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183화
뱀파이어는 자는 동안 꿈을 꾸지 않는다.
아주 오랜 시간 영면에 드는 뱀파이어들에게 꿈을 꾸지 않는 것은 하나의 큰 축복이었다.
그 긴 시간, 그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서은우의 몸에 들어온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영혼이 아닌, 뱀파이어의 영혼이 들어와서일까.
에르제는 지구에 온 이후에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았었다.
그러나 뱀파이어 내에 배신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그날.
에르제는 아침에 퀭한 눈으로 일어나, 이불을 말아 쥐었다.
“꿈…….”
그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난생처음 겪은 현상에 혼란스러워했다.
“내가 꿈을 꿨어……?”
“꿈꿨다는 말이 그렇게 의문형으로 끝나야 하는 일이야?”
옆에서 들려오는 태현우의 목소리에 에르제가 식겁하며 몸을 돌렸다.
그 와중에 벽에 머리를 부딪쳤지만, 에르제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 뭐 해?”
“뭐 하긴. 너 깨우고 있었잖아.”
태현우가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에르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네가 자다가 그렇게 뒤척이는 건 처음 보기는 하네. 맨날 양손을 가슴에 올려놓고 시체처럼 잤는데 말이지.”
“내가…… 뒤척거렸어?”
“응.”
태현우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에르제의 눈동자에 혼란스러움이 더욱 가중되었다.
‘진짜 꿈을 꿨어.’
에르제는 마른세수를 하며, 앉아 있는 태현우를 피해 침대 밖으로 나왔다.
등 뒤에서 태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오늘 오전에 드라마 촬영 있다면서. 얼른 준비해라~.”
“알았어.”
그렇게 대답하고 욕실 안으로 들어온 에르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희미해.’
꿈이라는 것은 완전 기억 능력에 의해서도 복원되지 않는 건지, 희미한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에르제는 눈을 거의 감다시피 한 채 차분히 꿈의 내용을 떠올렸다.
흐릿해진 기억 가운데에서도 선명한 부분들이 남아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빛나던 빛, 그리고 어디선가 들어 보았던 낯익은 목소리.
차근차근 목소리의 흔적을 좇아가자, 단어들이 조합됐다.
‘명심해라. 그리고 기억해라.’
에르제의 눈이 반개했다.
‘피해라. 드라마 촬영. 자진 하차하라. 위험하다.’
신…….
낯익은 목소리는 신의 것이었다.
이번에는 축복이 아니라 꿈에 등장해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은 모양이다.
선신인지, 악신인지도 모를 그 신이.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 벌컥 하고 욕실 문이 열렸다.
안에 에르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들어온 윤치우였다.
“미친.”
윤치우는 황급히 문을 닫고 나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에르제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은우야! 정신 차려!”
“……?”
반개하고 있던 에르제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며 윤치우의 얼굴이 보였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탓에 그가 들어오는 것도 모른 모양이었다.
“……어.”
에르제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자, 윤치우가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너 방금…….”
윤치우가 화장실 문 쪽을 바라보더니, 그쪽으로 가서 문을 잠갔다.
“방금?”
“하아…….”
에르제가 되묻자, 윤치우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너 방금 몸에서 막…… 빛이 났어.”
“……빛이 났다고?”
윤치우가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검은빛?”
“아니. 하얀색. 형광등 색.”
윤치우가 화장실에 켜져 있는 불을 가리켰다.
에르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왜 내 몸에서 나와?”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해?”
에르제는 가만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으나, 지금은 윤치우의 말처럼 빛이 나오고 있지는 않았다.
‘검은 기운. 로드의 힘이 아니라 밝은 빛이 나왔다고?’
설마 꿈에 신이 나타난 걸 떠올려서 그런 건가? 신의 목소리를 떠올려서?
‘……일단 꿈 내용을 기억해 냈으니까 다시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윤치우의 말대로라면, 언제 몸에서 또 빛을 내뿜을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윤치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멤버들은 아니야. 안 그래도 저번 일 때문에 현우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화장실에 들어온 게 내가 아니었다면…….”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이 윤치우가 얼굴을 구겼다.
그러나 에르제는 헛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애초에 노크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온 네 잘못이야. 다른 사람들은 안에 내가 있다는 걸 알고 들어오지 않은 걸 수도 있잖아.”
“은우야.”
윤치우는 정론에 찔리는 표정을 짓는 대신, 표정을 더욱 굳혔다.
“방금 네 몸에서 나던 빛, 화장실 문 틈새로 비쳤어. 그래서 안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들어와 본 거고.”
“음.”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앞으로 조심할게.”
“……알았어.”
윤치우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방금 그 빛은 뭐야?”
“몰라.”
“……모르면 안 되지 않아? 다음에 사람 많은 데서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 위로 올렸다.
“모르지만, 빛을 내지 않는 법은 알게 됐어.”
“……그게 무슨 소리야.”
윤치우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이제.”
윤치우는 화장실 바닥을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은우도 아니고……. 은우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윤치우는 에르제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입술을 깨문 채 욕실 밖으로 다시 나갔다.
“…….”
서은우의 영혼이 소멸되거나 최소 다른 세계에 있다고 했던 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던 걸까.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던 에르제는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조금씩, 발견하지 못한 곳에서 균열이 커져 가는 기분이었다.
“하.”
헛웃음을 흘린 에르제는 다시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껍데기, 서은우의 얼굴이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만약 네가 살아 있다면……. 넌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세면대 위에 올려 둔 에르제의 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
* * *
에르
제는 5, 6화 촬영을 위해 드라마 촬영장을 찾았다.
감독과 배우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에 에르제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곳에 앉아 촬영 준비를 하는 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르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야외 촬영이라 맑은 하늘이 잘 보였다.
‘……거기서 지켜보고 있는 겁니까?’
에르제는 꿈에 나왔던 신을 떠올리며 물었다.
‘드라마에서 자진 하차를 하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뭐 때문에 위험하다고 하는 겁니까.’
재차 물었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에르제는 푸석푸석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려 바닥을 바라보았다.
발끝으로 흙바닥을 차자, 모래 알갱이가 위로 튀어 올랐다.
“아!”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문휘영이 모래 알갱이 4개를 맞고 이쪽을 신경질적으로 바라보았다.
“너 일부러 그랬지?”
에르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설마 저게 위험해서 피하라는 건 아닐 텐데.’
도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아니, 심지어 촬영 도중에 어떻게 갑자기 자진 하차를 하라는 건가!
자진 하차를 하기 위해서는 없던 논란이라도 만들어 내야 하는 거 아닌가?
‘논란 만드는 건 자신 없는데.’
그렇게 에르제가 장 대표가 들었다면 기겁할 만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니, 문휘영이 씩씩대며 서 있었다.
“야!”
상대는 반말을 찍찍 뱉어 대고 있었으나, 고결한 피의 일족인 자신은 체통을 지켜야만 했다.
“왜요?”
“왜요? 왜요, 라는 말이 입에서 나와?”
그럼 할 말이 없는데.
그래서 에르제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문휘영의 얼굴이 더욱 시뻘겋게 변해 갔다.
덕분에 할 말이 생긴 에르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술 마셨어요?”
“안 마셨어!”
“얼굴이 엄청 빨간데, 그럼 열 나는 건가?”
“열 나는 게 아니라 열받은 거지!”
“왜요?”
결국 도돌이표로 대화가 반복되자, 문휘영은 답답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네가 나한테 흙 뿌렸잖아!”
문휘영의 목소리가 꽤 컸는지, 근처를 지나가던 스태프들이 수군수군하며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흙을 뿌렸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었으므로, 에르제는 당당히 대답했다.
“저는 땅을 발로 찼는데, 그곳을 지나던 문휘영 씨가 맞은 것뿐이에요. 우연히 벌어진 일이에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진짠데.”
하지만 문휘영의 눈을 보니,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근처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스태프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정신적으로 한참 성숙한 자신이 한 발 물러나는 수밖에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에르제는 한 손을 아래로 내리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우연히 일어난 사고에 제가 대신 사과하겠어요.”
까득, 이빨을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문휘영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깔끔하게 사과를 하니 할 말이 없는가 보다.
현명하게 대처를 했다고 생각하던 에르제의 시야에 문휘영의 그림자가 보였다.
‘……?’
에르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림자와 문휘영을 비교해서 살펴보았다.
분명 평범한 그림자처럼 보이지만, 그 크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마치 무언가가 그림자 안에 있는 것처럼.
그러나 해가 뒤쪽에 떠 있어서 문휘영의 몸 뒤로 그림자가 펼쳐져 있는 상태였다.
‘……지금은 확인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무엇보다 문휘영의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서 그림자를 밟아 보았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하, X나 어이없네.”
결국 문휘영이 그 말을 남기고 떠나갈 때에도 에르제는 그저 가만히 그림자만 노려보았다.
‘저거 때문에 신이 피하라고 한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결국 직접 확인을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에르제는 오늘 찍어야 할 촬영 내용을 떠올리며, 허벅지 위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오늘은 문휘영과 같이 찍는 신이 있었다.
범인이 살인하는 장면을 문휘영이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고, 범인이 도망가는 그를 추격하는 장면이었다.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쫓아야 한다고 하니, 그림자를 밟아 볼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문휘영이 과하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고.’
살짝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에르제의 귀로, 곧 촬영을 시작하겠다는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