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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84화 (184/307)

제184화

184화

다른 배우들의 촬영이 끝나고 난 뒤, 이제 에르제의 차례가 돌아왔다.

간단하게 혼자 찍거나, 다른 배우들과 합을 맞추는 장면이었다.

강현규라는 캐릭터는 범인이자 연쇄 살인마.

그러면서 형사들과 같이 여동생의 복수를 하겠다며 범인을 쫓는, 이중인격의 행태를 보이는 캐릭터였고.

드라마의 마지막 즈음에서 범인임이 밝혀지며 사실 이중인격이었다는 것이 반전 요소로 등장할 예정이다.

즉, 연기의 난이도가 굉장히 높은 배역이었고.

문휘영은 자신의 연기력을 증명하기 위해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배역이었다.

저 X끼만 아니었어도.

‘저 X끼만 아니었어도.’

머릿속에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 문휘영은 에르제를 노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딴 형사 부하 역할이나 하지는 않았을 텐데. 죽여 버릴까.

‘내가 이딴 형사 부하 역할이나 하지는 않았을 텐데. 죽여 버릴까.’

문휘영은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떨었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미친 듯이 치밀어 오르다가 갑자기 아무 생각도 없이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다.

에르제만 보면 감정 기복이 널뛰기를 하니, 이제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아, 제발.’

조금 전까지 자신이 하던 생각을 떠올리며, 문휘영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머릿속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고개를 빠르게 털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내 생각이 아니다. 이게 다 빌어먹을…….

나 때문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낄낄낄낄 웃는 소리가 머리에 왕왕 울렸다.

“아윽……!”

순간 몰려오는 두통에 문휘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떠들어 댔다.

나와 거래를 한 건 네 의지야. 이제 와서 발을 빼면 곤란하지.

목소리는 경고하듯 음정을 낮게 깔았다.

녀석의 자리를 빼앗아 달라면서? 죽여서 뺏을까? 뭐가 좋을 것 같아?

‘그런 적 없어.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문휘영은 고개를 세차게 털며, 허리를 반으로 숙였다.

‘난 그런 거래를 한 적이 없어……!!’

속으로 부르짖은 문휘영이 허리를 숙인 채 고개만 돌려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꼴을 보니, 다시금 속에서 증오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아, 그래. 뭐든 상관없어. 오늘 넌 원하는 걸 얻게 될 테니까. 물론, 나도 너에게서 대가를 받아 가겠지만.

낄낄낄낄!!

문휘영의 그림자가 아주 잠깐 일렁였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아……. 아아……. 그래.’

문휘영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입꼬리를 쓱 올렸다.

과하게 올라간 입꼬리 틈으로 송곳니가 보일 정도였다.

‘오늘 나는 원하는 걸 얻는다.’

* * *

‘단단히 홀렸구나.’

에르제는 문휘영의 표정 변화를 보고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림자 안에 숨어든 것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문휘영에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녀석의 상태를 보아하니 지성을 가진 무언가가 숨어든 모양이고, 그렇다면 ‘그 무언가’는 정신적으로 괴롭히면서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문휘영을 조종할 테니 말이다.

에르제는 뒷짐을 지고 문휘영을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라면, 그림자에 숨어 있다고 해도 그 힘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텐데…….’

그렇다는 것은 그림자 안에 숨어든 녀석의 힘이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다는 뜻.

굳이 신이 자신에게 자진 하차까지 요구하며 경고할 정도는 아니다.

‘……음.’

입술을 비죽 내민 에르제는 일단 녀석의 정체부터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곧 문휘영도 촬영 준비를 끝냈는지 지정된 장소에 위치했고, 이어서 감독의 큐 사인이 들렸다.

에르제는 곧바로 눈빛을 바꾸고 모자를 고쳐 썼다.

그리고 모형 칼을 들고, 피해자를 향해 여러 번 내리그었다.

쓰러져 죽어 가는 피해자를 바라보며, 다시 칼을 높이 들어 올렸을 때.

문득 느껴진 기척에 에르제가 고개를 옆으로 스륵 움직였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골목에 문휘영이 서 있었다.

녀석은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르제는 그를 무시한 채, 피해자의 가슴에 칼을 깊이 찔러 넣은 뒤 그대로 뽑아냈다.

위를 향해 핏줄기가 높이 치솟았다.

문휘영이 “안 돼!!! 이 개X끼야!!”라며 고함을 질렀다.

‘……개X끼에 진심이 담겨 있는데.’

묘한 기분을 느끼며, 에르제는 감정을 다잡고 굽혔던 무릎을 폈다.

손 안에서 칼을 휘리릭 돌린 에르제가 문휘영을 마주 보고 섰다.

달려오는 문휘영, 그리고 역수로 칼을 쥔 에르제.

‘지금.’

에르제가 정확한 타이밍에 문휘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 아, 없다. 없어!!”

그 순간 제자리에 멈춘 문휘영이 몸을 뒤적이다가 자신에게 테이저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고는 조금 전보다 더 큰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일부러 저러는 건가.’

그리고 에르제는 그 속도를 맞춰 쫓아가면서 생각했다.

원래 문휘영이 도망가기로 한 루트가 조금 변해 있었다.

일직선으로 달려도 되는 길을 굳이 곡선을 그려 달아나고 있었으니까.

문휘영이 가는 대로 쫓아야 하는, 에르제의 힘을 빼놓기 위함이 분명했다.

‘무슨 꿍꿍이야.’

그러나 인간이 뱀파이어의 체력을 이길 수는 없는 법.

마스크를 끼고 있었음에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에르제와, 넘어갈 듯이 숨을 헐떡거리는 문휘영의 모습은 비교가 됐다.

문휘영은 뒤가 막힌 골목에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가로등이 불을 비추고, 문휘영의 그림자가 에르제 쪽을 향해 뻗어 있었다.

‘아직 거기 있구나.’

에르제는 인간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포착하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림자 안에 숨어든 녀석은 지금 상황에서 자신을 공격하지 못하겠지만.

‘난 아니야.’

배우는 애드리브를 할 수 있으니까.

에르제는 문휘영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천천히 거리를 좁혀 놈의 그림자 앞까지 다가왔다.

길게 늘어져 있는 그림자 덕분에 둘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다.

원래는 이대로 문휘영에게 돌격해 칼을 휘두르고, 녀석은 자신의 팔 아래로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문휘영의 어깨 쪽에 자상이 생길 예정이었다.

그러나 에르제는 그림자 앞에서 쪼그려 앉았다.

“뭐, 뭐야?”

당황한 문휘영이 벽에 몸을 더욱 밀착시키며 대본에도 없는 대사를 읊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르제는 쪼그려 앉은 채로 그림자 위에 칼을 순식간에 꽂아 넣었다.

빠르게 끌어올린 매혹의 힘이 묻어 있는 칼날이었다.

그것이 그림자에 닿자, 곧 칼 손잡이에서 녀석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

그리고 에르제는 그것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까득, 이를 깨문 에르제는 문휘영을 노려보았다.

‘설마 거래까지 한 건가.’

아니, 거래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루어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만약 그랬다면, 저렇게 인간의 육신을 유지하고 있지는 못할 테니까.

‘착한 뱀파이어는 어딜 가든 고생한다고 하더니.’

어느 장로의 말을 떠올리며, 에르제는 놈의 기운이 느껴지는 부분만 골라 칼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이 장면이 어색하게 보이지 않도록 찌른 부위를 말없이 하나씩 가리켰다.

마치 널 이렇게 잔인하게 죽일 것이다, 라고 선전포고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때문에 문휘영은 대본과 다른 에르제의 행동을 보며, 진짜 사이코패스인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빠르게 작업을 끝낸 에르제는 칼을 주워 들고 문휘영에게 돌격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커어어엇!!”

감독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케이!!”

오케이 사인도 그 뒤를 따랐다.

* * *

모든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에르제는 다른 멤버들이 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눈을 떴다.

조용히 거실로 나오니, 새벽녘의 달이 은은하게 거실을 비추고 있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 에르제는 품 안에 넣어 두었던 그림자 조각을 꺼내 들었다.

숙주가 없음에도 그림자 조각은 그림자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에르제는 그것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촬영은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네.’

사실 무사히 넘어갔다는 말로는 부족한 결과물이 나오기는 했다.

‘언제 그런 애드리브를 생각했어?! 내가 모골이 다 송연해지는 기분이던데??’

오히려 사이코패스 범인의 성격을 아주 잘 드러낸 것 같다면서 과한 칭찬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강석구나 손유진 같은 배우들도 아낌없이 칭찬해 주었다.

결론이 자꾸 진짜 사이코패스 아니냐고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딱히 좋지는 않았지만.

‘좋은 일을 하고 욕을 먹는 기분이 이런 걸까.’

왠지 모르게 모락모락 피어나는 섭섭한 감정을 하나도 숨기지 않은 에르제는 검은 그림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처음 칼로 이것을 찌른 직후, 에르제는 이것이 ‘악마’라고 확신했다.

악마 특유의 기운과 더불어서 숙주였던 문휘영을 가지고 놀던 그 모습까지. 카테이아 대륙에서 보았던 악마들과 매우 흡사했다.

‘보통은 의식 같은 걸 하지 않는 이상, 인간계로 넘어오는 일이 없는데.’

살고 있는 차원이 다르니 애초에 악마들이 오래 머물지도 못하니까.

그래서 암암리에 불공정 계약이라 불리는, 거래를 통해서 인간의 몸에 기생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런 쪽으로 지식이 있을 리 없는 지구의 인간이 악마와 거래를 맺고 현세로 악마를 소환해 냈다?

어불성설이었다.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에르제는 눈을 감고, 검은 그림자 위에 손바닥을 대었다.

대악마가 아닌 일반 악마는 뱀파이어 로드인 자신보다 약하다.

따라서 이대로 로드의 힘을 퍼붓는다면, 이 안에 꽁꽁 숨어 있는 녀석이 모습을 드러낼 거란 뜻이었다.

매혹의 눈, 그리고 로드의 힘. 그것들이 에르제의 손바닥 안에서 뭉쳐지며 그림자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그림자 안은 수십, 수백 배나 넓었다.

그래서 있는 대로 로드의 힘을 때려 부으려던 순간.

고통을 참을 의지가 없는 것인지 몇 분도 되지 않아서 녀석이 먼저 나타났다.

너, 나만 똑 잘라서 가지고 나왔구나. 아쉽다. 아쉬워. 거래가 파기됐어.

악마는 그렇게 말하며, 그림자의 겉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의 크기에 맞춰 아주 작은 사이즈로 나타났는데, 흔하게 볼 수 있는 악마의 형태였다.

대충 기워 입은 듯한 옷과, 머리에 달린 커다란 산양 뿔, 뒤틀린 납작한 얼굴 그리고 쭈글쭈글 주름진 피부.

이름 있는 악마도 아닌, 그저 저들의 세계에서는 돌멩이처럼 흔한 악마.

에르제는 녀석을 가만히 노려보며 물었다.

“어떻게 이 세계에 오게 된 거지? 문휘영과는 무슨 거래를 했을까?”

그러나 악마는 대답 대신 낄낄 웃었다.

뭐가 그리 웃긴지 배꼽까지 잡아 가면서.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협박을 하기 직전.

악마가 웃음을 뚝 멈추고, 히죽 웃었다.

찾았다. 찾았어. 확실하다. 확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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