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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92화 (192/307)
  • 제192화

    192화

    누누이 말했지만, 완전 기억 술법이라는 것은 그 이름과 다르게 완벽하지 않다.

    본인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완전하게 기억하는 것이니까.

    예를 들어, 1500년 전에 라하임이 고백했다가 차인 그런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 등이 그랬다.

    그러니까 아직 술법이 손에 남아 있다는 것을 잊었던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거지.”

    이제 완전히 생명력을 회복한 에르제가 음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로드.”

    라하임이 퀭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일부러 그러셨다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그만하시지요.”

    “후우, 그래. 일부러 그랬다고 치자. 그게 네 맘이 편하다면, 내 언제든지 그렇게 말해 줄 수 있지.”

    “지금 그 말만 10번 넘게 반복하고 계십니다.”

    “아니,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얘기하는 거지.”

    “……예.”

    그렇게 무한 도돌이표의 늪에 빠져 있던 때에.

    병실 문이 열리며 이윤과 멤버들이 들어왔다.

    한 사람이 안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에르제의 의아한 시선을 받은 윤치우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주혁이는 가족 약속이 있어서 못 왔어.”

    ‘가족 약속?’

    어머니와 식사라도 하기로 한 건가.

    대충 납득한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이 다가와서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라하임이 자리를 비켜 주자, 곧 이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몸이 안 좋다고 말해 두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활동은 당분간 조금 쉬자. 건강이 우선이지.”

    에르제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실제로 아프기는 했다. 생명력을 죄다 빼앗겨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생명력을 다시 돌려받았고, 더불어 서은우는 자신의 몸에서 다시 빠져나간 상태.

    “저 괜찮아요, 이제.”

    그러니까 굳이 병원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는 말에, 태현우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하지 마.”

    “그래. 저번에 겨우 정신 차렸다가 또 기절했었잖아. 지금은 그냥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윤치우가 태현우의 말을 거들었다.

    “아니, 정말 멀쩡한데…….”

    “멀쩡하기는. 이렇게 창백한데.”

    아니, 그건 뱀파이어여서 그래.

    잠깐 입을 꾹 닫은 에르제는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

    누워 있던 자세에서 상체를 일으키자, 윤치우가 황급히 다시 눌렀다.

    “일어나지 마.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그래. 꼼짝 마.”

    “……되게.”

    자꾸 꼼짝 말라고 하니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말끝을 흐린 에르제는 이내 수긍하고 누운 상태로 입을 열었다.

    “의사 선생님한테 확인 받으면 되는 거 아니야? 퇴원해도 되는지.”

    “…….”

    “퇴원해도 된다고 하셔도 안 되여!”

    “그래. 이참에 그냥 푹 쉬다 퇴원해.”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미 자신을 강제로 휴식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네가 괜찮은 줄 알았어. 그냥 우리보다 체력이 조금 더 뛰어난 줄 알았거든. 근데 이렇게 우리는 멀쩡하고, 너만 아픈 거 보면…… 꾹 참고 있었던 거겠지.”

    충격적이게도 그동안 열심히 한 게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움직일 수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연습하고, 무대 끝나고 나서도 괜찮은 척하고…….”

    “아니, 그건 진짜로 괜찮아서…….”

    “이제 그런 거짓말은 하지 마.”

    태현우가 드물게 진중한 눈빛을 띠며 대답했다.

    “괜찮다고 해 놓고 이게 뭐냐고. 너는…… 너는, 친구가 눈앞에서 그렇게 기절하는 모습을 보고도…….”

    입술을 꾹 깨문 태현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에…… 네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았을 때, 그때 미리 조치를 취했어야 했던 건데…….”

    “흡…….”

    그리고 이에 공감한 안단테의 눈시울이 또 붉어졌다.

    ‘……병문안 올 때마다 울려고 하는 거니.’

    속으로 한숨을 내쉰 에르제는 어쩔 수 없이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드라마는 어떻게 할 건데? 그건 내가 쉬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피해 보는 거잖아.”

    “아, 그거.”

    그리고 비장의 무기는 이윤에 의해 아주 쉽게 파훼 당했다.

    “감독님께 이미 말씀드렸고, 감독님도 걱정하지 말고 푹 쉬다 오라고 하셨어.”

    이윤이 에르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네가 그동안 보여 준 연기가 마음에 드셨는지 오히려 네 걱정만 하시더라. 정말 괜찮은 거 맞느냐고, 시간 나면 병문안까지 오시겠다고 하시길래 내가 극구 말렸어.”

    지구에서는 열심히 잘하면 죄가 되는 건가.

    왜 하나같이 결론이 그렇게 나는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일단 범인으로 나오는 부분은 어차피 얼굴이랑 그런 거 나오지 않으니까 대역 쓰신다고 하셨고. 네가 나와야 하는 장면은 스토리상 여유 있게 찍어도 된다고 했으니까 너도 일 걱정 그만하고 당분간은 푹 쉬자.”

    드라마 촬영에 관한 부분도 아주 깔끔하게 해결되어 있었다.

    “아, 그리고 알바 몬스터는 네 자리에 당분간 게스트 불러서 촬영한다고 했으니까 그것도 걱정하지 말고. 이미 네가 몸이 안 좋다는 거 사람들도 알고 있으니까 다들 이해해 주실 거야.”

    왜……. 왜 다들 일 처리가 이렇게 훌륭한 건데.

    에르제는 멍하니 병실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갑갑한 곳에서 얼마나 더 갇혀 있기를 바라는 걸까.

    이제는 정말 아픈 곳 하나도 없는데.

    병원비를 대 주고 있을 장 대표는 돈이 아깝지 않은 걸까?

    스윽.

    그런 생각을 하던 에르제의 시선이 라하임에게로 멈추었다.

    그리고 병실 구석에 서 있던 라하임은 창 밖을 보는 척하면서 에르제의 시선을 피했다.

    * * *

    중간에 상태를 확인하러 온 의사는 이제 멀쩡하니 퇴원하겠다는 에르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기는 했네요. 하지만…….”

    의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렇게 말했다.

    “의사인 제 의사도 묻지 않고 멋대로 퇴원하겠다고 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시에이팅이라는 완벽한 한국식 문장을 구사하였음에도,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지만, 이는 반대로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질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입원한 상태로 경과를 좀 지켜보는 게 좋겠군요.”

    의사는 흐트러진 가운을 정리하며 말을 끝맺었다.

    “저는 퇴원시킨 환자가 다시 환자가 되어서 돌아오는 걸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싱긋 웃으며 의사는 간호사들과 함께 병실을 나갔다.

    곁에 서서 의사의 말을 듣던 이들이 거봐 하는 표정으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아.’

    결국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에르제는 시무룩한 얼굴로 드러누웠다.

    ‘할 일 많은데…….’

    돈도 벌어야 하는데.

    무엇보다 병실 안에서 아무 할 일 없이 누워 있는 게 제일 갑갑하다.

    차라리 관 속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곳 지구의 인간들에게 그런 말을 했다가는 기겁할 게 뻔하겠지.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으니, 이윤이 이윤답지 않게 살갑게 말했다.

    “조금만 참아. 푹 쉬고. 너 무튜브 보는 거 좋아하니까 그거 보면 될 거야.”

    “…….”

    대답 없는 에르제를 보며 이윤이 쓴웃음을 지었고, 이내 태현우가 아이디어를 냈다.

    “아, 윤이 형. 우리 이번에 보글보글 한다고 했잖아요.”

    “아.”

    이윤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은우는 여기서 할 일이 없기도 하고 팬들도 걱정 많이 할 테니까 보글보글 하게 두면 좋을 것 같은데.”

    “음…….”

    이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중2병은 이제 이달그마 말고는 거의 없고, 요즘에는 예능 같은 데서도 은우가 말실수를 하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보글보글?’

    그렇게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에르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 보니,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앱이라고 하는데.

    이번에 모카 엔터테인먼트에서 토트윈을 새로 추가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면 팬들이 구독해서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네가 보낸 메시지에 팬들은 3개밖에 답장을 못 하니까 병실에 있는 김에 자주자주 메시지 보내 줘.”

    “…….”

    코코아톡 같은 걸까?

    일단 뭔지 모르겠으니 한 번 해 봐야 알 것 같았다.

    ‘팬들이랑 코코아톡 하면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한데.’

    “알겠어요.”

    에르제의 대답에 이윤이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오케이. 대표님께 말씀드려서 최대한 빨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해 볼 테니까. 아마 조만간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뭔가 새로운 것을 던져 준 그들은 병실에 조금 더 머물다가 이내 자리를 떴다.

    라하임과 플랑이 번갈아 가면서 보호자 역할을 하겠다고 했기에 그들이 계속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병원에서 나올 생각은 하지 마여!”

    “절대! 절대! 무리하지 말고!”

    “……응.”

    조금 전까지는 며칠만 버티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들의 격한 작별 인사를 보니…….

    아무래도 생각보다 병원에 더 오래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 * *

    이틀 뒤.

    에르제는 여전히 퇴원하지 못했다.

    그사이에도 멤버들은 하루에 한 번 이상씩은 찾아와서 병실에 자신을 가둬 두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번번이 퇴원 이야기가 묵살되었으므로, 에르제는 반쯤 포기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원흉인 라하임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예쁘게 깎은 사과를 내밀었다.

    “로드, 이것 좀 드시면서 무튜브 보십시오.”

    “고마워.”

    자연스럽게 사과를 받아 든 에르제는 한 입에 쏙 넣어 먹었다.

    “…….”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죽이고 있었을까?

    이윤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번에 말한 보글보글을 이제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앱은 미리 깔아 두었기에 에르제는 켜서 이를 확인했다.

    ‘팬들이 우리 그룹이나 나를 구독하면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했던가.’

    벌써 구독한 팬들이 있으려나?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멤버들의 말대로, 자신의 입원을 걱정하는 팬들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은 몇 명 없더라도, 내가 메시지 보내면 커뮤니티에 금방 퍼지겠지.’

    데뷔 2년 차, 자신의 아이돌 짬바에 감탄하며.

    에르제는 보글보글 첫 메시지를 작성했다.

    [ 여러분 그거 아시나요? 쓸개즙은 초록색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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