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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80화 (180/307)

제180화

180화

에르제의 드라마 ‘1년(One Year)’은 누군가를 죽이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윤은 대본을 보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글로 봤는데도 엄청 잔인하네. 괜찮겠어?”

“이미 연습 다 했어요.”

“연습? 누구랑?”

“태현우랑요.”

“……그러니까 어째 더 불안해지냐.”

에르제는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태현우와 안단테는 평소에도 콩트로 연기를 자주 하는 편이었다.

이윤은 민망한 나머지 그 사건을 기억에서 지운 모양이지만, 에르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에 연기에 깜빡 속았잖아요.”

그때 에르제가 맡았던 역할은 형사.

피해자 발견 시간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었다.

“아.”

그리고 이윤도 그날을 떠올렸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그건 그거고, 연기랑은 다르지.”

“그래도 연습 상대로 나쁘지는 않았어요. 워낙 열정적으로 해 줘서.”

“하기야 현우가 열정 빼면 시체이기는 하지. 걘 에너지가 어떻게 그렇게 매일 넘치는지 몰라.”

“젊잖아요.”

이윤이 황당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다시 걱정 모드로 돌아왔다.

“아무튼 모자 푹 눌러쓰고 찍는 거라 얼굴은 다 안 나온다고 하는데……. 여기 이거 지문 보이지. 무표정하게 칼로 찌른다, 이거 잘해야 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걱정을 어떻게 안 하겠냐?”

이윤이 멀리서 대본을 넘기고 있는 문휘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놈이 너 대놓고 깠잖아.”

아아, 그거 때문이었나.

“오늘 촬영 너 때문에 망쳐 봐.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할걸.”

그 말에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 위로 올렸다.

이윤과 장 대표는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근데, 대본 더 안 봐도 돼?”

“다 외웠어요.”

“지금 찍을 부분? 혹시 모르니까 오늘 찍는 부분 다시 한번 들여다봐.”

“아뇨.”

에르제는 곧 촬영에 들어간다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들고 있는 거 전부 다요.”

그 말에 이윤이 대본을 만지작거리며 ‘어?’ 하는 표정을 지었고, 에르제는 당당하게 카메라 앞으로 향했다.

극중에서 에르제가 맡은 배역의 이름은 강현규, 첫 등장부터 자신의 여동생을 죽이는 살인마였다.

“누구세요……?”

여자는 집 안에 들어온 강현규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강현규의 여동생이었으나, 그를 알아볼 리 없었다.

푹 눌러쓴 모자와 검은색 마스크 때문이 아니었다.

강현규와 그의 여동생은 어렸을 때 헤어진 사이이기 때문이다.

배다른 남매이자 하나뿐인 아버지를 죽게 만든 동생. 강현규의 첫 살인은 복수로 시작됐다.

“왜, 왜 이러는 건데!!”

강현규는 피해자의 절규에도 죽이는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칼을 찔렀다.

얼굴에 피가 튀는 순간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윽고 숨이 멎었을 때, 그는 비로소 손에 든 칼을 멈추었다.

“…….”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오케이 컷!”

총 8번의 NG를 낸 뒤에야 감독의 만족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NG를 낸 이유는 다름 아니라.

― 은우 씨! 핏방울 튀는 것 좀 그만 봐!

피에 자꾸 반응을 해서였다.

붉은 색소로 피처럼 만들었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눈동자가 자꾸 반응을 했다.

무표정을 한 채 바닥에 있는 표시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데,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이거나 가끔 턱까지 따라가기도 했으니 말이다.

“너는 정작 네 얼굴에 튀는 피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면서 옆으로 튀는 건 왜 이렇게 쳐다보는 거야.”

이윤은 얼굴 닦으라며 수건을 내밀고 그렇게 타박을 했다.

아까워서, 라고 대답하려던 에르제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얼굴을 닦았다.

에르제가 말이 없으니, 대답 듣는 것을 포기한 이윤은 다른 주제를 꺼냈다.

“다음 촬영은 1시간 반? 그 정도 뒤라고 하더라.”

“그래요?”

“어어. 주인공 쪽 배우들은 한 번에 쭉 촬영하면서……. 우리도 바쁜데.”

왜 이렇게 우리 애한테는 시간 배치를 거지같이 해 줬는지 따지고 싶다는 감정이 이윤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에르제는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 연기하는 거 보고 있으면 돼요.”

“……차에서 쉬거나 그러지 않아도 돼? 내가 밖에 있다가 불러 줄게.”

“괜찮아요.”

에르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가만히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온몸으로 표현했지만, 안타깝게도 이쪽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거의 없었다.

“에이씨, 병풍 세우는 것도 아니고.”

아주아주 작은 이윤의 투덜거림을 들으면서 에르제는 강석구와 손유진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그들의 첫 장면은 살해 현장에 온 것부터 시작되었다.

둘은 참혹한 살해 현장에서도 침착하게 현장을 파악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복이나 원한 관계에 의한 것일 수도 있어.”

“확실히 자상의 수를 보니 그럴 가능성이 높겠어요, 선배.”

그리고 에르제는 그들의 연기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마치 TV로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추리 드라마를 좋아하는 에르제였기에 더욱 흥미진진하게 봤다.

‘카테이아 대륙에서 본 연기랑은 확실히 달라.’

그곳에서는 조금 더 과장하는 편이었다.

억양과 톤 그리고 감정을 싣는 방식이 달랐다.

‘자연스러움……. 그걸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구나.’

저번에 했던 더빙과, 사이비 교주의 연기는 과장이 꼭 필요한 요소였고 또 그것이 잘 먹혔으나.

이번에 하게 된 연기는 아무래도 자연스럽고 현실적으로 해야 할 듯싶었다.

‘숙소에 가면 무튜브로 연구해 봐야지.’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들이 하고 있는 연기를 따라서 해 보았다.

“칼을 저렇게 버젓이 놓고 갔다는 건 지문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겠지.”

“칼을 저렇게 버젓이 놓고 갔다는 건 지문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겠지.”

에르제가 먼저 대사를 치고, 그 뒤에 강석구의 연기가 이어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국과수에 일단 들고 가 봐. 뭐라도 나오겠지.”

이번에도 똑같은 대사가 이어지자, 이윤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에르제와 옆에 놓여 있던 대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은우야.”

“네?”

“다 외웠다는 거, 진짜였어?”

“저는 거짓말 같은 거 안 해요.”

“다른 사람 대사까지 다 외운 거야?”

“네.”

“……하긴 네가 외우는 거는 원래 잘했지.”

가사나 춤 그런 것들도 한 번 보면 바로 외우지 않았던가.

‘우리 애는 천재인가?’ 이윤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어.’

문휘영이다.

에르제의 눈에 저번에 시비를 걸었던 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연기 지적을 했던 만큼, 실제로 괜찮은 연기를 보여 주었다.

강석구나 손유진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기는 아니었지만, TV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이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는 됐다.

그는 강석구의 후배 형사 역할을 맡았는데, 중간중간 주고받는 티키타카도 꽤 재미있었고.

“야! 똑바로 안 해!?”

손유진한테 혼나는 장면에서도 뱉은 말을 책임질 수준은 되었다.

“어휴, 저것도 연기라고.”

물론 이윤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긴 했지만 말이다.

“은우야, 이따가는 어? NG 한 번도 내지 말고 완벽하게 알았지.”

왜 저격을 당한 건 자신인데, 주변에서 이렇게 열을 내는지 모르겠다.

숙소에서 멤버들도 그러지 않았던가.

다들 콧대 확실히 눌러 주고 오라고 그랬다.

― 정 안 되면, 노래로 붙자고 해.

현실파 민주혁이 그렇게 분해하며 말했던 것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

에르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난 뒤에, 이윤이 원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바로 문휘영과 에르제가 둘이 같이 나오는 장면을 촬영하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문휘영이 에르제의 곁에 서서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야, 발목 잡지 마라.”

“발목 잡는 장면은 없는데요?”

“?”

“?”

“그게 그 뜻이 아니고…….”

“자, 슬레이트 치겠습니다!”

문휘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금세 풀었다.

“네!”

싹싹하게 대답한 문휘영은 에르제 쪽으로 눈을 한 번 흘기고는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원래 일방통행은 힘든 법이지.’

에르제는 대인배의 마음으로 그의 태도를 용서하며, 길거리 구석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

지금 찍어야 하는 장면은 최초 발견자인 강현규를 데리러 오는 양해원(문휘영)과 합을 맞추는 장면이었다.

에르제는 쪼그려 앉은 자세로 금세 감정에 몰입했다.

지금 자신은 범인이 아닌, 여동생이 누군가에게 처참히 살해당한 오빠 역할이었다.

오랜 시간 배다른 남매를 찾아 헤맸으나, 이미 죽어 버린 여동생을 발견한 최초 목격자.

‘정신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인간.’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에르제는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에르제가 준비된 것을 확인한 문휘영이 저벅저벅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에르제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강현규에 몰입한 에르제는 문휘영 역시 양해원이라는 캐릭터에 몰입하게 만들어 주었다.

“최초 목격자 맞으시죠? 잠깐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

“……선생님?”

강현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양해원,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강현규의 눈동자에 광기가 맺혔다가 사라졌다.

“……으윽.”

강현규가 머리를 감싸 쥐고, 양해원은 그런 그를 빠르게 부축한다.

“괜찮으세요?!”

“괜찮…… 괜찮습니다.”

비틀거리던 강현규가 그렇게 대답하며, 손을 파르르 떨었다.

반대편 손으로 그것을 꽉 잡은 강현규가 거칠어진 숨을 토해냈다.

“제가, 제가 최초 목격자 맞습니다.”

“네, 일단 진정부터 하시고…….”

양채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일단 진정부터 하시고…….”

상체를 숙인 채 그에게 기대고 있던 에르제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돌아갔다.

문휘영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하시고…….”

‘대사를 까먹었나?’

에르제는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애드리브로 기침을 콜록콜록하면서 상체를 더욱 숙였다.

“괜찮으세요?!”

문휘영이 아까와 같은 대사를 치며 다시 한번 에르제의 상체를 한 손으로 감쌌다.

둘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에르제는 문휘영이 아직도 대사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에르제가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문휘영이 원래 쳤어야 하는 대사였다.

‘진정부터 하시고. 혹시 마실 거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

그러나 문휘영은 고마운 표정을 짓기는커녕,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러고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의 이마에는 힘줄까지 솟아 있었다.

“후우.”

문휘영은 뜨거운 숨을 뱉어 내며, 에르제를 옆으로 살짝 밀쳤다.

밀려난 에르제가 무슨 일인가 해서 그를 쳐다보고 있으니, 문휘영은 감독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사를 까먹었습니다. 한 번만 다시 확인해도 괜찮을까요?”

“그래요. 조금 전에 둘 다 연기는 좋았으니까 대사 확인하고 바로 갑시다.”

“네, 감사합니다!”

감독에게 크게 대답한 문휘영은 싸늘한 얼굴을 에르제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건방지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그러고는 놓아 둔 대본을 가지러 자리를 잠시 떠났다.

“…….”

그런 그의 태도에 에르제는 표정을 굳혔다.

기껏 몰래 알려 주었더니,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아무리 연적으로 여긴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한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다.

박쥐는 지렁이보다 훨씬 크다.

그러니까 꿈틀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3단 논법에 의해 완벽하게 생각을 마친 에르제는, 다음 주에 문휘영과 찍을 신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지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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