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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77화 (177/307)
  • 제177화

    177화

    “흐응.”

    에이리스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빙빙 꼬며,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무릎도 꿇지 않았고, 거만한 자세를 취한 채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일렁이는 횃불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

    그러나 에이리스는 그런 무례를 지적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죽였을까?”

    “그러지 않았을까? 네 생각은 어떤데?”

    “글쎄~.”

    에이리스는 반대편 손으로 턱을 괴며 씩 웃었다.

    “에르제가 내 생각대로 움직여 준 적이 거의 없어서 잘 모르겠네.”

    “그럼 죽이지 않았다는 뜻이네.”

    “그럴지도 모르지~.”

    에이리스는 말끝을 길게 늘이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죽여 주면, 일이 훨씬 쉽게 풀릴 텐데.”

    그녀가 원하는 결말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 앞의 남자는 미동도 없이 대꾸했다.

    “나는 별로 관심 없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알고 있으면서 왜 날 부른 건데?”

    “관심 가져 주었으면 해서.”

    “말장난하는 건가.”

    에이리스는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심으로.”

    “…….”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네 부탁으로 1장로라는 거창한 자리를 맡고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나는 그런 것에 딱히 관심이 없어. 세계를 정복하겠다느니, 대악마를 소환하겠다느니 하는 것들 말이야.”

    “그런 게 아니라면?”

    “……?”

    1장로는 고개를 갸웃하며, 처음으로 에이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쓰고 있던 박쥐 가면의 틈으로 붉은색 눈이 번쩍였다.

    “무슨 뜻이야?”

    에이리스는 허공에 글자를 쓰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카테이아 대륙에 있을 때,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대악마를 소환한 적이 있었어. 너도 기억하지?”

    “기억하지. 내가 그때 경고도 했었는데.”

    “그랬지. 대악마를 소환하고 대륙이 파괴되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 이후에 일어날 수많은 악마의 잔재들이 문제를 일으킨다. 뭐 그랬으니까.”

    “그래.”

    1장로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이후에 나타난 미친 황제는 네가 한 짓이나 다름없다고.”

    “인정해.”

    에이리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미친 황제는 대악마 소환 이후에 탄생한, 악마들의 잔재니까.”

    “후우.”

    1장로는 고저 없는 에이리스의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도 이번에 또 비슷한 짓을 벌이려고 하니……. 내가 널 말릴 수만 있었어도 진즉에 말렸어. 그런데 나보고 관심을 가져 달라니.”

    그러나 에이리스는 픽 웃었다.

    “슬슬 말해 줄 때가 되기는 했지.”

    “뭘?”

    1장로의 질문에, 에이리스가 되물었다.

    “너, 미친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

    “……누군데?”

    “대악마.”

    “뭐?”

    1장로의 미간이 깊게 패었다.

    “대악마는…… 다른 종족들의 연합으로 되돌아간 거 아니었어?”

    “거의 소멸 상태까지 가기는 했지만, 되돌아간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아니, 놈은 돌아가지 않았어.”

    “그럴…… 수가 없을 텐데.”

    대악마의 영혼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입으면, 자연스럽게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강림할 때 빌려 썼던 몸은 그대로 소멸한다.

    즉, 아무리 돌아가기 싫다고 해도 남아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에이리스는 손가락을 한 개 펴 보였다.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지.”

    “……유일한 방법? 그런 게 있다고?”

    1장로가 고개를 저었다.

    “진짜로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다른 대악마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리가 없어. 그냥 네 착각…….”

    “착각 아냐. 진짜로 방법이 있어.”

    에이리스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좌우로 움직였다.

    “애초에 대악마에 들어온 영혼이 카테이아 대륙에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

    1장로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원래 대악마의 영혼은…….”

    “새롭게 들어온 영혼에게 소멸됐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야. 다른 대악마들이 왜 이 방법을 지금까지 쓰지 못했느냐고?”

    에이리스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영혼을 소멸시켜야 가능한 방법인데, 누가 그렇게 하겠어. 카테이아 대륙에서 내가 소환했던 케이스가 앞으로도 없을, 거의 유일한 일이었다는 뜻이지.”

    “……하.”

    1장로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박쥐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미친 황제가 대악마고…….”

    “응.”

    에이리스가 펴 두었던 손가락을 접으며 대답했다.

    “이번에 소환하는 건 대악마가 아니라 미친 황제가 될 거야.”

    “…….”

    “미친 황제가 지구에 온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에이리스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미친 황제 덕분인데, 은혜는 갚아야지.”

    “네가 정말로 은혜 갚는 성격은 아니니.”

    1장로가 뒷짐을 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대악마에게 묶여 있구나. 이곳도 놈이 보내서 온 거고.”

    “후후.”

    에이리스는 씁쓸한 웃음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까지 이곳에 같이 오게 된 것도 그래서야.”

    “……아.”

    1장로가 짜증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래서 관심 가져 달라고 한 건가.”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아니, 다른 뱀파리스들도 다 묶여 있는 거였어. 영혼의 소멸을 대가로.”

    에이리스가 어깨를 으쓱하자, 1장로가 가면 속에서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그럼 내가 뭘 해 줘야 하는데?”

    “원래는 지금처럼 뱀파이어 쪽에 있는 거로 충분했는데, 에르제가 내 계획을 생각보다 빨리 눈치챘거든.”

    에이리스가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두들겼다.

    “일단 제이가 죽었는지 확인 먼저.”

    “만약 죽지 않았으면?”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지. 에르제가 현재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여기게끔.”

    그렇게 말한 에이리스는 눈동자를 보라색으로 물들였다.

    * * *

    털썩―.

    제이는 LAK 숙소로 돌아와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꺾어 천장을 바라보았으나, 그런다고 갑갑한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후우.”

    턱을 들어 올린 채 한숨을 내쉬던 제이는 이내 맞은편에 있던 이채선을 바라보았다.

    “왜, 왜……?”

    이채선이 보고 있던 스마트폰을 슬쩍 치우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생각할 게 있으니까 자리 좀 비켜 줘.”

    “응……!!”

    이채선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치워 둔 스마트폰을 챙겨 방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이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잠깐만.”

    “…….”

    이채선이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를 천천히 뒤로 돌렸다.

    제이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스마트폰 줘 봐.”

    “왜……?”

    “수상하니까.”

    “아,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럼 줘도 문제없잖아?”

    까득, 이를 깨문 이채선이 감정을 간신히 숨기고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제이는 코코아톡과 메시지, 통화 목록을 빠르게 살폈다.

    “……봐 봐. 별거 없지?”

    “그러네. 별거 없네.”

    “그럼 나는 밖에 나가 있을게.”

    이채선이 스마트폰을 가져가기 위해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잡았다.

    그러나 제이는 말과 달리 스마트폰을 놓아 주지 않았다.

    “여기 태현이라는 친구만 빼면.”

    “어…… 어? 태현?”

    “너는 네 친구 이름도 몰라?”

    제이가 어이없다는 듯 이채선을 바라보자, 그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아, 알지! 친한 친구야. 태현이, 응.”

    “그렇구나.”

    제이가 반대편 손으로 대화창 안으로 들어가자, 이채선이 황급히 손으로 화면을 가렸다.

    “치워.”

    “친, 친구랑 개인적으로 나눈 이야기인데…….”

    “태현이란 친구가 여자애인가 봐. 친구인데도 오빠라고 부르고, 그렇지?”

    “어렸을 때! 응,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동네 소꿉친구 같은 사이!”

    이채선의 변명에 제이가 혀를 차며 스마트폰을 놓아 주었다.

    “태현을 아현으로 바꾸면 딱 맞네. 블링블링 소속 이아현.”

    제이가 이채선을 노려보았다.

    “내가 괜한 사건 만들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연애는 계약 끝나고 나면 네 맘대로 하라고 했고.”

    “연애 아니고, 그냥 썸…….”

    “어디서 썸 같은 소리를. 뭐가 달라?”

    싸늘한 제이의 말에 이채선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 안.”

    “나한테 미안할 일은 아니고, 나중에 팬들한테 공식 사과문 쓰기 전에 알아서 처신 잘해라.”

    “…….”

    이채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제이가 이마를 찌푸렸다.

    “뭐 해, 안 나가?”

    “응……!”

    이채선이 후다닥 방 밖으로 나가고, 제이는 닫힌 문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 잘 듣는 놈들만 모아 놔도 꼭 사고를 치려고 하니.’

    그러고 보니 저 자식, 에르제랑도 엮였었지.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제이는 에르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최근 대기실에서 만났던 그의 얼굴을.

    ― 죽여 볼까 고민 중이에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신을 죽일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고 말을 했었다.

    ‘진짜 죽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순간 느낀 위압감에 위축된 것은 조금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에르제도 눈치챘겠지.

    머리를 헝클어뜨린 제이는 이내 자신의 명치 부근을 손으로 쓸었다.

    혈석이 자라나고 있는 곳이다.

    ‘내가 힘을 얻은 건 사실 혈석이 강해지는 거라고 했지.’

    자신의 힘이 강해진 거라고 착각하기 쉬운 것도 혈석이 힘을 보내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이는 입술을 깨물며 에르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선배님을 지금 죽여서 혈석을 꺼내 간다면, 에이리스의 계획을 분명 늦출 수 있겠죠. 새로운 숙주를 구해서 또 혈석의 힘을 키워야 할 테니까.

    ― 하지만, 에이리스는 굳이 선배님을 시켜서 저에게 숙주의 정보를 흘리도록 했어요. 이게 무슨 의미일 것 같아요?

    그때 자신의 대답은 ‘모르겠다.’였다.

    솔직히, 당시에는 에이리스가 자신을 사지에 내몬 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 제가 선배님을 죽이길 바란다는 뜻인 거겠죠.

    에르제는 에이리스의 생각을 재빠르게 간파했다.

    ― 그리고 혈석은 제 안에서 새롭게 자라날 겁니다. 에이리스가 그렇게 만들어 두었겠죠. 혹시나 선배님이 죽더라도, 죽인 이에게 계승될 수 있게끔 조치를 해 두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도발을 했겠죠.

    그리고 그렇게 에르제에게 옮겨간 혈석은 녀석의 힘을 빨아들여 강해질 거라고 말했다.

    에이리스의 계획을 늦추기 위해 자신을 죽인다면, 오히려 계획의 진행이 훨씬 더 빨라지도록.

    그것도 에이리스의 걸림돌인 에르제를 숙주로 만들어서.

    당시의 대화를 떠올린 제이는 눈을 꾹 감았다.

    ‘나는 에이리스에게 언제든지 버려질 말이야.’

    그렇게 충성을 다했는데, 돌아온 것은 고작 장기말 취급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만약 에르제가 에이리스의 계획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시간이 흘러갔다면…….’

    자신은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고, 자신의 터전인 지구에 대악마를 불러들였겠지.

    꽉 쥔 주먹에 힘줄이 솟았다.

    ― 김지원을 연민 때문에 살려 주었다는 건 믿을게요. 녀석은 제가 데리고 있으니, 더 이상 관심도 걱정도 끊으세요.

    뿌득.

    충성심을 이용하는 에이리스도, 자신의 목숨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에르제도.

    둘 다 맹목적으로 믿을 수 있는 이들은 아니었다.

    ‘……다른 동아줄을 구해 놔야 해.’

    한쪽이 썩는다면, 언제든지 갈아탈 수 있도록.

    제이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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