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178화
“요즘은 별문제 없지?”
“네. 활동도 잘하고 있고, 음원 순위도 예상보다 잘 나오는 중입니다.”
“좋아, 좋아. 콘서트가 확실히 잘 먹혔네.”
“그런 것 같습니다.”
장 대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야?”
“아.”
이윤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번에 괜찮은 스케줄 하나가 들어와서요. 대표님께 말씀드리려고요.”
“오, 그래? 네가 괜찮다고 하는 건 오랜만에 들어 보는데.”
장 대표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무슨 스케줄인데?”
“두 개인데요. 하나는 ‘모자이크 싱어’에서 섭외 요청이 들어왔고, 다른 하나는 드라마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모자이크 싱어? 그 얼굴 가리고 노래 대결을 하는 거?”
“네.”
“모자이크 싱어랑 드라마……. 둘 다 같은 애한테 들어온 거야?”
“네. 은우요.”
“……은우는 지금 ‘알바 몬스터’도 하고 있잖아.”
장 대표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모자이크 싱어는 현우가 나가도 충분할 것 같은데. 일이 너무 한쪽으로만 쏠리는 것도 안 좋으니까. 그건 내가 그쪽 PD하고 이야기해 볼게.”
“아, 넵.”
일 하나 덜어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윤은 재빨리 PD의 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런 후, 장 대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드라마는 뭐야? 또 카메오인가?”
“아뇨. 거의 주연급 조연인 것 같던데요? 이번에 새롭게 편성될 예정이라고 하던데, 작가도 김지안 작가님이고…….”
“김지안 작가?”
장 대표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무수한 그녀의 유명작들을 떠올리고는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무조건 해야지! 흥행 보증수표 아니야?”
“작가 이름 보고 시청하는 분들도 많으니까요. 그렇다고 봐야죠.”
이윤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카메오 연기가 무척 인상 깊으셨나 봐요.”
“설마…….”
장 대표가 상체를 뒤로 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또 사이비 교주 이런 건 아니지? 저번에 그거 이상하게 합성한 짤 많이 돌아다니던데.”
“사제복 잘 어울린다고 합성한 거라……. 사실 좋은 반응이기는 했는데.”
하하, 웃은 이윤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이비 교주는 아니에요. 애초에 현실 추리극이라고 하더라고요.”
“현실 추리극?”
“네, 요즘 유행하는 장르요. 미스터리, 추리 그런 키워드들이요.”
“아아.”
장 대표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입술을 떼었다.
“그래서, 은우 배역은 뭔데?”
* * *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은우야. 가서 최선을 다하고, 다른 배우분들 보면서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우고.”
이윤이 차의 시동을 끄며 같은 말을 13번째 반복했다.
“무슨 말인지 알지?”
끄덕끄덕, 하품을 하며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서는 그렇게 하품하지 말고.”
이윤이 불안하다는 눈으로 에르제를 바라보다가 안 되겠다는 듯 그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하품할 거면 미리 하고 들어가.”
“이건 체할 때 하는 거 아니에요?”
“몰라, 나도.”
이윤의 재촉에 어이없다는 듯이 웃은 에르제는 이내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대본 리딩이 있는 날.
제작진 측과는 그 전에 미리 인사를 나누었으나, 같이 출연하게 될 배우들은 오늘 처음 본다.
‘지서후는 없는 것 같고.’
혹시나 지서후가 이번에도 추천을 해 주었나 싶었으나, 그는 이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는다.
‘저번에 했던 연기로 눈에 들었나.’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본 리딩 장소로 들어갔다.
배우로서 경력이 거의 없는 에르제였기에, 일부러 이윤이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고.
때문에 에르제보다 먼저 도착한 배우는 한 명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아, 반갑습니다.”
그는 상당히 나이가 든 남자였는데, 조연으로는 꽤 유명한 편이라고 했다.
“서은우예요.”
“임지성이라고 합니다.”
임지성은 에르제와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는, 이내 다시 본인의 대본에 집중했다.
에르제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곳에 앉은 뒤, 대본을 뒤적거렸다.
그러고 있으니, 곧 감독과 작가 그리고 다른 배우들도 하나둘씩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에르제는 그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는데, 그중에서 작가가 제일 만족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역시, 캐스팅 디렉터님이 서은우 씨 강력 추천할 때부터 저도 느낌이 딱 왔는데. 극중 캐릭터랑 정말 찰떡이네요.”
“열심히 할게요.”
김지안 작가는 에르제의 손을 맞잡고 몇 번 흔들고는 본인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렇게 최종 인원까지 모두 모이고 난 뒤, 감독이 입을 열었다.
“일단 1부부터 3부까지 나와 있어서 그중 핵심적인 부분만 해 볼 예정입니다. 리딩 중간중간에 의견 나눌 시간도 있으니 자유롭게 발언해 주시면 되고요.”
“알겠습니다.”
배우들은 익숙해서인지 금세 대본 리딩 장소의 분위기에 적응했다.
‘음.’
모든 것들이 처음인 에르제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움직였다.
“2페이지요.”
감독의 말에 따라 리딩을 해 볼 구간이 정해지고, 배우들은 실제 연기를 하듯 대사를 읊었다.
지문에 나온 대로 가볍게 몸을 쓰기도 하고, 대사를 칠 때에는 순식간에 몰입해서 연기를 했다.
‘……다들 잘하는구나.’
아직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모습을 열심히 구경하던 에르제는 속으로 감탄했다.
특히나 주연을 맡은 형사 역할의 ‘강석구’, 그리고 같은 형사 동료인 ‘손유진’의 연기는 확실히 결이 달랐다.
똑같은 대사를 쳐도, 사람들을 확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카테이아 대륙의 연기와 다른 점이 많아.’
저번에는 카메오 촬영이라 이런 것들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에 에르제는 빠르게 그들의 노하우를 습득해 나갔다.
보는 것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에르제 또한 그간 다양한 경험을 쌓았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
이윽고 20분가량 흐르고, 에르제의 차례가 돌아왔다.
드라마상으로 1화 마지막, 에르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에르제가 맡은 역할은 주연급이라고 불러도 좋을 조연.
범인의 역할이었다.
물론, 범인임을 알고 있기에 범인이라고 하는 것뿐이지 시청자들은 드라마의 끝부분에 가서야 그가 범인임을 알게 될 터였다.
‘……그러니까 초반에는 시청자들조차 의심할 수 없게 연기해야 해.’
의심이 가는 대사를 하더라도, 절대 범인으로 여기지지 않도록 말이다.
신의 첫 대사는 강석구의 입에서 나왔다.
“목격자는 따로 없는 겁니까?”
“네. 최초 발견자만…….”
손유진의 대답에 머리를 헝클어뜨린 강석구가 에르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초 발견자가 피해자 오빠라고 했죠.”
“네. 얘기 나눠 보시겠어요?”
강석구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유진이 기다리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녀가 에르제를 데려오는 동안 의도적인 침묵이 흐르고, 손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데려왔습니다.”
“……최초 발견자시라고?”
“……예.”
겨우 쥐어짜낸 듯한 에르제의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가득했다.
강석구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가 금세 사라졌다.
“제발, 제발 제 동생 죽인…… 범인 좀 잡아 주세요. 형사님.”
에르제가 강석구의 소매를 붙잡듯 손을 뻗었다.
“예, 예. 알겠으니까 이것 좀 놓으시고.”
강석구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내뱉고는, 이내 심각한 말투로 다시 바뀌었다.
“일단, 진정하시고.”
“네……. 네.”
“혹시 괜찮으시다면 처음 동생분을 발견하셨을 때 특이한 점이나 이상했던 점이 있었는지 기억하실 수 있겠어요?”
“그건…….”
에르제는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듯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피가 워낙…… 방 전체에 흘러서…… 모르겠어요.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천천히, 진정하세요.”
“아아……. 아아…….”
에르제는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다가 이내 팔뚝 밑에 드러나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아.”
조금 전에 뱉어 내던 ‘아’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팔 사이에 숨겼던 머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잠깐의 광기가 눈동자에 비쳤다가 사라졌다.
“하나, 하나 이상한 게 있었어요.”
“……!! 말씀해 주세요.”
“…….”
“…….”
그리고 그렇게 신이 끝났다.
1화의 마지막 장면이었기에 이곳에서 대본 리딩을 끝맺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내 다음 장면으로 리딩이 이어졌고, 정확히 1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끝이 났다.
‘생각보다 지치네.’
주연은 아니었기에 에르제의 등장 장면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실제 범인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드라마 초반에는 노출도를 줄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워낙 몰입했던 탓에 정신적으로 지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그것 때문에, 배우들이 우울증 같은 거에 더 잘 걸린다고 하던데.’
어깨를 으쓱한 에르제는 대본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기 전에 다른 배우들과 인사를 하고 가기 위함이었다.
‘음…….’
에르제는 벌써부터 짝을 지어 담소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직은 그들에게 자신은 이방인인 모양이다.
‘하긴, 예전에 더빙할 때도 그랬는데 여기가 더 심하겠지.’
그래서 오늘 진짜 촬영을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했는데, 인간들의 텃세는 어딜 가나 차이가 없나 보다.
‘인사 안 하고 가면 이윤이 또 잔소리를 하겠지.’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끝날 때를 노려야겠다.
볼을 긁적인 에르제는 가장 가까운 쪽으로 가서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에르제는 곧 그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잘 부탁드린다, 많이 배우겠다.
에르제가 미리 교육받은 대사들을 치면서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잘하던데?”
강석구가 그에게 다가오며 어깨를 툭툭 쳤다.
2,500년 넘게 산 자신에게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카테이아 대륙이었으면 진즉에 경호대의 제지를 받았겠지만, 이곳에서는 강석구의 나이가 자신보다 많다.
따라서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에르제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고고하고 우아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아하하, 재미있는 친구네.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강석구는 에르제의 인사를 따라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서후 형한테는 이야기 많이 들었어. 너랑 친하다고 하더라고. 아, 내가 너보다 나이는 4살 많으니까 편하게 해도 되지?”
이미 편하게 해 놓고 나중에 묻는 건 무슨 경우인가!
“아, 네. 그럼요.”
하지만 에르제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강석구는 그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장진규는 내 밑이고, 지서후는 나와 친구인데.’
그 둘보다 어리고, 종족도 인간인 강석구에게는 예를 다 해야 하다니.
슬프지만, 이것이 현실이로구나.
‘인성이 나빠 보이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그렇게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나는 쟤 연기 별로던데.”
코웃음을 치며 말하는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