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166화
전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사실 전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수인화를 한 지서후의 스피드를 레이는 전혀 따라가지 못했으니까.
파삭―!
흙바닥이 파이는 소리와 함께, 레이의 안면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 위를 지서후의 손이 꾹 누르고 있었는데, 레이는 그 상태로 기절한 모양이었다.
그사이에 라하임과 플랑 그리고 이룸을 공격해 들어간 뱀파리스들도 있었으나, 그들의 대장이 잡히고 나니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지서후가 그런 그들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내가 잡혔으면, 우리 애들은 절대 그렇게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쯧, 하고 혀를 찬 지서후는 레이의 뒷덜미를 잡고 굽혔던 무릎을 폈다.
그의 무릎에 묻어 있던 흙이 후두둑 떨어졌다.
“야.”
지서후는 레이를 질질 끌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뱀파리스들에게로 다가갔다.
“샤워할 곳 있냐?”
* * *
“에이씨.”
지서후는 갈갈이 찢어진 상의를 차에 고이 개켜 두고는 새 옷을 꺼내 입었다.
“혹시 몰라서 가져오기를 잘했네.”
“고생하셨습니다.”
라하임이 웃음기를 머금고 대답했다.
“고생은 무슨.”
지서후는 고개를 저으며, 뒷좌석에 눕혀 놓은 레이를 흘깃 바라보았다.
“저렇게 큰 집에 샤워할 곳도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아무래도 사무용으로 쓰는 곳이라 그런 모양입니다. 화장실은 많았으니까요.”
“청결도 모르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지서후 님이 이상한 겁니다.”
라하임이 쿡쿡 웃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원래 늑대인간들은 청결과 거리가 먼데, 지서후는 확실히 여타의 늑대인간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에르제 님과 친구를 할 수 있었던 거겠지.’
라하임은 그렇게 여기며, 새로 옮긴 뱀파이어 지부를 향해 출발했다.
“근데, 얘는 잡아서 어디다 쓰려고 나까지 부른 거야?”
“아, 그게.”
라하임은 말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에르제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에르제가 말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전’ 우두머리이긴 하지만 지서후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더 협조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대악마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지서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하여간, 에이리스는 예전부터 욕심이 끝도 없었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것도 여전하고.”
지서후는 피곤한지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꾹 눌렀다.
“가는 동안 한숨 잘 테니까 도착하면 깨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한참 고속도로를 달린 뒤.
라하임은 시동을 끄고 지서후를 깨웠다.
“도착했습니다.”
“으음…… 음…….”
“빨리 비켜라. 나가야 한다.”
플랑이 피곤한 표정으로, 지서후가 앉아 있는 의자의 뒷부분을 툭툭 건드렸다.
그는 레이가 기절 상태에서 깨어날 때마다 새로 기절시키는 일을 맡았기에 현재 상당히 지쳐 있었다.
그래서 지서후는 눈을 비비며, 군말 없이 SUV 밖으로 나왔다.
“나는 먼저 간다.”
모두 나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던 라하임은 돌아가는 지서후를 배웅하고는 건물 입구로 걸어갔다.
건물 입구에는 뱀파이어 몇이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란?’
라하임은 그들 중 가장 앞에 있는 이를 알아보고 미간을 좁혔다.
일반적인 외출로 알고 있다면 이렇게 마중을 나오지는 않았을 터. 라하임은 그들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곧 눈을 가늘게 뜬 바란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치 내가 뭘 하고 왔는지 알고 있다는 말투인데?”
“정보가 생명인데,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란은 고개를 갸웃하며, 플랑의 손에 질질 끌려오던 레이를 가리켰다.
“집무실에 있다가 네 분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 뱀파리스가 잡혀 온 것도 보았고요.”
그의 말에 라하임의 미간이 더욱 깊이 파였다.
2장로의 얼굴은 자신이 아닌 이상 알아볼 수 없었다. 뱀파리스들 또한 지구로 오면서 그들의 외형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2장로 레이는 조직을 운영하며 자신의 존재를 외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정보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알 수 없었을 텐데?’
그러나 곧 이어진 바란의 말에 라하임의 의구심은 누그러들었다.
“지서후 님과 주군, 그리고 플랑 님까지 함께 가셔서 잡아온 뱀파리스니…… 아마도 로드님께서 내리신 명령일 테고, 그러면 보통의 뱀파리스는 아니겠지요?”
바란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레이 쪽을 유심히 살폈다.
“최소 간부급 이상은 될 것 같은데, 더 이상 주군을 번거롭게 해 드릴 수 없어서 이렇게 직접 마중을 나왔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하명하시지요.”
바란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자, 그의 친위대로 따라온 뱀파이어들도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렇단 말이지.”
다만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은 채 라하임은 고개를 저었다.
“저자는 내가 따로 데리고 갈 예정이니까 너희들은 플랑과 이룸이 쉴 수 있도록 방 하나만 내어줘.”
“그럼 이룸 님이 머무시던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해.”
라하임은 플랑에게서 레이를 인계받은 뒤, 그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슬쩍 뒤로 돌린 바란의 시선이 라하임의 뒤통수에 닿았다가 금세 떨어졌다.
* * *
[ 2장로 레이는 제압해서 지부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로드께서 보내신 지서후 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
메시지를 받은 에르제는 안도의 낯빛을 한 채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2장로를 잡으라고 보내 놓았던 오늘,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내내 불안하던 참이었다.
‘다행히 에이리스까지 등장하지는 않은 모양이네.’
모기 핑계를 대고 지서후를 붙인 것은 사실 그 이유가 가장 컸다.
물론 레이를 잡는데 지서후의 존재가 훨씬 쉽고 편한 이유도 있었으나, 그보다 에이리스가 직접 등장했을 때 무사히 도망치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 말이다.
다만, 에이리스가 막상 나타나지 않은 게 신경에 조금 거슬리기는 했다.
레이가 구할 정도의 가치가 없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레이가 에이리스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 말이다.
‘보고를 하지 않은 건 그냥 자만심에서 나온 행동이겠지만…….’
에르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어차피 뭐가 됐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2장로인 레이를 잡아온 것만으로도 에이리스의 힘을 충분히 깎은 일이 됐고, 무엇보다 제이에게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힘을 보여 준 것이 됐으니까.
‘계약 때문에 내가 한 말을 에이리스에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배신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어.’
그렇기에 이번 일은 제이에게 경고 비슷한 효과를 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지서후라는 카드를 쓴 것도 그래서였다.
‘어쨌든, 무사히 끝났다고 하니까.’
에르제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벽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떼어 냈다.
어느덧 3월로 접어든 지금, 그를 포함한 토트윈은 콘서트 준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규 앨범에 있는 곡들로 콘서트를 한다고 해도 어울리는 것들로만 추리고 나니 생각보다 곡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커버곡은 제외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건 토트윈에게서 나왔다.
― 토트윈의 무대를 보러 오신 거니까 토트윈 곡을 들려드리는 게 맞아여!
― 맞아, 맞아!
안단테와 태현우가 합심해서 주장하니, 나머지도 그렇게 하자고 했다.
‘……음.’
결국 편곡과 유닛 무대 등으로 부족한 곡수를 커버해야 했으니, 가장 먼저 그 의견을 주장한 안단테는 스스로 지옥문을 연 것이나 다름없긴 하다.
‘자업자득이지.’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안단테는 연습 시간을 제외하면 내내 곡 작업에 매달려야 했고.
나머지 멤버들은 앨범 준비까지 해야 하는 미친 상황에 내몰리고 있었다.
그리고,
[ 토트윈 4월 28일, 29일 주말 양일 콘서트 예정! ]
[ 신인상으로 비상한 토트윈, 드디어 콘서트 연다! ]
이미 빼도 박도 못하게 기사까지 나온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4집 앨범의 뮤직 비디오 일부분을 콘서트 VCR로 대체해서 쓸 수 있다는 것 정도.
포토 카드도 VCR 촬영 비하인드 컷에서 뽑아 쓸 예정이라고 하니, 일을 두 번씩 하게 될 일은 없을 듯했다.
‘그래도 바쁜 건…… 바쁜 거지.’
뱀파이어인 자신도 꽤 힘들다고 느끼고 있었으니 다른 멤버들이 어떨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자신은 일족과 관련한 일도 처리해야 했고, ‘알바 몬스터’ 촬영도 겸해야 했으니 노동의 강도가 좀 다르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다들 잘 버티고는 있으니까.’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엎어졌던 몸을 일으켰다.
연습실 모서리에서 몸을 기역자로 만들고 쉬고 있던 참이었는데, 멤버들이 연습을 하려고 자리에서 슬슬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빰, 빠바밤, 빰!
지금 연습하는 것은 4집 앨범의 타이틀곡이자 콘서트에서 첫 공개를 하려는 곡이었다.
콘서트와 더불어 올해 발표할 첫 앨범이기 때문에 경쾌하고 힙한 분위기가 강한 곡이었다.
덕분에 지쳐 있던 몸이 강제로 활기차지는 원동력이 됐다.
탁, 탁, 탁!
연습실을 구르는 발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소리를 냈다.
그동안의 연습량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것만 보아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다시 재개된 연습에 에르제와 멤버들이 한창 열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였다.
벌컥―!
연습실 문이 열리고, 이윤이 종종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음.”
연습을 하던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윤은 가만히 뒤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후하!”
“더워! 너무 더워!”
곧 연달아서 2곡을 연습한 멤버들이 자리에 주저앉자, 이윤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다들 많이 바쁘지? 이거 챙겨 먹고 하자.”
이윤이 사 온 것은 달달한 음료수였다.
평소에는 못 먹게 하더니, 최근에는 오히려 직접 조달해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운동량과 연습량이 많으니, 수분을 보충할 때 당도 보충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듯했다.
‘어쩐지 닭가슴살이 더 이상 안 나오더라니.’
에르제는 오렌지주스를 한 번에 들이켜고는, 꾹 차오른 숨을 후욱 하고 뱉어 냈다.
달고 신맛이 배 속까지 내려왔다가 입 밖으로 되돌아 나왔다.
“감사합니다!”
태현우가 음료를 손에 들고 감사 인사를 하자, 이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멤버들만큼 이윤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 결과가 그의 다크서클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렇게 당 보충을 하니 기운이 생겼는지, 이내 안단테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 맞아! 윤이 형, 저희 티켓팅 언제예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