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82화 (182/307)

제182화

182화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감사합니다.”

“물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제발.”

“그건 좀…….”

하얀과 녹음실에서 나눈 대화는 이런 양상이었다. 별다른 걸 하지 않았는데도 정신적으로 몹시 지치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하얀의 소속사까지 와서 녹음할 필요도 없었는데…….’

원래는 그냥 모카 엔터테인먼트에서 따로 피처링 부분만 녹음하면 됐다.

그 이후에 나중에 라이브 연습이나 안무 연습을 할 때만 보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굳이, 부득이, 아득바득! 하얀은 자신을 이곳에서 녹음하게 만들었다.

― 같은 녹음실에서 녹음하고, 같은 프로듀서가 봐줘야 곡이 사방팔방으로 튀지 않아요!

……라는 이상야릇한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장 대표는 괜히 연애설이 나지 않을까 걱정하긴 했으나, 하얀의 개인적인 팬심이라고 매니저가 열심히 설득한 모양이었다.

매니저이면서 하얀의 고집은 꺾을 수 없는 듯했다.

달칵―.

녹음실에 들어선 에르제는 연습해 온 부분을 흥얼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헤드셋을 끼고 콘덴서 마이크 앞에 서자, 작곡을 도맡아 한 프로듀서가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일단 하얀이에게 맞춰진 솔로곡이라서 남자 파트여도 음정이 꽤 높아요. 피치 떨어뜨리지 말고, 음정 정확히 찍는 걸 위주로 불러 주세요.”

“네.”

어느덧 대부분의 음악 용어에 익숙해진 에르제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에르제는 몸을 일자로 만들고 턱을 살짝 아래로 당겨 노래할 준비를 마쳤다.

유리 너머에서 고개를 끄덕거린 프로듀서는 “일단 앞 두 마디부터 갈게요.”라고 말하며 곡을 재생시켰다.

하얀의 솔로곡, 그리고 에르제는 그 위에 피처링을 하는 것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에르제의 파트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3분의 1은 그의 파트라고 봐도 될 정도였으니까.

그는 하얀이 부른 파트를 들으며 가볍게 몸으로 리듬을 탔다.

‘잘하네.’

이곳에 오기 전에 혹시 몰라서 루비다이아의 노래를 들어 봤는데, 하얀은 그중에서도 메인 보컬인 만큼 준수한 가창력을 지니고 있었다.

서큐버스 특유의 매료의 힘이 도움을 준 것도 맞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발성이 탄탄하고 음색도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목소리랑 잘 어울리네.’

가볍고 부드러운 자신의 목소리와, 카랑카랑한 하얀의 목소리는 상반되는 매력을 보여 줄 수 있을 듯했다.

머릿속에서 구상을 마친 에르제는 일부러 톤을 조금 더 가볍게 만들어 노래를 불렀다.

― 도망갈 수 없게

붙잡을 수 있게

나는 Chaser.

우린 더 Closer.

‘Chaser’는 곡의 제목처럼, 불같이 타오르는 남녀의 사랑 노래였다.

사랑을 좇는 남자와 잡힐 듯 말 듯 하는 여자의 이야기.

에르제는 전반적인 가사를 머릿속에서 하나의 그림으로 그리며, 그대로 노래에 녹여 냈다.

그리고 지난 시간 음유시인으로서의 경험치가 헛되지 않았다는 듯.

“좋았습니다. 다음 부분 가 볼게요.”

프로듀서는 다시 불러 보자는 말도 없이, 에르제의 녹음을 한 번에 끝냈다.

“와우!”

프로듀서는 녹음실에서 나오는 에르제를 향해 손을 높이 들어 박수까지 쳐 주었다.

하얀은 양 엄지를 세워 주었고 말이다.

“믹스를 잘 쓰시네요.”

프로듀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딱히 뭐 손댈 게 없네요. 같이 들어 보면서 다시 녹음하고 싶은 부분만 따로 말해 주세요.”

“알았어요.”

에르제의 대답에 프로듀서는 하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평소에 다른 남자 아이돌은 관심도 없고 보컬리스트들만 좋아하더니, 하얀이가 왜 팬이라고 하는지 알겠네.”

“헤헤, 그렇죠?”

배시시 웃는 하얀을 보며, 에르제는 반대로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는 자신을 서큐버스 퀸으로 오해하고 있으니 그랬겠지만, 거기에 노래를 잘한다는 것까지 더해진 모양이다.

그래도 자신을 열심히 챙겨 주려는 것만 제외한다면, 예상보다 힘들지 않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에르제의 착각이었다.

녹음은 무난하게 넘겼지만, 아직 안무가 남아 있었으니까.

에르제는 안무의 시연을 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이렇게 남사스러운…….’

에르제가 동공 지진을 일으키거나 말거나, 안무 선생으로 온 이는 “참 쉽죠?” 같은 헛소리나 하고 있었다.

“그……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이건 너무…….”

“응? 왜요?”

“터치가 너무 많지 않나…….”

“에이~.”

안무 선생은 손을 내저으며 폭소를 터뜨렸다.

“요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은우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순수하시네.”

그는 다시 한번 중요 포인트를 짚어 주며 말했다.

“이번에 안무 만들어 준 팀이 섹시함을 아주 잘 살렸어요. 여기서 이렇게 손, 그리고 시선은 이쪽.”

그대로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에르제는 일단 안무를 외웠다.

‘……처음에 이곳에 와서 토트윈의 안무를 봤을 때보다 더 충격적이야.’

그러나 외운 것과 실제로 추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

꽤 오랜 시간 춤을 봐주던 안무 선생이 안타깝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거의 각목 수준이네. 은우 씨 무대 영상 보니까 춤도 잘 추던데……. 오늘 혹시 컨디션이 안 좋아요?”

“그건 아니고…….”

에르제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냈다.

“수위가 너무 높아서…….”

“아이고.”

안무 선생이 당황하며 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

“은우 씨 뱀파이어 아니에요?”

“……네?”

“그, 에르제였나? 응, 뱀파이어 로드 에르제.”

‘그걸 어떻게……?’라고 생각하던 에르제는, 이내 토트윈의 콘셉트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무 선생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본인이 뱀파이어가 됐다고 생각해 봐요. 퇴폐적인 느낌으로, 유혹하듯이.”

그러고는 제일 하기 힘든 안무를 선보인다.

‘……뱀파이어는 안 그래.’

오히려 고결하고 신사적이란 말이야.

그런 말이 목젖까지 차올라 왔지만, 에르제는 그것을 꾹 눌러 참았다.

‘역시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는 법.

이제 와서 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만두겠다고 하면 하얀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열심히…… 해볼게요.”

결국 지킬 수 있을지 모를 약속을 하며, 에르제는 고개를 푹 숙였다.

* * *

겨우겨우 안무 지옥에서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길.

운전대를 잡은 라하임이 혼이 빠져나간 듯 보이는 에르제를 슬쩍 쳐다보았다.

“오늘 어떠셨습니까?”

“…….”

“그 하얀이라는 아이는 서큐버스라고 들었는데,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까?”

“…….”

그러나 에르제는 멍하니 차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을 뿐.

입맛을 다신 라하임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는 좋은 미끼가 있다.

“로드, 카페라도 들러서 당 보충하시겠습니까?”

“응. 그럴래.”

“알겠습니다.”

라하임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차선을 변경했다.

라하임이 토트윈의 매니저로 들어오고 난 뒤, 이렇게 둘만 나오는 스케줄이 있을 때.

그럴 때마다 둘은 이윤 몰래 카페를 가거나 인스턴트 음식을 사 먹었다.

법카를 사용하지 않고 개인 돈을 쓰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그렇게 라하임이 카페에 들르고, 에르제는 가만히 차에 앉아 그가 주문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번에 그가 먹고 싶다고 한 것은 ‘오후의 정원에서 갓 따온 새콤달콤 딸기 요거트’였는데.

그것도 저렇게 춤을 춰 가면서 주문을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아, 춤.’

멍하니 라하임이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던 에르제가 얼굴을 구겼다.

내내 온갖 망상을 하며 안무 연습을 하던 순간을 잊고 있었는데, 저것 때문에 되새김질이 됐다.

톡―.

차창에 머리를 박은 에르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멤버들한테 도움을 좀 받아야 하나…….’

막 허리를 붙잡거나, 얼굴을 가까이하는 이런 안무들을 도대체 어떻게 추라는 건지!

심지어 얼굴을 마주 보는 상태에서 씩 웃으란다.

“으.”

빠르게 고개를 털어서 안무 연습을 하던 기억을 날려 보내고 있으니, 곧 라하임이 음료를 받아서 차에 올라탔다.

그가 내민 음료를 받아 들고, 한 모금 쭉 빨아들이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오후의 정원은 싱싱한 딸기를 키우는 모양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방문할 수 있는지 알아볼까요?”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고개를 저은 에르제는 입안에 요거트를 가득 넣은 뒤 꿀꺽 삼켰다.

그의 표정이 흐물흐물 풀어지는 것을 보며, 라하임이 흐뭇한 얼굴을 했다.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덕분에.”

라하임은 로드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며,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에르제가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음료를 다 마실 수 있도록 속도를 낮춰 운전을 했다.

그렇게 요거트를 음미하며 숙소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지이잉―!

급작스럽게 스마트폰의 진동이 울리면서, 내비 대신 사용하고 있던 라하임의 스마트폰 화면에 전화 표시가 떴다.

“……바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라하임은 습관적으로 보고하며, 스피커 폰 상태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라하임 님. ]

“무슨 일이지? 내가 분명 업무 시간에는 전화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 그것이, 심각한 상황이라서. ]

“심각한 상황?”

[ 예. ]

심각한 상황이라는 말에 에르제의 귀가 쫑긋했다.

지금 자신에게 하얀과 같이 춤을 추는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있을까?

에르제가 목을 쭉 뺐다.

곧 무슨 일이냐고 묻는 라하임의 말에 바란의 대답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 2장로가…… 저번에 잡아 오셨던 2장로가 죽었습니다. ]

“……뭐?”

“!”

라하임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고는 동시에 에르제와 눈을 마주쳤다.

“로드, 이건…….”

“…….”

에르제는 턱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다시 아래로 내렸다.

“라하임.”

“예, 로드.”

“내가 쳐 둔 결계를 뚫은 뒤에 네가 만든 문까지 뚫고 들어올 수 있는 뱀파리스가 있을까?”

“……에이리스 말고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현재 에이리스는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즉, 외부에서 만든 결과가 아니라는 뜻.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야.”

“……내부라고 하시면?”

라하임이 조심스럽게 묻자, 에르제가 턱으로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아직 바란과의 통화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

라하임이 “다시 연락하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통화 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

“배신자…… 혹은 처음부터 우리 편이 아닌 이가 섞여서 들어왔겠지.”

“……하지만 일족들을 제외한 나머지 뱀파이어는 제가 하나하나 확인을 했는데…….”

“그래서 문제야.”

정신과 관련한 술법에서 라하임보다 위인 뱀파이어는 없었다.

즉, 라하임이 개별적으로 확인해서 문제가 없었다면 정말 문제가 없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은.

“네가 확인하지 못한 뱀파이어가 있는지 확인하고, 그 이후 새로 들어온 녀석들은 없는지 확인해.”

“예, 로드.”

“그리고 바란, 그 녀석은 계속 주시하고 있었지?”

“예. 바란이 움직였다는 보고는 없었습니다.”

“그럼 녀석의 그…… 친위대인가 하는 것들이 벌인 일일 수도 있어.”

에르제의 이마에 깊은 골이 생겼다.

“숙소에 도착하고 난 뒤에 너는 바로 그쪽으로 가 봐.”

“알겠습니다, 로드.”

라하임은 굳은 얼굴로 대답하고, 액셀을 강하게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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