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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91화 (191/307)
  • 제191화

    191화

    ‘아.’

    에르제는 눈을 번쩍 떴다.

    “……으.”

    이거 생명력이 떨어진 게 아니라, 습관성 기절증후군이 아닌가 싶다.

    온몸에 근육이 뭉친 것 같아서, 에르제는 주먹으로 어깨와 목 부분을 통통 두들겼다.

    ‘두들겼다?’

    아파서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니, 자신의 왼손이 오른쪽 어깨 부분을 두들기고 있었다.

    ‘어떻게 두들기고 있는 거지?’

    순간 소름 끼치는 감각과 함께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무언가에게 몸을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분명 왼팔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생명력이 조금은 돌아왔구나!

    이제 이 정도 움직이는 것은 가능하다는 뜻이다.

    “아아, 큼, 큼. 가아아아…….’

    목소리는 아직인가 보다.

    가나다라마바사를 말하려고 했는데, ‘가’ 뒤로는 죄다 ‘아’로 나오는 걸 보니.

    ‘아직 라하임에게 설명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겠군.’

    에르제는 삐걱거리는 몸을 겨우 이끌고, 병원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제 알았는데, 완벽한 1인실이었다.

    예전에는 데뷔조였지만, 이제는 1군 아이돌의 반열에 오르고 있는 토트윈 멤버여서일까.

    실없는 생각을 잠깐 떠올리던 에르제는 이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걷는 모양이 좀 기괴하긴 했지만, 느릿느릿하게 움직일 수는 있었다.

    ‘마침 밤이니까 몰래 움직이는 건 지장 없겠지.’

    그리고 밤눈이 밝은 뱀파이어는 이런 어둠 따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에르제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중간에 몇 번 정체 모를 것들과 부딪칠 뻔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밤눈이 밝아서 살짝 찧는 정도로 무마할 수 있었다.

    저어어벅, 저어어벅.

    느릿하게 몸을 이리저리 꺾어 가며, 에르제는 복도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불이 밝혀져 있는 곳은 최대한 피하며, 어둠에 몸을 숨겨 이동했다.

    그렇게 완벽한(?) 움직임으로 병원에서 근무하는 인간들의 눈을 피한 에르제는 이내 화장실이 있는 곳에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수혈팩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구나.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려서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영민하며, 수많은 일족을 이끄는 뱀파이어 로드.

    해결책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에르제는 지나가는 근무자 인간을 붙잡고 물어보는 현명한 방법을 택했다.

    불빛으로 나온 에르제는 무언가를 들고 걸어가는 분홍색 옷을 입은 인간을 발견했다.

    그리고 오른팔을 들고, 그녀를 부르며, 느릿하게 나아갔다.

    “가아아아……!”

    다만 해결책 중에서 아직 가와 아밖에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1초 정도 깜박했을 뿐.

    툭―.

    파일철을 떨어뜨린 간호사는 잠시 선 채로 그대로 굳어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

    “조, 좀비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가아아…….”

    툭, 팔을 아래로 떨어뜨린 에르제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좀비라니. 저급한 네크로맨서들이나 만들어 낼 법한 하급 마물 따위랑 자신을 비교하다니.

    강제로 종족 정체성이 위협을 당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나타난 것은 커다란 덩치의 남자였다.

    에르제는 뜻밖의 반가움을 표현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아!”

    플랑이라고 부른 거다.

    “병원 카페는 문을 닫았다.”

    간단하게 대답한 플랑은 비명 소리로 인해 주변에서 모여든 이들에게 손바닥을 내어 보였다.

    “미안하다. 여기는 토트윈의 서은우, 지금 상태가 좋지 않다.”

    플랑은 고개를 돌려 최초 피해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상태가 좋아지면, 꼭 좀비라고 부른 것을 사과하도록.”

    “……네?”

    “성실한 대답, 감사하다.”

    플랑은 엄지를 척, 세워 주고는 그대로 에르제를 둘러업고 다시 병실로 향했다.

    “우어애!”

    이번에 말한 건 수혈팩이었으나, 에르제 본인 말고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기에 플랑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는데, 라하임의 분노에는 그리 입을 꾹 닫고 있었다니 강인한 의지는 인정한다.”

    ‘이걸 말하는 걸로 생각해 줘서 정말 고맙다.’

    에르제는 씁쓸한 얼굴을 하다가 혹시 몰라서 입안에 아무것도 없는지 확인했다.

    습관성 기절증후군이라는 건 꽤나 무서우니까.

    다행히 입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으니, 때마침 플랑이 그를 다시 침대에 뉘었다.

    그러고는 다시 천장 위로 올라가려고 해서, 에르제는 황급히 손을 뻗었다.

    우두둑, 소리가 났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아!!(잠깐!!)”

    “하아, 지금 시간에는 카페가 열지 않는 것 정도는 알아줬으면 한다.”

    플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나 친절하게 속마음으로 해석까지 덧붙이는 정도로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에르제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내 적절한 물건을 찾아냈다.

    역시 밤눈이 밝은 뱀파이어답게 어둠 속에서도 물건을 식별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에르제는 스마트폰을 들고 빠르게 터치를 이어 갔다.

    [ 나는 네 로드인 에르제다. ]

    그렇게 써서 플랑에게 보여 주었다.

    플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렇게 날 흔들어도 소용없다. 판단은 내 몫이 아니다.”

    [ 그럼 라하임을 불러 줘. ]

    “…….”

    플랑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본인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응, 그거 사용할 줄 알았구나? 여태 한 번도 쓰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스마트폰이 없는 줄 알았는데.

    에르제가 허허로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곧 창문 밖에서 파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플랑이 친절하게 창문에 구멍을 내어 열어 주었다. 아래 달린 손잡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쟤는 연락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빨리 와.’

    아마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 같은데, 이 정도면 굳이 플랑에게 감시하라고 할 이유가 있었을까?

    허둥지둥 박쥐에서 다시 뱀파이어 형태로 돌아오는 라하임과 세리나를 보며, 에르제는 안타깝다는 듯이 웃었다.

    하긴.

    라하임이 이렇게 어정쩡하게 일 처리를 하는 것은 달리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내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해서겠지.’

    만약 라하임이 그런 일을 겪었다면, 자신도 비슷했을 것이다.

    에르제는 성큼성큼 다가오는 라하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아이(라하임.)”

    “……날 놀리기 위해 부른 것인가? 말을 할 수 있지만, 굴복하지는 않겠다는 그런 뜻이렷다.”

    그게 아니라고.

    이제는 더 한탄하는 것도 지쳤기 때문에, 에르제는 진짜로 고문당하기 전에 재빠르게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 나는 뱀파이어 로드 에르제, 너희들의 주인이다. ]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구나.”

    라하임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편하게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무시무시한 경고에 에르제가 빠르게 다음 글자를 작성했다.

    [ 내가 내 목숨을 바쳐 너희들을 카테이아 대륙에서 이곳으로 보내 줬잖아. ]

    일족과 자신밖에 모르는 정보를 꺼내 들었다.

    “……!”

    라하임이 다시 손톱을 집어넣으며 허리를 폈다.

    “너, 설마 그 몸에 들어와 로드의 기억을 읽은 것이냐?”

    “…….”

    말이 안 통하는군.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이 에르제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 혈기를 쓸 수 있게 생명력을 돌려줘. 그럼 내가 에르제라는 것을 증명하지. ]

    “……너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런 문자 따위로 소통하면서…… 내게 생명력을 다시 달라고 하는 건가?”

    [ 네가 생명력을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뺏어 갔잖아……. ]

    “……아.”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라하임이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두들겼다.

    “의지가 강한 게 아니라 그냥 말을 못 한 거였군.”

    미안하다, 내 실수다.

    라하임의 마음속에서는 그 뒷말이 이어졌기를 바라며, 에르제는 글자를 더 써 주었다.

    [ 그러니까 생명력을 돌려줘. ]

    “내가 널 뭘 믿고?”

    [ 어차피 생명력이 있을 때에도 너한테 제압당했을 수준이면 상관없잖아? ]

    그건 서은우의 기억이 없다고 해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 몸에서 생명력을 빼 가려면 기습이든 뭐든 해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기절을 시켰을 테니까.

    ‘그러고 나서 이 병원에다 입원을 시켰겠지.’

    정확한 전후 사정은 몰라도, 그 정도는 충분히 추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게 사실이었는지, 라하임은 잠시 고민하는 자세를 취했다.

    ‘……혹시 모르니까 쐐기를 박자.’

    라하임과 자신밖에 모르는 정보들을 죄다 풀어 볼 생각이었다.

    다만 문자를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에르제는 글을 작성하고 마이크 버튼같이 생긴 것을 눌렀다.

    태현우가 알려 준 기능이었는데, 스마트폰으로 쓴 글을 의문의 목소리가 읽어 준다고 했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곧 에르제가 들고 있는 스마트폰에서 고저 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켈라에게 고백했다가 3초 만에 차이고 3일 동안 운 라하임.

    ― 어렸을 때 집에서 혼나고 가출했다가 나한테 걸려서 붙잡혀 돌아온 라하임.

    ― 나랑 같이 비행 연습을 갔다가 나뭇가지에 걸려서 13바퀴 빙글빙글 돈 라하임.

    ― 남들보다 송곳니 늦게 자란다고, 돌로 이빨 갈다가 걸려서 혼난 라하임.

    “그만!!”

    아무 생각 없이 AI 음성을 듣고 있던 라하임은 기겁하며 에르제의 입을 막았다.

    ‘내 입으로 말하는 게 아닌데.’

    에르제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아!”

    그제야 깨달은 라하임이 황급히 스마트폰을 빼앗아 갔다.

    그곳에는 아직 AI가 읽지 않은, 수많은 비화들이 담겨 있었다.

    빠르게 지우기 버튼으로 지워 버린 라하임은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로드이신 겁니까……?”

    라하임 본인은 기억에서 지워 버린, 아주 오래된 기억을 꺼낸 것은 효과적이었다.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결국 라하임은 침대 가장자리 부분에 털썩 걸터앉았다.

    “……하.”

    허탈한 표정을 지은 그는, 그래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기 시작했다.

    라하임 본인의 생명력이 아닌, 자신에게서 빼앗아 갔던 생명력이었다.

    충만하게 채워지는 생명력 덕분에, 에르제의 혈색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후우.”

    딱 혈기를 쓸 수 있을 정도의 생명력이 채워지자, 라하임은 멈추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혈기를 쓰는 모습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로드인 나밖에 쓸 수 없는 걸 해야겠군.’

    생각을 마친 에르제가 손바닥을 폈다.

    “작은 핏방울이 모여 거대한 파도를 이루고, 그림자조차 집어삼킬 어둠은 그 파도를 담아내리라. 붉은 꽃잎이여, 그 안에 매혹의 눈동자를 피워 내…….”

    술법의 주문이 지속될수록, 에르제의 손안에 모여든 핏방울이 거대한 힘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열화 버전이기는 한데, 이 정도만 해도 되겠지?”

    에르제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라하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편에 가만히 서 있던 세리나는 이미 양손을 모은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로드…….”

    “라하임.”

    에르제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 준 것도, 그래서 그동안 마음고생을 했을 거라는 것도.

    에르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미안하다.”

    다만 손바닥에 아직 핏방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라하임의 어깨를 두들겼을 뿐.

    쾅!!

    술법에 맞은 라하임이 병실 문까지 날아가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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