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179화
에르제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서 바로 찾지는 못했지만, 이내 심술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였더라.’
에르제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했다.
주연 배우는 아니고, 조연들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완전 기억 능력에 의존해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걸 보니, 그리 중요한 배역이 아니거나 연기가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에르제가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선배를 보고도 고생했다, 수고했다, 그런 말 한 마디도 안 하네.”
“야! 네가 어떻게 선배냐, 인마.”
그의 말에 강석구가 헛웃음을 흘리며 핀잔을 주었다.
“은우는 아이돌이고, 휘영이 너는 배우인데.”
“아이돌은 무슨.”
휘영이라고 불린 젊은 인간 남자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아이돌이 연기하러 왔으면 배우지. 형도 마찬가지잖아요. 첫 데뷔는 가수로 했으면서.”
“어휴.”
강석구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연기 잘하는 거지, 인마. 괜한 트집 잡지 말고 얼른 들어가. 매니저가 찾겠다.”
“아직 유진이 누나하고 말도 못 했어요. 인사는 하고 가야죠. 누구처럼 저렇게 쳐다보고만 있을 거 아니니까. 하여간 아이돌들 매번 연기 판에 와서 물 다 흐린다니까.”
“야, 문휘영.”
“거 같은 가수 출신이라고 그렇게 티 나게 챙겨 주지 맙시다. 배우 후배 배 아파요. 실력으로 해야지, 실력으로.”
문휘영은 에르제를 한 번 더 노려보고는 이내 자리를 피했다.
‘사회에 불만이 많은 자인가?’
에르제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고 있으니, 강석구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무시해. 내가 저놈 배우 되기 전부터 친해서 잘 아는데, 저거 질투 나서 그래.”
“질투요?”
오늘 자신이 그를 질투 나게 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나도 선배님들 인사하러 가야겠다. 적당히 고생하셨습니다~, 라고 인사하고 들어가, 너도.”
“네. 다음에 봬요.”
“응~.”
강석구가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고, 에르제는 제자리에 남겨져 생각에 잠겼다.
‘이윤이 다른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라고 했는데.’
만약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굉장한 잔소리 지옥에 빠질 것이다.
에르제는 가슴을 폈다.
‘나는 성숙하니까.’
인간의 질투 정도는 가볍게 넘어가 줄 수 있다.
‘그런데 뭘 질투하는지 알면 좋을 텐데.’
거의 반대편까지 이동한 문휘영을 보며, 에르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그가 했던 말을 곰곰이 되뇌었다.
‘앞에서 했던 말은 딱히 그런 뉘앙스가 없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문휘영이 강석구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챙겨 주지 말라고, 배 아프다고.
이제는 배 아프다는 말이 진짜 배가 아프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에르제의 눈이 천천히 강석구에게 가서 닿았다.
‘그랬던 거였군.’
정(情)에 의한 질투였다니.
‘이건 내가 잘못한 게 맞네.’
아직은 일방통행인 듯하니,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몸가짐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확실하게 해 두자.’
결심을 한 에르제는 곧장 문휘영에게 다가갔다.
“뭐야?”
이제 막 이야기를 끝낸 참인지, 문휘영이 다가오는 그를 발견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에르제의 마음은 이미 평온함 그 자체.
문휘영이 어떤 생각에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미 이해한 뒤였기 때문이다.
에르제는 문휘영의 양손을 포개고 그 위를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었다.
“뭐, 뭐 하는 건데?”
에르제는 빼내지 못하도록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러고는 당황한 그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했다.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뭔 소리야, 갑자기.”
“조심하도록 할게요.”
에르제는 싱긋 웃으며, 그의 손등 위를 탁탁 두들겨 주었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
“아니, 그러니까…….”
그러나 에르제는 문휘영의 대답을 듣지 않고 자리를 떴다.
문휘영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문을 열고 나가는 에르제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친놈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는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털었다.
“힘은 왜 이렇게 세. 손 아파 죽겠네.”
* * *
대본 리딩이 있고 며칠 뒤, 에르제는 장 대표의 호출에 대표실을 찾았다.
대표실에 들어가니, 장 대표가 힘없이 손을 들어 올려 인사를 해 왔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이 무언가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에요?”
“응. 무슨 일이야.”
장 대표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은우야, 소속사 대표라는 자리는 뭐라고 생각하니?”
“음.”
에르제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장 대표는 대표를 한 지 얼마나 됐어요?”
“엄청 오래됐지. 갑자기 그건 왜?”
“그렇게 오래 했는데, 그걸 아직도 모르나 싶어서요.”
“……내가 그걸 진짜 몰라서 너한테 물어본 거겠니?”
장 대표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엄청나게 많아. 그중에서 제일 신경 쓰고 있는 게 너희들이고. 이유는 알지?”
“아, 마이너스의 손이요?”
묵직한 팩트 폭격에 장 대표가 잠시 벙찐 표정을 지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넌 말을 해도 꼭…….”
고개를 저은 장 대표가 입술을 뗐다.
“아무튼, 소속 가수들 관리하는 과정에서 내가 제일 신경 쓰는 게 여론이야.”
“마이너스의 손 때문에요?”
“야……!”
장 대표가 아픈 곳을 찔린 사람처럼 이마를 손으로 탁 짚었다.
“하아……. 아무튼 그래서 이런 게 나오면 아주 신경이 쓰인다는 뜻이지.”
장 대표는 스마트폰을 에르제에게 내밀었다.
“이거 뭔 이야기인지 알아?”
언제 또 이런 걸 찾아보고 있었던 건지, 커뮤니티 사이트 등지에서 떠도는 글의 캡처본이었다.
‘……음.’
에르제는 캡처 된 사진을 옆으로 넘겨서 보며 입술을 말아 넣었다.
문휘영의 개인 SNS에 올라온 글 하나와, 그의 팬들이 단 댓글들, 그리고 그와 관련되어 퍼진 글들이었는데.
내용은 그랬다.
연기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돌 하나가 들어와서 물을 흐렸다, 선배한테 인사도 잘 안 하더라 등등.
“자기네 소속사 대표한테 혼난 건지 매니저한테 혼난 건지는 모르겠다만, 글은 바로 내렸더라. 그런데 중요한 건 이미 본 사람들이 있다는 거지. 그래서 지금처럼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고.”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자, 장 대표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곧 사람들도 알 거야. 문휘영이랑 트러블이 있었던 게 너라는 거.”
“그렇군요.”
“……넌 뭐 이렇게 태평하냐?”
“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에요.”
“그래, 부럽다.”
장 대표가 하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대본 리딩에 가서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문휘영, 이 자식이 이런 글을 올려?”
“강석구 배우는 연기 잘한다고 칭찬해 줬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도 다 잘했어요.”
에르제가 말을 이상하게 하거나 상식이 부족한 부분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장 대표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는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 달리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그냥 싫어하는 건가?”
하긴, 아이돌이 연기를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배우들도 많으니까.
그래서 그런 건가 싶어 장 대표가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짐작 가는 게 있어요.”
에르제의 말에 장 대표가 목을 뒤로 뺐다.
“정말? 짐작 가는 게 있다고 하면 내가 더 불안해지는 건 알지?”
“장 대표가 불안해할 만한 일은 아니에요. 저번에 제 선에서 잘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문휘영 배우한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나 봐요.”
“뭐, 뭔데?”
“음, 그러니까.”
에르제는 잠시 말을 고르고서 대답했다.
“문휘영이 누구를 좋아하는데, 그 누구가 저를 좋아해요. 하지만 저는 그 누구와 문휘영을 둘 다 좋아하지 않아요.”
“그게 뭔 소리야?”
“말 그대로인데요?”
“그러니까.”
장 대표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문휘영이 누굴 좋아하고, 그 누구가 널 좋아하고, 너는 둘 다 안 좋아한다고?”
“오, 정확해요.”
이렇게 뛰어난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에르제는 순수하게 놀랐다.
그러나 장 대표는 머리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뭐지? 삼각관계? 그런 건가?”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에르제에게 물었다.
“그 누구가 여자 배우야? 설마 손유진? 손유진 배우가 너 좋아한다고 했어?”
“아뇨.”
“그럼, 누군데?”
“여자가 아닌데요.”
“…….”
장 대표의 다크서클이 조금 더 진해졌다.
결국 혹시나 싶어 홍보 팀까지 움직여 볼까 했던 고민은 촬영이 끝나고 첫 방영이 될 때까지 그저 고민으로만 남아 있었다.
* * *
대학생은 그녀의 오빠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혔다.
“아, 또 왜?”
“우리 은우가 TV에 또 나온단 말이야. 당연히 이브면 생방송으로 봐 줘야지.”
“나 이브 아니라고.”
“토트윈 팬이잖아. 그럼 이브지.”
“거기 카페 가입도 안 했는데, 내가 왜 이브야.”
그녀의 오빠가 투덜대기는 했지만 소파에 무사히 착석했기에 대학생은 싱글벙글한 웃음을 유지했다.
“그렇게 좋냐?”
“응!”
대학생의 오빠는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서은우 요즘 TV에 많이 나오네.”
지금도 그렇다.
알바 몬스터 시즌 2 방송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드라마 황금 시간이라는 10시 타임에 또 나오니 말이다.
덕분에 오늘 하루 종일 대학생은 바깥에 나가지도 않고 TV만 주야장천 보고 있는 중이었다.
대학생은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운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이번에 은우 나오는 드라마, 캣플릭스에도 올라온다잖아.”
대학생은 양 손바닥을 한데 모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거야.”
“뭘?”
“은우가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하고 연기도 잘한다는 사실을.”
“……드라마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겠냐?”
“드라마를 보고 은우한테 빠지면 당연히 토트윈 영상까지 찾아보겠지, 멍충아.”
대학생은 눈을 흘기다가 이내 TV에서 나오는 화면을 보고 오빠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여러 번 내리쳤다.
“아파!!”
“시작한다!”
오빠의 고통은 깔끔히 무시한 채, 대학생은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평소 드라마에 관심도 없었으면서.”
“원래 팬이라면 시청률도 다 챙겨 주는 법이야. 이제 조용히 해.”
“…….”
대학생은 소파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화려한 초반 오프닝을 바라보았다.
미스터리 추리극이라더니, 벌써 BGM부터가 의미심장한 느낌을 주었다.
곧 오프닝이 끝나고.
‘1년(One Year)’이라는 드라마 제목이 검은 바탕에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