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187화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나면, 그 다른 날 스케줄은 항상 지옥 같은 일정이 함께했다.
사실 지옥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지옥이 있다면 아마 이런 곳이 아닐까?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삐걱삐걱 몸을 움직였다.
“음……. 벌써 몇 번째 맞춰 보는 건데도 도무지 늘지가 않네요.”
안무 선생은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분명 토트윈으로 활동할 때의 에르제는 춤을 추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잘 춘다고 할 만한 실력이었다.
그만의 독특한 춤 선이 있었고, 덕분에 순간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으니까.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요?”
그렇기에 안무 선생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남녀가 함께 춤을 춘다는 것, 그리고 토트윈이 추던 춤에 비해 터치가 조금 더 있다는 것뿐인데.
난이도로 따지자면 토트윈의 안무보다 더 아래인데, 어째서 이렇게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인지.
“난이도를 더 낮춰야 하나…….”
“난이도보다는 수위를 낮춰 주는 게…….”
에르제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안무 선생의 얼굴은 그보다 더 난감해 보였다.
“그것도 좀 조절해 줬잖아요.”
“으음.”
그 말도 사실이라 에르제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해 보지 않은 것을 하는 것도 어려운데, 할 수 없는 걸 시키니까 더욱 어렵다.
‘완고하게 거절했어야 했는데…….’
잠시만이라도 누군가가 자기 대신 춤만 좀 춰 줬으면 좋겠다.
“일단 어색하긴 해도 안무를 수정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으니 계속 연습해 봅시다.”
안무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손뼉을 짝짝 쳤다.
“다시 해 볼게요.”
그렇게 안무 선생이 있을 때, 그리고 둘이 따로 연습할 때에도 에르제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아무리 연습을 한다고 해도 본성이 바뀔 수는 없는 법.
“아니, 이렇게 딱!”
둘이서만 따로 연습을 하던 중에 하얀이 기어코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볼에 닿기만 하면 되는데!”
“안 돼요.”
에르제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채 볼에 가져가려고 하는 하얀을 바라보았다.
하얀은 에르제의 손을 끌어당기기 위해 힘을 주었으나, 에르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위험해요.”
“아……!”
에르제는 힘을 주어 손을 빼냈다.
그가 계속해서 막히는 부분은 손등을 하얀의 볼에 살짝 대었다가, 그 뒤로 팔을 뻗어 하얀의 머리카락을 넘기는 안무였다.
하지만 손등이 볼 근처에서 허공에 떠 있고, 머리카락도 몇 가닥만 넘기니 어색해 보일 수밖에.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단순히 안무가 남사스럽다는 것 말고도 에르제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무대에서는 더더욱 이런 춤을 출 수가 없어.’
뱀파이어는 애초에 매혹이라는 힘을 가지고 태어난 종족. 따라서 이렇게 신체 접촉이 잦은 춤을 같이 추게 된다면…….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매혹의 힘이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결과는 뻔하다.
당사자인 하얀은 물론이고, 이를 보게 될 인간들조차도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나 하얀보다는 인간들이 더 영향을 받기 쉽겠지. 정신계 쪽으로는 훨씬 더 취약하니까.’
세상에 춤이라는 것이 생겨난 계기, 더불어 이런 유의 안무가 합쳐진다면…….
아마 그때 발생하는 매혹의 힘은 자신이 컨트롤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가능할 수도 있지만, 굳이 리스크를 짊어질 필요는 없지.’
이것이 토트윈 무대도 아니고, 하얀에 의해 성사된 피처링 무대였으니 더욱 그랬다.
하얀한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에르제는 딱 이 정도가 한계라고 규정지었다.
에르제는 손으로 X자를 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요. 싫어요.”
에르제는 하얀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 * *
그렇게 어정쩡하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하얀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날이 찾아왔다.
― 섹시함 물 오른 은우랑 하얀 조합, 나는 찬성!
┖ 둘 다 실력으로는 톱급이라 기대되기는 함.
― 나는 좀 걱정되는데……. 괜히 이쪽으로 이미지 세게 박히면, 이후에 각자 활동할 때 좀 거슬릴 수도.
┖ 그러게. 하얀은 몰라도 은우는 ㅠ 토트윈이 컨셉 돌이라 흐려질 수도 있을 듯.
┖ 뭐 어때. 노래 좋으면 다지.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반, 걱정하는 의견이 반.
의견이 반반으로 갈렸지만, 그래도 기사나 댓글을 보면 관심도가 높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리허설을 마치고 난 뒤, 하얀은 평온한 에르제를 보며 투덜댔다.
“이따 무대에서도 그렇게 할 거죠?”
“네. 변하는 것은 없어요.”
단호하게 대답하는 에르제를 보며, 하얀이 보고 있던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팬들이 엄청 기대하고 있는데.”
“어쩔 수 없어요.”
에르제는 무덤덤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
하얀은 눈을 흘기며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휙 돌려 앉았다.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퀸에 대한 마음도 많이 옅어진 느낌이었다.
‘……차라리 잘됐지.’
그냥 이렇게 하고 나면,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을 테니까. 더 엮일 일은 없을 것이다.
‘장미영만으로도 충분해.’
요즘 세리나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만, 둘이 딱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 괜히 불안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에르제는 하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피처링하는 사람이 바뀌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얀이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니, 그의 마음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엉성한 무대를 보게 될 팬들에게도 미안했고.
‘차라리 내게 문제가 생기는 거면 괜찮았을 텐데.’
그랬다면 꾹 참고 했을 거다.
에르제는 허벅지 위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아쉬운 속내를 감추던 중이었다.
[ 정말? ]
어딘가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르제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찾았다.
하지만 그 상황에 놀란 하얀만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을 뿐.
‘남자 목소리였으니까 하얀은 아니고…….’
에르제가 미간을 좁히며 천장까지 살피고 있으니, 조금 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분명 네가 그렇게 말했어. ]
그때 에르제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 목소리는 자신의 안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매일같이 듣던 자신의 목소리와 똑같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에르제의 의식이 흐려졌다.
‘……서……은우……!!’
그렇게,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에르제의 눈에는 더 이상 혈기가 맺혀 있지 않았다.
* * *
“일어나셨습니까?”
서은우는 힘겹게 눈을 뜬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 안이었다.
라하임은 운전을 하고 있었고, 차 안에는 자신밖에 없었다.
“차에 타시자마자 주무시다니,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아아. 응. 좀 피곤해서.”
“그렇습니까. 하긴, 워낙 최근에 많은 일을 하셨으니까요.”
라하임은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나저나 연습 때는 수위 높은 안무는 절대 할 수 없다고 고집하시더니 본 무대 때는 잘하시던데요.”
“아아.”
서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별것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어딘가 조금 섬뜩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막상 팬들의 얼굴을 보니까 리스크는 내가 감당하는 게 맞겠다 싶어서. 자신감도 있었고.”
“매혹의 힘 말씀이시군요.”
“어어, 그거.”
서은우는 손가락을 튕기고는, 이내 다시 차창에 머리를 박았다.
“숙소 도착하면 깨워 줘. 오랜만이라서 좀 피곤하네.”
“예, 알겠습니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인 서은우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춤을 춰서 그런지 꽤나 피곤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에 도착한 뒤, 라하임은 곤히 잠든 서은우를 깨워 주었다.
“로드, 도착했습니다.”
“아, 응.”
서은우는 눈을 비비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고생했어.”
“예, 푹 쉬십시오.”
라하임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모카 엔터 방향으로 다시 차를 몰고 떠났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아직이야.”
그러고는 손을 몇 번 쥐었다 펴 보기도 하고 볼을 꼬집어 보더니, 이내 숙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려왔다.
예상대로 태현우와 안단테였다.
또 뭔가 콩트를 하고 있는 건지 거실에서 연기를 하고 난리가 났다.
“그냥 대표님한테 드라마 출연하고 싶다고 이야기해 봐.”
서은우는 그렇게 말하며 거실로 들어섰고, 멤버들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야, 네가 추천 좀 한번 해 봐.”
태현우가 주먹으로 서은우의 가슴을 툭 두들기며 씩 웃었다.
“오늘 음방 아주 인상 깊게 봤어.”
“아.”
“고급진 섹시함이라고 아주 난리가 났던데?”
“그래? 확인 안 해 봐서 몰랐네.”
서은우의 말에 태현우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 심심하면 스마트폰으로 반응 보는 게 취미잖아. 오는 길에 확인 안 했어?”
“졸려서 잤거든.”
“네가? 졸려서 자?”
태현우가 이마를 찌푸렸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넘어갔다.
어느새 다가온 윤치우가 그의 등을 두들겼다.
“고생했어. 애들이랑 다 같이 봤는데, 잘……하더라.”
싱긋 웃은 서은우는 그대로 윤치우를 껴안았다.
“갑자기 왜…….”
잠깐 당황하며 말을 더듬기는 했으나, 윤치우도 얼떨결에 그를 안아 주며 등을 토닥거렸다.
그리 많이 주어지지 않은 시간, 잠깐의 행복을 챙겨도 되잖아.
서은우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억지로 누르며, 윤치우를 놓아주었다.
어느덧 그를 바라보는 멤버들의 눈에 걱정이 어려 있었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오늘 무대 하는데 누가 시비 걸거나 그런 거 아니지?”
“은우는 대개 시비를 거는 쪽이지, 걸리는 쪽은 아니야.”
민주혁이 안경을 손가락 끝으로 올리며 못을 박았다.
“그건 그래여.”
안단테도 동의했다.
“하하…….”
어색하게 웃은 서은우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반가워서 그랬어. 일은 무슨 일.”
반갑다고 말하는 게 더 수상해서 멤버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나, 서은우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그들의 눈빛을 자연스럽게 넘겼다.
피식 웃은 그는 이내 달력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토트윈의 실물 앨범에 넣어 주었던, 그들의 사진이 박힌 달력이었다.
그저 장식용은 아니었는지, 스케줄 같은 것들은 제외한 생일 등이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곧 주혁이 생일이구나.’
서은우는 손가락으로 날짜를 쓸어내리다가 이내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해 두려고 했는데.
‘선물로 주면 어떻게 될까.’
서은우는 다시 책에 집중하고 있는 민주혁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스마트폰을 꺼내 ‘청화 안병인’이라 쓰여 있는 이름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