의식까지 올렸던 서은우가.

    에이리스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 사실부터 딱 막혔으니 말이다.

    ‘가장 그럴듯한 건 내 몸에 들어가지 못한 서은우가 다른 몸에 들어가게 됐고, 그때 에이리스를 만났다는 건데.’

    하지만 그때는 이미 미친 황제에 의해 인간을 제외한 종족들이 죄다 죽어 나가던 때가 아니었던가.

    ‘하아, 이러다가 서은우가 미친 황제라는 미친 생각까지 하게 될 것 같네.’

    머리를 헝클어뜨린 에르제는 이내 이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추측할 근거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정보가 아예 없으니 무엇을 생각해도 죄다 망상 같았다.

    ‘……그냥 이쪽은 생각하기를 포기하자.’

    맞을 리가 없는 추측을 늘어놓느니, 차라리 그게 더 나을 듯했다.

    “후.”

    한숨을 내쉰 에르제는 가만히 차의 진동에 몸을 맡겼다.

    그냥 이 모든 복잡한 일들이 끝나고 나면.

    다시 아이돌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 희망은 라하임의 차에 타고 있었던 잠깐뿐이었다.

    이미 에르제의 일상은 예전과 다르게 변해 있었다.

    숙소에 돌아오고, 그 뒤로 연습을 하거나 무언가를 할 때마다 멤버들은 그를 쉬게 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쉬어! 그만 연습해!”

    “무리하지 마여. 휴식! 안 되겠다. 우리도 같이 쉬어여!”

    올해 하반기에는 정규 앨범이 아닌, 디지털 싱글을 준비하기로 했는데.

    총 3곡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멤버들은 그가 열심히 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막았다.

    “아니, 진짜로 괜찮다니까.”

    정말 괜찮다는 말에 태현우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해충이 해치겠다고 말하고 해치는 거 봤어?”

    “뭔 소리야?”

    “아픈 것도 마찬가지야. 이제 아플게! 하고 아픈 사람 없다고. 너는 이미 한 번 무리하다가 그렇게 됐는데, 우리가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겠느냐고.”

    “아니……. 그러니까 무리한 거랑 관련이 없다니까.”

    “네가 의사냐?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는데.”

    태현우는 팔짱까지 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돌아가.”

    “…….”

    결국 에르제는 커다란 거울 근처에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았다.

    ‘걱정해 주는 건 참 고마운데…….’

    숙소에 있을 때도 이렇게 대하니, 병실에 있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윤치우마저 그러고 있었다.

    ‘뱀파이어도 무리를 하면 쓰러진다’는 이상한 상식이 생긴 듯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 정도 연습한 걸로 쓰러지진 않는다고. 콘서트 다음 날, 멀쩡했던 거 기억나지 않는 거니.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에르제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푸우, 하고 숨을 뱉어 내자 뜨거운 입김이 무릎과 입 주변에 퍼졌다.

    그러나 사실 에르제의 일상을 깨뜨리고 있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뭐만 했다 하면 멤버들이 뜯어말리는 것 정도야 그냥 이해하면 되는 영역이었으니까.

    게다가 연습은 따로 몰래 할 수도 있고, 사실 연습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실력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저 녀석이 문제지.’

    에르제는 병실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꼭 필요한 사항이 아니면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민주혁.’

    도대체 무엇 때문인 건지, 계속해서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이틀 정도야 기분 탓인가 싶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러는 걸 보니 단순한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분명 나랑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다.

    ‘서은우.’

    녀석이 이 몸에 들어와서 민주혁에게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지금까지는 하얀과의 무대를 몇 번이나 무사히 완료했다는 것과 에이리스를 만난 것.

    두 개밖에 정보가 없었는데, 이쯤 되니 민주혁과도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그렇다고 계속 이대로 지낼 수도 없고.’

    만약 서은우가 뭔가 잘못했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이라도 사과를 해서 그와 관계를 회복하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끙차.”

    자리에서 일어난 에르제는 슬그머니 민주혁의 옆에 앉았다.

    역시나, 티 나지 않게 슬쩍 떨어지려는 낌새가 보였다.

    에르제는 곧바로 그의 팔을 붙잡고 작게 이야기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너, 왜 나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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