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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85화 (185/307)
  • 제185화

    185화

    악마는 자신의 이름을 ‘페이랍’이라고 밝혔다.

    악마들이 사는 곳의 동부 지역. 황폐하기 그지없는 곳에서 문휘영과 거래를 맺었다고.

    “……그래서, 뭘 찾았다고 하는 거지?”

    너, 찾았다. 찾았어.

    그림자 속에서 악마는 낄낄 웃어 댔다.

    “날 찾았다고?”

    그래!

    악마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혀를 날름거렸다.

    두 개로 갈라진 혀의 끝이 본인의 코 근처에서 흔들거렸다.

    대악마가 널 찾는다. 그래서 찾았다.

    악마의 눈이 길게 휘었다.

    혼탁한 놈의 눈동자가 뱀 같은 시선으로 에르제의 얼굴을 훑었다.

    맞다. 맞아. 네가 맞다. 확실해!

    악마는 기꺼워하며, 앙상한 팔을 파닥거렸다.

    ‘……이미 저쪽에는 날 찾았다는 얘기가 다 퍼졌겠는데.’

    하지만 도대체 자신을 찾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이들이 찾는 것은 뱀파이어 로드인 에르제일까 아니면 껍데기만 남은 서은우의 육체일까.

    그림자를 든 채로 고민하던 에르제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둘 중 뭐가 되었든, 그리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악마의 목표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귀찮아져.’

    대악마가 아닌 이상, 이런 일반 악마들 따위 수십, 수백이 오더라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대악마 바로 밑인 고위 악마까지는 내 선에서 해결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만약 고위 악마보다 더 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순히 본체가 아닌 인간의 육신에 강림했을 때에도 그토록 강력한 존재감을 뽐냈던 것이 대악마였으니까.

    ‘……만약 에이리스가 소환할 대악마가 날 찾고 있는 대악마와 같다면 더 큰일인데.’

    살육, 파괴, 혼돈. 그런 것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전, 그보다 더 전에 자신을 찾을 테니까.

    그림자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신이 자진 하차를 하라고 한 건 이들이 날 찾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나.’

    혹은 시간이라도 지체시킬 요량이었겠지.

    “……하.”

    에르제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아닌가.

    고위 악마 이상의 존재가 자신을 찾고 있고, 에이리스는 대악마를 소환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꿈을 통해 경고를 해 준 신조차도 같은 편이라고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오로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일족들, 그리고 방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토트윈 멤버들.

    같은 편이라고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이들뿐이었다.

    ‘본체를 이용해 악마 대륙 쪽에 연락을 이미 취했겠지.’

    뱀파리스들처럼 악마들도 힘에 굴복하고 강한 힘을 따르는 족속들이니까. 내려진 명령을 대충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르제가 얼굴을 구기고 있으니, 낄낄거리는 악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어쩔 수 없나.’

    에르제는 표정을 고치며 입을 열었다.

    “악마 페이랍.”

    왜? 무슨 볼일이지? 무슨 볼일일까?

    “너는 거래 상대를 잃었어.”

    악마는 조금 전의 에르제처럼 얼굴을 구겼다. 안 그래도 흉한 얼굴이 더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그래서? 그런데?

    “문휘영이 원했던 거래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뜻이지. 약속을 어긴 거야. 이곳에 강림한 악마가.”

    에르제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미끼를 물까?’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자신보다 오래 살지 못한 애송이 악마다. 어르고 달래는 시도를 해 볼 필요는 있었다.

    “날 찾았다고 보고한 거 잘못 봤다고 정정해. 그러면 문휘영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지.”

    싫다. 못 한다. 혼날 거야.

    “그냥 잘못 봤다고, 찾지 못한 것 같다고 보고하는데, 왜 혼나?”

    아니, 너는 모른다. 너는 몰라!

    단순히 보고 내용을 바꾸라는 말에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이 퍽 이상했다.

    아무리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이라고 해도, 악마가 이렇게까지 공포에 떠는 것은 보기 힘든데.

    “누가 혼내는데? 넌 악마잖아. 널 혼낼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을 텐데. 그러지 말고 나랑 재차 거래를 맺자고.”

    거래? 거래? 무슨 거래?

    “내가 원하는 대가는 네가 올린 보고를 정정하는 것. 그리고 너는 다시 문휘영에게로 돌아가서 거래를 완료하는 것. 충분히 거래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나?”

    ……아니. 아니야. 대악마님이 노하신다.

    걸렸다.

    눈빛을 바꾼 에르제가 빠르게 대답했다.

    “아무리 대악마라고 해도 널 혼낼 수는 없어. 너도 엄연한 악마잖아.”

    대악마는 미쳤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다!

    ‘대악마가 미쳤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에 에르제의 말이 딱 멈췄다.

    ‘그게 무슨 의미야.’

    그러나 그 말만 하고는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걸 묻는다고 제대로 알려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문휘영을 가지고 거래하는 것도, 저 상태라면 더 이상 진전이 없을 것 같았고.

    ‘……이 악마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그래서 조금은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대악마는 미쳤다! 마음에 안 들면 죽인다! 대악마는 미친 화……!!

    잔뜩 겁에 질려 아무 말이나 쏟아 내던 녀석의 몸이, 분명 그림자 속에 갇혀 나오지도 못하던 녀석의 몸이.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액체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림자를 뚫고 흘러나온 소량의 액체가 탁자 밑의 카펫을 적셨다.

    다행히 무색무취의 액체로 녹아내린 덕에 멤버들에게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에르제는 깜짝 놀라서 그대로 몸이 굳은 채 멍하니 그림자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악마가 이렇게 죽는 건…….’

    계약에 의한 사망이었다. 페이랍이라는 악마가 다른 누군가와 한 계약을 어겼기에 일어난 현상.

    지구에 강림한 분신뿐 아니라 본체까지도 녹아내려 죽었을 것이다.

    ‘무슨 계약을 어긴 거지?’

    혹시 마지막에 떠들어 대던 말 때문인가?

    대악마가 미쳤다는 사실을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그것도 아니면, 그것으로 유추되는 게 있기 때문인 건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대악마가 미쳤다는 말조차 처음 듣지 않았던가.

    잘라낸 그림자를 툭, 바닥에 떨어뜨린 에르제는 그대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어떻게든 그림자 안에 그 어리숙한 악마를 잡아 두어 작은 정보라도 캐내려고 했는데.

    페이랍은 자신의 예상보다 더 겁 많고 멍청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면, 그렇게 자랑스럽게 찾았다고 떠들어 대지도 않았겠지.

    “후우.”

    깊이 차오른 숨을 뱉어 낸 에르제는 휘영청 따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밤의 일족인 그들을 늘 지켜 주고 앞을 밝혀 주던 달이었는데, 오늘따라 그 거리가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닿을 듯하지만, 절대 닿을 수 없을 것처럼.

    에르제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그림자를 집어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이건 라하임을 시켜서 안전한 곳에서 소각시키는 게 낫겠지.’

    또다시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맞이하는 것은 아주 질색이니 말이다.

    ‘정보를 캐내는 거 말고, 그냥 그 남사스러운 춤이라도 잘 출 수 있게 해 달라고 거래를 할 걸 그랬나.’

    후회 가득한 표정을 지은 에르제가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구겨졌던 잠옷 상의가 허리 밑으로 흘러내렸다.

    부엌으로 가서 냉수를 들이켠 그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 * *

    같은 시각.

    제이는 새로운 동아줄이 되어 줄 이와 만나고 있었다.

    평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마녀의 한 장로로부터 오늘의 만남을 주선 받은 덕분이었다.

    “스읍, 푸우.”

    대마녀는 긴 파이프 담배를 손에 든 채, 입에서 매캐한 연기를 뿜어냈다.

    그러고는 흥미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로 제이를 응시했다.

    “애송이가 이렇게 날 독대하는 기회는 흔치 않아. 그렇기에 주어진 시간도 그리 많지 않고.”

    대마녀는 옆으로 거의 눕다시피 한 상태로 빨리 본론이나 꺼내라는 듯 손짓했다.

    그 무례한 태도에 눈살을 찌푸릴 만도 했지만, 그녀와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제이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자질구레한 인사치레는 집어치워. 나는 빙빙 돌려 말하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해. 무슨 뜻인지 알지?”

    “네. 알겠습니다.”

    언뜻 에르제와 대마녀가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 제이는, 그녀의 요청대로 바로 본론을 꺼냈다.

    “마녀 회의를 소집하신 뒤, 뱀파이어를 도와주기로 했다는 것은 장로님께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랬지. 그 소식을, 에이리스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치지 않았다는 것은 칭찬해 주마. 어차피 에이리스도 머지않아 알았을 이야기지만.”

    “감……사합니다.”

    얼떨결에 칭찬을 받은 제이의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 뒤부터 할 말이 그가 그녀를 찾아온 진정한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심호흡을 한 제이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대마녀님께서는 뱀파이어 로드 에르제를 도와 에이리스를 제거할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글쎄? 에이리스를 제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둘 다 그냥 사라져 주면 좋겠네. 그럼 어중이떠중이들만 남을 테니.”

    대마녀가 파이프 끝으로 제이를 가리켰다.

    “너 같은 놈들 말이야.”

    “하…… 하하.”

    모욕적인 언사에도, 제이는 그저 어색하게 웃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저 걱정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에이리스를 제거한 뒤 에르제가 그녀와 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요?”

    “뱀파이어들은 그럴 위인이 못 돼.”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조급한 그의 말투에 대마녀가 코웃음을 쳤다.

    “애송이 주제에 날 흔들어 보겠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기는. 너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에르제라고 해도, 뱀파리스인 너보단 훨씬 믿음이 가지.”

    쯧 하고 혀를 찬 대마녀는 파이프를 툭툭 털어 냈다.

    “시간만 버렸군.”

    그녀는 짜증이 잔뜩 어린 얼굴로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이의 행동에 그녀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일까?”

    대마녀는 자신의 앞에 넙죽 엎드린 제이를 보며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제이는 고개를 더욱 바닥에 밀착시켰다.

    “계약, 계약을 맺겠습니다.”

    “…….”

    제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에르제, 에이리스. 둘 다 위험한 녀석들입니다. 대마녀님이 절 도와주신다면 그들이 서로를 죽인 뒤에…….”

    “죽인 뒤에?”

    “제가 책임지고 남은 이들을 대마녀님 밑으로 복속시키겠습니다.”

    “풉.”

    대마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 밑으로 복속? 그런 건 전혀 필요가 없어. 마녀들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거든.”

    그녀는 웃느라 나온 눈물을 닦아 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둘 모두 없어지면, 어디 한 군데 눈치 볼 필요가 없어져서 편하기는 하겠네. 우수 고객을 잃는 것은 좀 가슴 아프겠지만 말이야.”

    대마녀는 엎드린 제이의 앞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날 찾아와서 단순히 도와 달라는 말이나 하려고 한 건 아닐 테고. 당연히 구체적인 계획도 그 알량한 머릿속에 담아 왔겠지. 한번 들어 볼 가치는 있겠네.”

    반듯하게 세워진 검지가 제이의 이마를 쿡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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