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86화 (186/307)
  • 제186화

    186화

    문휘영의 그림자에서 악마를 잘라내고 난 뒤, 에르제는 그의 태도가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갑게 굴지는 않아도 더 이상 자신을 적대시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가 거래로 어떤 것을 원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예상은 할 수 있었으니까.

    악마가 붙어 있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강석구 때문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닌 듯하니, 아마도 배우로서 성공하게 해 달라거나 유명세 따위를 바랐겠지.

    그러나 다음 촬영을 위해 에르제가 촬영장을 찾았을 때, 문휘영의 태도는 에르제의 예상과는 달랐다.

    자리에 앉아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문휘영은 대본을 들고 걸어오는 에르제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그는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에르제의 팔을 잡은 뒤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툭, 하고 대본이 바닥에 떨어졌다.

    “잠시만.”

    에르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며 대본을 주워 들려고 했지만, 이미 문휘영에 의해 대본과는 멀어진 상태.

    ‘왜 이러는 거지.’

    결국 어쩔 수 없이 문휘영을 따라 구석진 곳에 오게 된 에르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숨? 네가 지금 한숨을 쉬어?”

    문휘영은 목소리를 한껏 낮게 깔며 그를 노려보았다.

    “어디로 가져갔어?”

    “뭐를요?”

    “천사님.”

    “천사님……?”

    에르제가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뜬금없이 천사라는 말이 왜 나온단 말인가.

    “내 수호천사님!!”

    문휘영은 반쯤 광기에 젖은 눈동자로 에르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네가 저번 촬영 때 칼로 잘라내 갔잖아!! 내가 똑똑히 봤다고. 아니! 들었어! 천사님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내 귀에 들렸다고……!”

    “잠깐만요.”

    에르제는 문휘영을 가볍게 밀어냈다.

    세게 멱살을 잡고 있던 그가 손쉽게 뒤로 떨어져 나갔다.

    “뭐, 뭐야. 너.”

    “그걸 제일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에르제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수호천사든 악마든 눈앞에서 그것을 잘라내는 것을 목격했는데.

    이제 와서 자신의 정체를 묻는 걸 보니, 문휘영의 정신 상태가 그리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도 멱살 잡힌 걸 쉽게 풀었다고 그렇게 묻는 게…….’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에르제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악마에 홀리고도 수호천사 같은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거겠지.”

    “……악마? 너 이 X끼, 지금 천사님을 악마라고 한 거냐?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헛소리야!”

    “후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문휘영을 보며, 에르제는 다시금 한숨을 뱉어 냈다.

    “당신의 그림자에 붙어 있던 건 천사 같은 게 아니라 악마입니다. 그것도 당신의 욕망에 붙어 기생하는 하급 악마.”

    “무슨…… X 같은 소리야, 그게.”

    문휘영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대꾸했다.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에르제에게서 위협을 느낀 모양이었다.

    조금 전에 이곳까지 데려오던 당당한 패기는 어디로 간 걸까.

    “저는 그쪽을 해칠 마음이 없어요.”

    에르제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짐짓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냥 눈 감고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악마에게 홀리고 거래를 맺었던 기억을 깨끗이 지워 줄 것이다.

    어차피 오늘 문휘영의 태도와 상관없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게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좋을 테니까.’

    악마니 천사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 것은 덤이었다.

    이렇듯 인간들에게도 차별 없이 사소한 것들까지 자비롭게 배려해 주는 뱀파이어는 드물다.

    자애롭게 미소를 지은 에르제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쪽으로.”

    역시나, 안타깝게도 문휘영은 에르제의 말을 곧이곧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어…… 어, 오지 마!”

    “이곳으로 오게 한 건 문휘영 씨예요.”

    “오지 말……!!”

    다행히 문휘영의 고성이 먼 곳에 있는 이들에게 들리기 직전, 라하임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으으으읍!”

    “그러니까, 제가 눈 감고 편안히 있으면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요.”

    흡사 납치범 같은 대사에 문휘영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금방이라도 살려 달라며 눈물을 줄줄 쏟아 낼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에르제는 그런 취미가 없었으므로, 라하임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괜찮겠습니까, 로드? 인간입니다. 기억의 영역은…….”

    “애초에 악마랑 거래를 할 수 있을 정도면, 일반 인간보다 정신력은 뛰어나다는 뜻이야. 악마에 홀렸는데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잖아.”

    에르제는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정신계 쪽으로는 나보다 네가 더 유능하잖아. 믿을게?”

    에르제는 라하임의 어깨를 툭툭 쳤다.

    “5분 정도 걸릴 겁니다.”

    “응. 예의상 다른 기억은 훔쳐보지 말고, 딱 악마와 관련된 기억만 지워. 아, 그리고.”

    에르제가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악마와 어떻게 계약하게 되었는지, 그건 무조건 알아봐 봐.”

    “예, 로드.”

    곧 라하임은 집중하기 시작하고, 에르제는 기감을 넓혀 망을 보았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여기로 오지는 않겠네.’

    어떻게 이런 구석진 곳으로 자신을 알아서 끌고 온 건지, 에르제는 제 발로 잡힌 먹이를 보듯 기절한 문휘영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라하임이 약속한 5분의 시간이 흐르고.

    “로드, 끝났습니다.”

    “응. 고생했어.”

    라하임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축 늘어진 문휘영의 어깨 밑으로 팔을 집어넣어 그를 들어 올렸다.

    “이 녀석이 악마와 계약하게 된 건…….”

    “그건 조금 이따가 들을게.”

    아직 촬영 전이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그 이후에 듣는 게 나았다.

    어차피 차를 타고 가는 길엔 라하임과 자신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에르제는 턱으로 문휘영을 가리켰다.

    “이쪽은? 몸에는 별문제 없어?”

    “아, 이대로 조금 있으면 깨어날 겁니다. 정신에 손상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는 했는데, 아마 단발성 기억상실 정도는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 그…… 성 기억장애.”

    “예?”

    “아냐.”

    손을 내저은 에르제는, 그에게서 문휘영을 넘겨받아 벽에 기대앉은 자세로 만들어 주었다.

    “깨어나면 알아서 촬영장으로 돌아오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네가 대충 숨어서 별일 없는지 확인해 줘.”

    “알겠습니다.”

    라하임이 고개를 숙이자 에르제는 촬영장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걸음을 떼기 전, 라하임이 “아!” 하고 입을 열었다.

    “1장로와 관련해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에르제는 반쯤 떨어뜨린 발바닥을 다시 바닥에 붙였다.

    저번에 2장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라하임은 내부 배신자를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정신감정을 통해서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고, 그에 대한 결론으로 1장로의 개입을 추리한 상황이었다.

    1장로의 특수한 능력은, 라하임의 정신계로 잡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음.”

    에르제는 당시 보고받았던 내용을 떠올리며, 이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미 움직였을 테니까.”

    * * *

    1장로는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실패했네.”

    악마를 이렇게 빨리 찾아내서 처리할 줄이야.

    “그렇게까지 정신적으로 튼튼한 인간은 찾기 드문데 말이야.”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찬 1장로는 피가 담긴 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그것을 대번에 삼켜 넘긴 그는 입가를 닦아 내며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호화롭게 꾸며진 내부를 죽 둘러보았다.

    에이리스의 부탁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한 그는 현재 데 캄이 있던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데 캄은 투박한 생김새와 달리 예술적인 안목이 높았는지 1장로의 마음에도 딱 드는 곳이었다.

    데 캄의 체형에 맞게 조정되어 있어 의자 팔걸이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유일한 불만이었다.

    손을 뻗어 팔걸이를 탁탁 두드린 그는 이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에르제가 갑자기 드라마 촬영을 한다고 해서 너무 급하게 선택한 모양이야.”

    인간도, 악마도. 둘 모두 이렇게 쉽게 발각되고 처리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실수였다.

    “레이를 제물로 바쳐서 강림시킨 악마였는데, 조금 허무하긴 하네.”

    원래는 악마를 이용해 에르제의 움직임을 최대한 방해하려고 했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제는 대악마에게도 에르제가 서은우의 몸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을 거라는 것이다.

    “그들과 같은 악마가 전한 내용이라면, 순순히 믿겠지.”

    이쪽에서는 악마들이 사는 곳에 정보를 전달할 길이 없었고,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으니 말이다.

    “어쨌든, 에이리스에게 말은 해 줘야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1장로가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그보다 먼저 문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 나갈 생각이었기에, 1장로는 직접 문을 열고 노크를 한 이와 마주했다.

    목덜미에 긴 자상이 있는, 험상궂게 생긴 뱀파리스였다.

    “무슨 일이야?”

    “아, 1장로님을 뵙습니다!!”

    그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귀청 떨어지겠다.”

    “죄, 죄송합니다.”

    “그래서 왜? 에이리스가 나 찾았어?”

    “그건 아니고…….”

    그 뱀파리스는 조심스럽게 1장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가능하다면, 안에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흐유.”

    이럴 줄 알았으면, 문을 열어 주지 말고 그냥 들어오라고 할걸.

    고개를 저은 1장로는 그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잡은 팔을 위로 구부려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아치를 이룬 팔 밑으로 허리를 숙여 들어온 뱀파리스는 1장로가 문을 닫고 들어오자 방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었다.

    “……?”

    뭔 얘기를 하려고 저래.

    고개를 갸웃한 1장로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뱀파리스의 앞에 섰다.

    그는 손을 덜덜 떨며, 그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를 뱉어 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뱀파리스는 고개를 위로 확 젖혔다. 그에 따라 허리도 반쯤 위로 꺾였다.

    “끄으…… 으으으……!!”

    심상치 않은 광경이 펼쳐지자, 1장로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혹시나 에르제가 자폭하는 암살자를 보낸 건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폭발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허리를 꺾은 채 괴성을 지르던 뱀파리스의 주변에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을 뿐.

    곧 자욱한 연기가 아래로 가라앉았고, 뱀파리스는 회색 동공을 드러낸 채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뭐야…….”

    1장로는 온몸에 붉은색 기운을 뿜어내며,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를 따라 뱀파리스의 고개가 끼긱 움직였다.

    곧 뱀파리스의 입이 열리며,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널 만나기 위해 다소 거친 방법을 쓴 것을 사과하지.”

    “…….”

    1장로는 경계심을 최대한으로 올린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야?”

    “나는 모든 마녀들의 어머니이자 회색산의 주인이다.”

    “……대마녀? 대마녀가 왜 날…….”

    “에르제와 에이리스, 그들과 관련해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응할 생각이 있나? 물론, 에이리스에게는 말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후에.”

    ‘……나를 따로 불러낼 이유가 있나.’

    그러나 마녀들이 뱀파이어 쪽에 합류하면서, 힘의 균형이 틀어진 것도 사실.

    이미 에이리스에게 진실을 듣고 난 이후였기에 마녀들이 마음을 바꿔 먹는다면…….

    ‘꽤 유용할 것 같은데.’

    1장로는 긴 시간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언제, 어디서 보면 될까?”

    “그건 내가 몸을 차지한 이 녀석이 알고 있다. 응한 것으로 생각하지.”

    곧 뱀파리스의 몸이 옆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더 이상 대마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1장로는 에이리스에게 보고하러 가던 것을 멈추고, 쓰러지는 뱀파리스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의 볼을 손바닥으로 리드미컬하게 때렸다.

    “야, 말해 주고 기절해. 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