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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90화 (190/307)
  • 제190화

    190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다.

    서은우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세뇌했다.

    곧 있으면, 윤소희가 준비한 차가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몸을 던지면 끝.

    ‘죽는 게 아니야. 죽는 게 아니고, 그냥 의식을 잃을 뿐이야.’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린 서은우는 차도에서 달려오는 차를 발견했다.

    윤소희가 말한 차와 같았다.

    탁.

    더는 망설임이 없었다.

    ‘나도 특별해질 수 있어.’

    발을 내디딘 서은우는 적절한 속도에 치여 날아갔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형체가 없는 자신의 영혼이었다.

    푸른색으로 빛났다가 이내 다시 백색으로 빛나는.

    그렇게 투명한 영혼이 되어 서은우는 빛을 따라 움직였다.

    일자로 쭉 늘어선 빛 가루, 그것들은 마치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려 주는 듯했다.

    뱀파이어가 될 수 있어.

    그리고 부모님을 만날 수 있어.

    나도 특별해져서 그들의 일원이 될 수 있어.

    그러면 더 이상 버림받지 않을 거야.

    모든 것들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데뷔조에서 연습생으로 버려질 일도 없을 거고.

    ‘지금도 봐.’

    어느 곳에서도 조롱 같은 거 들려오지 않잖아.

    히죽 웃은 서은우는 속도를 높였다.

    보이지는 않지만, 흥분에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느껴졌다.

    ‘도착……했.’

    그러나 헛된 꿈이었을까.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시체였다.

    난생처음 보는…… 그리고 잘생겼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한, 수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가 붉은 피를 쏟아 낸 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빛 가루가…… 왜 여기서 멈춰 있는 거야.’

    내 몸이 아니잖아.

    서은우는 빠르게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훑었다.

    ‘동굴……?’

    덜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된 건가? 원래 내 몸은 어디에 있지? 여긴 어디야?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져 갔다.

    해답은 단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야.’

    서은우는 고개를 빠르게 흔들어 처한 상황을 부정했다.

    지금 나는 의식에 의해 소환된 뱀파이어의 정신세계에 들어와 있는 거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은 서은우는 동굴을 빠져나가기 위해 속도를 높여 날아갔다.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동굴을 빠져나가는 병사들의 발소리가 들렸으니까.

    ‘……도대체 여기는…….’

    죽어 있던 남자의 의상도 그랬지만, 쇠 갑옷을 입고 철컹철컹 소리를 내는 병사들은 더욱 이상했다.

    마치 중세 시대에 갑자기 뚝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

    눈을 꽉 감았다가 떠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손의 떨림이 더욱 심해지고, 영혼은 형체를 유지하기 힘든지 격하게 일렁였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흑색 기둥이 영혼 상태의 서은우를 집어삼켰다.

    시간과 정신의 방.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을 표현하면 그렇지 않을까?

    서은우는 그저 흐르는 물길에 몸을 맡겼다.

    자신이 있는 곳이 시간의 물결이라는 것과,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진즉에 깨달았다.

    이미 이 어두컴컴한 세계에 갇힌 지 셀 수도 없이 무수한 시간이 흐른 뒤였으니까.

    말을 하는 법도, 생각을 하는 방법도 잊힐 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서은우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분노, 복수와 같은 감정에 의지해 겨우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모는 그냥 뱀파이어가 필요했을 뿐이다.

    애초에 자신을 뱀파이어로 만들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 종족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지구는 인간의 세상인데, 그들이 뭐라고 날 이렇게 만든 거지.

    아, 그래.

    인간 말고 다른 종족들은 이 세상에 다 필요 없어.

    그러면, 더 이상 버려질 일도 없어.

    그렇게 분노에 의해 이성이 뒤틀리고, 오로지 복수라는 감정만이 더욱 짙어졌다.

    서서히……. 그렇게 서은우는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표만이 응집된 괴물이 되어 갔다.

    * * *

    ‘흐어어억!’

    에르제는 오랫동안 물속에 있다가 나온 사람처럼 숨을 크게 토해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후욱, 후욱, 후우……!!”

    그럼에도 호흡이 가라앉지 않아, 에르제는 폐가 있는 곳을 손으로 꾹 눌렀다.

    에르제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아픈 것은 폐뿐만이 아닌가 보다. 모든 관절이 쑤실 듯 아팠고, 모든 근육은 심한 근육통을 앓는 듯 마구 욱신거렸다.

    ‘다시…… 돌아온 건가.’

    고통 덕분에 정신이 조금 또렷해졌다.

    그렇게 겨우겨우 비쳐 들어오는 빛에 적응해 갈 즈음, 에르제의 시야에 흐릿한 모습들이 보였다.

    여러 개의 잔상이 점점 하나로 합쳐지고, 곧 그는 눈앞에 있는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세……리나, 라하임…….’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덩치까지.

    ‘플랑…….’

    “웬만하면 누워 있는 게 나을 거다.”

    그러나 플랑은 그렇게 말하며, 겨우 일으킨 몸을 다시 눕혔다.

    ‘윽……!’

    고통에 숨을 몰아쉬고 있으니, 곧 라하임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명력을 뽑아 두었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왜…….’

    그렇게 말을 하려던 에르제는 이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명력이 빠져나간 탓에 목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악, 학.”

    낼 수 있는 건 그저 바람 새는 소리뿐.

    황망한 표정으로 라하임을 보고 있으니, 이윽고 그가 입술을 떼었다.

    “너는 누구지?”

    “…….”

    “누군데, 로드의 몸을 차지해서 로드 행세를 한 것이냐.”

    에르제가 미간을 좁히며 버둥거렸다.

    ‘돌아왔어. 라하임. 나야.’

    하지만 그 어떤 말도 그에게 닿지 못했다.

    “생명력이 별로 없으면서도 의지력이 꽤 강하군.”

    라하임은 섬뜩한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로드의 의식을 밀어냈겠지.”

    ‘다시 돌아왔다고!’

    라하임은 에르제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로드. 이자도 지속적인 몸의 고통은 견뎌 내지 못할 겁니다.”

    ‘그게 아니야……. 고통은 내가 받고 있잖아!’

    에르제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프면서도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다니.”

    라하임은 짐짓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굽혔던 무릎을 폈다.

    “플랑, 이자를 계속 감시해.”

    “알았다.”

    “……로드는 분명 저 안에 계신다. 나는 느낄 수 있어.”

    ‘제발, 라하임. 제대로 느껴 줘. 안이 아니라 밖이야…….’

    “우리는 돌아가서 다른 방향으로 조사를 해 보자.”

    “알겠습니다.”

    그렇게 라하임과 세리나가 문을 열고 나갔고, 플랑만이 방 안에 남았다.

    ‘어디 가……. 이 자식아.’

    에르제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생명력을 빼앗긴 덕분에 혈기를 운용할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차오를 생명력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말은 할 수 있을 정도로 생명력을 뽑아야 할 거 아니야.

    그동안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알아챘으면서, 왜 이런 건 또 미숙하게 하는 건지.

    로드가 로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은 건지, 실로 기가 막힌 일 처리에 그만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다.

    ‘하아.’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쉰 에르제는, 천천히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링겔과 하얀 벽지,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병원인가.’

    그나마 인적 드문 흉가 같은 데 가둬 두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약 그랬다면, 소속사와 멤버들이 자신을 찾으러 다녔을 테니까.

    ‘……드라마도 그렇고, 알바 몬스터……. 할 일이 많은데.’

    에르제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온몸에 힘을 풀었다.

    이렇게 된 김에 그냥 생각이나 정리할까 싶어서였다.

    ‘분명 그때 내 몸에 들어온 건 서은우야.’

    동시에 자신의 의식은 아무것도 없는 컴컴한 세계에 갇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에르제는 아무것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서은우가 몸을 차지한 동안,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녀석이 자신의 몸에 들어와 했던 일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중요한 기억에 술법을 걸어 둔 것처럼, 녀석도 그런 비슷한 짓을 한 모양이다.

    하여 걱정을 하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그리고 무엇을 걱정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동안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닌 건 아니겠지.’

    하얀과 무대를 하기 직전에 몸을 빼앗겼는데, 그럼 그 무대는 잘했을까. 탈주한 건 아니겠지?

    ‘…….’

    유일하게 걱정할 수 있는 걸 걱정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것이 병원 창문을 통해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병실 문 쪽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조용히 해! 여기 병원이야!”

    “그렇지만 은우가! 은우가……!!”

    “끄윽……. 끄윽…….”

    “은우 자고 있을 수도 있고, 많이 아프다고 하니까 진정하고 들어가자.”

    마지막으로 들려온 것은 윤치우의 목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 열린 문으로 들어온 것은 토트윈 멤버들과 이윤이었다.

    민주혁과 윤치우는 담담한 편이었고, 태현우는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했다.

    ‘안단테는 또 울었나.’

    하여간 마음이 여려도 너무 여리다.

    눈물 자욱이 허여멀겋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울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태현우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에르제의 팔을 꾹 잡았다.

    어깨에 이어 팔 공격까지 받으니, 다시금 눈물이 찔끔 나왔다.

    태현우가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야……. 우냐……?”

    그런 말을 하면서 너도 울 것 같은 표정은 짓지 말아 줄래?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아파서 우는 거라고.

    ‘태어난 이래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는데.’

    오늘만 무려 2번이나 아파서 눈물을 흘리는구나.

    에르제는 입안으로 퍼지는 씁쓸한 맛을 느끼며, 현재의 상황을 고찰했다.

    뱀파이어 로드 에르제, 생명력을 거의 빼앗겨 거동조차 할 수 없는 몸이 되다.

    “당분간 은우는 활동하기 어렵겠다.”

    그리고 당분간 활동하기 어렵게 되었다……?

    에르제가 그 말을 한 장본인을 눈동자만 겨우 굴려 쳐다보았다.

    ‘안 돼……!’

    이윤이었다.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아주 악독한 말을 뱉어 내는 매니저의 말이다.

    ‘돈 벌어야 하는데.’

    마녀들의 지원 이후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안 그래도 요즘 재정난이 심각하다고 라하임이 말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최종 목표인, 일족들이 살아갈 터전을 만들어 주겠다는 개인적인 다짐도 아직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는 안 돼.’

    어떻게든 하루빨리 기력을 회복해야 한다.

    에르제는 빠르게 해결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다친 사람을 구해 줬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자신은 병원에 있는 수혈팩이라는 것을 가지러 가고 있던 길이지 않았던가.

    ‘여기에도 그게 있겠지.’

    그렇다면 이제부터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기어 다닐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생명력을 회복해야 했다.

    뱀파이어 로드가 이런 꼴이라니.

    ‘입맛이 영 쓰네…….’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꾹 감았다.

    이제 얼굴을 봤으니 얼른 병실에서 나가 달라는 의미였다. 그래야 평온하게 생명력을 채워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어……. 어! 은우 입에…… 초록색……!!”

    “빨리 의사 선생님 불러와!!”

    안타깝게도 역류한 쓸개즙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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