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189화
“역시 이상합니다.”
세리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뭐가 이상한데?”
그러나 라하임은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조금 전 세리나가 메시지 내용을 보여 주었으나, 거기서는 딱히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자신은 매니저로서 최근에 에르제와 계속 붙어 있었다.
“평소랑 별로 다를 것 없어 보이셨는데.”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러나 쿵! 하고 세리나가 바닥을 때렸다.
순간 약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집이 살짝 흔들렸다.
장미영이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언니, 진정해요.”
“진정하게 생겼어?”
세리나는 으르렁거리며 입술을 씹었다.
“라하임 님은 그렇게 로드와 오래 붙어 계셨는데, 어째서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신 겁니까.”
“왜…… 내가…….”
졸지에 혼난 라하임이 억울한 표정을 짓자, 세리나가 팔짱을 끼며 쌍심지를 켰다.
“노래와 춤, 팬들은 벌써부터 이전과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거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그거야…… 팬들도 원래 하던 거랑 달라서 그런 것 같다고 하길래…….”
“안일합니다!”
세리나는 씩씩대며 자신의 생각을 주르륵 나열했다.
“로드의 노래와 춤은 훨씬 더 섬세합니다. 음정 하나, 안무 포인트 하나 모든 것에 의미를 담는단 말입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맛이 달라지는데, 지금은 그게 심각할 정도로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세리나는 그 뒤로도 에르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열심히 나열했다.
아주 세세한 표정부터 호흡을 쉬는 타이밍 같은 것들을 예시로 들며 열변을 토했지만.
“……난 잘 모르겠다.”
라하임은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세리나가 아니었다.
“조금 전의 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1장로와 대마녀, 둘이 만날 것을 로드께서는 미리 예측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굳이 알아볼 필요가 없다고 하셨고요.”
“……!”
그제야 이상함을 깨달은 라하임이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그래, 분명히 그러셨어.”
그리고 그렇게 한 번 이상하다고 여기고 나니,
“잠……깐만.”
이후에 아무 생각 없이 놓쳤던 것들도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라하임이 입을 벌린 채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로드께서 무대를 마치고 피곤하다고 주무셨다.”
“그럴 수가.”
“그것도 저녁 시간에.”
“세상에.”
라하임과 세리나,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빠르게 오갔다.
“라하임 님, 이대로라면 팬들이 눈치채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당장에 인터뷰 하나가 잡혀 있으니까요.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로드께서 아이돌 활동을 하는 데에 어떠한 지장이라도 있으면 안 됩니다.”
“아이돌 활동……?”
라하임이 조금 당황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로드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우리 일족에 너무나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예. 최악의 경우 로드께서 아이돌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꾹 다문 라하임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바로 확인해 보는 게 좋겠군. 내가 하겠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세리나가 고개를 숙이자, 장미영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 * *
“잘할 수 있었으면서!”
하얀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그렇게 말하고는, 상체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역시 퀸님이에요.”
“아……. 네.”
서은우는 어색하게 웃고는 매니저와 함께 멀어져 가는 하얀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몇 번이나 남았으려나.’
에르제는 당연히 그럴 생각이 없겠지만, 그가 자신의 몸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하얀과의 무대 때문이었다.
하급 악마를 이용해 자신과 에르제가 연결된 통로를 찾아냈고, ‘다른 사람이 대신 춰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트리거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걸 냉큼 거래 조건으로 만들어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앞으로 하얀과의 남은 무대가 없어지면 자신은 자동적으로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될 터.
그렇기 때문에, 하얀과의 무대는 최대한 많이 할수록 좋았다.
‘장태수 대표님한테 하얀과 무대를 더 많이 하고 싶다고 이야기해 놔야겠네.’
유예기간을 늘릴 방법을 고민하던 서은우는 그날 이후 제이에게서 온 메시지를 떠올렸다.
제이는 의아해하는 기색이기는 했지만, 에이리스와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만날 시간과 장소를 떠올리던 그에게 라하임이 다가와 물었다.
“로드, 모시겠습니다.”
“어, 아니야.”
서은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어디 갈 데가 있어서.”
“……어디로 가십니까?”
“그냥 개인적인 일이라.”
잠깐 대답이 없던 라하임은 이내 수긍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민주혁과 같은 그런 일이군요.”
“맞아. 아, 멤버들이나 윤이 형은 모르는 일이니까 너도 바로 돌아가지 말고 시간 맞춰서.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이해했습니다.”
라하임이 고고한 자세로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고, 서은우는 손을 들어 올려 받아 주었다.
“먼저 가 볼게.”
서은우는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 이내 건물 밖으로 몰래 나와서 택시를 잡아탔다.
지금 그가 향하는 곳은 뱀파리스들의 근거지였다.
“도착했습니다, 손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한 뒤 숲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에이리스가 미리 일러 준 결계가 보였다.
“djfrgudlTsms rjtemfdms wpwkflfmf ckwdk rkflfk.”
그녀가 말해 준 술법의 주문을 읊자, 결계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틈이 하나 생겼다.
‘혈기가 없어도 되는군.’
서은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결계 안으로 들어섰다.
높은 첨탑, 견고한 회색 벽, 커다란 성 하나가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깊은 숲 가운데에 숨어 있는 성이라.
어렸을 때 보았던 중세 시대 건축물들이 문득 떠올라 서은우는 피식 웃었다.
뒷짐을 진 채 성을 향해 걸음을 옮기니, 손수건을 팔에 두르고 있는 늙은 뱀파리스가 마중을 나왔다.
“오셨습니까. 서은우 님.”
“에이리스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서은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늙은 뱀파리스를 따라 성 안으로 들어섰다.
동선을 외우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복도를 이리저리 지나치고, 늙은 뱀파리스는 황금색으로 치장된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 뒤에 그는 한쪽으로 비켜나며,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서은우는 성큼성큼 황금색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양옆에 위치한 횃불이 길을 따라 불을 피워 올렸다.
“환영 인사 한번 거창하네.”
서은우는 일정한 속도로 걸음을 옮겨, 이내 에이리스가 앉아 있는 의자까지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한참 위에 위치한 곳에서 에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시다시피 몸이 불편한지라 무례를 용서하시길.”
“괜찮아.”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에이리스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본인의 몸으로 연결된 통로를 찾겠다고 하시더니, 과연 찾아내셨군요.”
“뭐, 거래에 의해 일시적으로 들어와 있을 뿐이야. 내 몸인데, 내 맘대로 있지도 못해서 기분이 좀 엿 같긴 하지만.”
“대악마님께서 강림하시는 날, 그때 몸을 다시 차지하시면 될 것입니다.”
“글쎄, 녀석이 순순히 내어줄까.”
어깨를 으쓱한 서은우는 앉을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그냥 바닥에 털썩 앉았다.
“의자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할까요?”
“아니, 됐어. 불편하진 않아.”
서은우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에이리스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허면 저를 보자고 하신 건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아.”
서은우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대꾸했다.
“원래는 에르제의 계획을 너에게 알려 주려고 했는데, 녀석이 중요한 정보는 죄다 열람할 수 없도록 막아 두었더라고.”
“…….”
“그래서 계획을 조금 수정을 할까 싶어서. 내가 오늘 여기 오기 전에 재미있는 소식 하나를 가져왔거든.”
서은우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1장로가 대마녀와 만났다고 하던데, 너도 알고 있는 일인가?”
에이리스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뇨.”
“그럴 줄 알았어.”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긴 서은우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내 생각엔 1장로도 속으로는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너나 나나, 지금은 같은 처지야. 믿을 곳은 서로밖에 없지. 네게 은혜를 내려 준 게 나니까.”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긴 서은우가 이어서 말했다.
“제물로 바칠 뱀파리스는 제이에서 1장로로 바꾸는 게 좋겠어. 가지고 있는 힘도 1장로가 훨씬 크니 내가 강림할 시간을 많이 단축시킬 수도 있겠고. 아, 물론 제이는 제물의 제물이 되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한 서은우는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이리스는 제 안위가 늘 우선이었다.
‘본인을 제외한 모든 뱀파리스가 죽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지.’
에이리스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내 복수의 대상에 네 목숨이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어?”
“…….”
“너를 통하는 것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어서 선택했을 뿐. 내가 이곳에 강림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거 알고 있을 텐데?”
결국 굳게 닫혀 있던 에이리스의 입술이 떨어졌다.
“……알겠습니다.”
계속 짓고 있던 웃음은 어디로 갔는지, 에이리스는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도 좋은 일이잖아. 1장로를 바치는 대가로, 나머지 로드의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서은우는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다.”
“살펴 가십시오.”
서은우는 들어왔던 길의 반대로 성의 바깥까지 나왔다.
결계의 틈은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
‘후, 머리 아프네.’
그는 결계를 빠져나온 뒤, 주황빛으로 변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내 인생도 참 기구하네.’
인간에서 구천을 떠돌던 영혼으로.
그리고 뒤엉킨 시간축에 갇혔다가 다시 대악마의 몸속으로.
그렇게 힘을 얻었고, 복수를 결심했다.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같은 일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이런 지옥에 내던진 뱀파이어들, 그리고 인간을 제외한 모든 종족들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방법으로 말이다.
‘그게 내가 태어난 사명이야.’
광기에 젖은 눈동자로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바라보던 서은우는 천천히 숲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아니라면, 무례를 용서하시길.”
나무 사이에서 튀어나온 인영 하나가 그대로 서은우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