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163화
직접적으로 죽는다는 말이 나오자, 제이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에르제의 시선이 제이가 주문한 자몽에이드에서 멈췄다.
“에이리스의 성정을 옆에서 지켜보았다면 잘 알 텐데요. 아무런 대가도 없이 당신의 힘을 키워 줄 리 없다는 거.”
목이 타는지 제이는 자몽에이드를 집어 쭉 들이켰다.
에르제가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그 대가는 당신의 죽음이에요. 조금 전에 말했던 대악마를 소환하는 제물이 되어서요.”
“……제물.”
“지금 당장은 힘이 늘어난다고 착각하고 있겠지만, 사실 당신의 몸이 혈석화가 되어 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뭔지는 아시죠? 에이리스가 직접 확인하라고 예능까지 내보냈으니.”
“……그것도 눈치챘습니까?”
“네.”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그렇지 않아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게 수상했는데, 갑자기 입에서 혈석이 공명을 일으켰으니까.
에르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게 답니다. 오늘 보자고 한 이유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제이가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왜 날 살려 주려고 하는 겁니까?”
“내가 지금 그쪽 살려 주려고 이러는 것처럼 보여요?”
에르제가 조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제이의 눈동자가 조금 더 크게 흔들렸다.
“우리 사이가 얼마나 좋다고, 목숨을 살려 주니 마니……. 나는 대악마가 이 세계에 소환되는 걸 막으려는 것뿐이에요.”
에르제는 순간 튀어나온 헛웃음을 지워 내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내 사람이 아니면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대악마가 소환되면 내 사람들이 다치겠죠. 죽을 수도 있고요.”
에르제는 앞으로 내밀었던 상체를 천천히 뒤로 빼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 제물이 선배가 아니고, 데 캄이라고 해도 똑같이 했을 거란 뜻이에요.”
“……하.”
조금 전까지 당황과 혼란함으로 가득했던 제이가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날 선 에르제의 말에 오히려 냉정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그렇습니까.”
제이는 자몽에이드가 반쯤 사라진 유리잔의 겉면을 만지작거렸다. 겉에 묻은 물기가 그의 손가락에 묻어 나왔다.
“같은 아이돌이라서 특혜라도 있는 건가 했네요.”
“그러기에는 선을 많이 넘었죠. 그쪽이.”
“뭐.”
제이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처지라.”
“변명이네요.”
“그렇습니까.”
제이는 유리잔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모습이 비칠 리가 없었으나,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내가 만약 당신을 따른다고 하면, 그 일이 모두 끝나고 난 뒤에 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유리잔에 머물러 있던 제이의 시선이 무심한 에르제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땐 날 죽일 겁니까?”
“아뇨.”
에르제는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에이리스가 없어지면, 그쪽도 더 이상 명령을 받을 이유도 없지 않나요? 방금, 명령 받고 움직이는 처지라고 했으니까.”
“그렇기는 한데, 뱀파이어와 뱀파리스는…….”
“뱀파리스의 시초가 사라지면, 그때는 그냥 같은 종족일 뿐이에요. 둘로 나눌 이유도 없고.”
에르제는 찌푸리고 있던 얼굴을 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LAK를 아직 제대로 이겨 보질 못해서. 그렇게 LAK가 사라지면, 무슨 재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요. 그냥, 계속 아이돌 활동 하세요. 보니까 그 일 자체는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것도 명령으로 시작한 일이기는 하지만, 네.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재미있으니까요.”
헛헛한 웃음을 보인 제이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결심을 끝낸 모양이었다.
오늘 본 제이의 눈동자 중에서 지금이 제일 또렷했다.
“뭐부터 하면 됩니까?”
* * *
해야 하는 일과, 어떻게 에이리스를 대해야 하는지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에르제는 제이에게 핏방울 하나를 뽑아서 주었다.
에이리스가 오늘 나눈 이야기를 알 수 없게 하는 기능과 더불어, 오늘 했던 맹세를 깨뜨리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술법이었다.
그렇게 제이와 헤어진 뒤 차에 올라타는 에르제에게 라하임이 물었다.
“일은 잘 끝내셨습니까?”
“응. 다행히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는 것 같더라.”
“무지한 뱀파리스는 아니었군요.”
“그러니까 에이리스가 그동안 믿고 일을 맡겼겠지.”
“하필 로드의 상대를 하다니. 그게 녀석의 패착이 되겠군요.”
음음, 라하임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핸들을 꺾었다.
잠깐의 외출을 허락 받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일단 큰일 하나는 해결했네.’
에르제는 시트에 몸을 기대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가 에이리스나 뱀파리스의 사상에 깊이 빠져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죽음을 앞에 두고도 언제든지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놈들이라 조금 거친 언행을 썼지만, 다행히 제이는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듯했다.
‘고민이 그리 깊지 않았던 걸 보면, 동족을 죽이는 행위에 거부감이 있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까 말했던 대로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 있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아무리 명령이라고 해도 다른 이들을 죽일 때는 별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래도 제 목숨 귀한 줄은 아는 모양이다.
때문에 헛웃음을 흘린 에르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일단 제이가 힘을 키우지 못하게 막아서 혈석의 완성을 늦춰야 해. 그 전까지는 에이리스도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할 테니까.’
다만, 여전히 대악마를 불러내려는 에이리스의 생각이 이해가 가지 않기는 했다.
파괴된 세상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뱀파리스의 세상이라도 열고 싶은 걸까?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세상을 파괴하고 싶은 걸까.
‘에이리스…….’
같은 핏줄에다 로드의 힘을 반씩 나누어 가졌지만, 여전히 그녀의 생각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제이에게 무슨 생각인지 알아볼 수 있으면 알아보라고 했으니.’
지금은 일단 제이가 정보를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콘서트랑 앨범 준비에만 신경 쓰자. 오늘로 시간은 많이 늦춰 뒀으니까.’
제이도 에이리스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시간을 끌어 주기로 했으니.
‘……곧 3월인가.’
알바 몬스터의 촬영과 더불어, 콘서트 준비까지 하려니 시간이 빠듯하기만 했다.
“다 왔습니다, 로드.”
“응.”
도착했다는 말에 생각을 접은 에르제는 변장 도구들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숙소의 문 앞까지 도착한 뒤 라하임은 따로 할 일이 있다며 다시 내려갔고, 에르제는 “알았어.”라고 대답하고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
문을 열자마자 뭔가 분주한 기운이 부엌에서부터 느껴졌다.
‘뭐지? 숙소에서 춤 연습을 하나?’
쉬는 걸 좋아하는 멤버들이 숙소에서까지 그러고 있지는 않을 텐데.
에르제가 의아해하며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 앞에서 냄비를 들고 종종걸음을 치는 안단테와 눈이 딱 마주쳤다.
“……엇…….”
“?”
안단테가 선 채로 굳었다.
“버, 벌써 왔어여?”
말을 더듬으며 안단테가 부엌 쪽으로 시선을 슬쩍 돌렸다.
에르제가 따라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안단테가 황급히 냄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 잠깐만여!”
그러고는 그대로 에르제를 끌고 부엌이 보이지 않도록 신발장 쪽까지 밀고 갔다.
안단테의 어깨 너머로 태현우가 빠르게 냄비를 들고 부엌으로 가는 장면이 포착됐다.
“뭐 해?”
“형.”
에르제의 어리둥절한 질문에 안단테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저희가 지금 뭐를 준비하고 있거든여. 조금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여?”
안단테는 그렇게 말하며, 신발장에서 가장 가까운 방을 손으로 가리켰다.
태현우와 에르제, 둘이 쓰는 방이었다.
“저기서 잠깐 쉬고 계시면, 불러 드릴게여.”
“뭐 준비하고 있다면서? 도와줄게.”
“안 돼여!”
안단테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에르제를 방 안으로 강제로 집어넣었다.
쿵―.
깔끔하게 닫혀 버린 방문을 보고, 에르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들 이러는 거지?’
조금 전에 알았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라하임의 말도 사실 조금 이상했다.
보통 무슨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다고 상세하게 보고하는 편이지 않던가.
‘비밀인가 싶어서 물어보질 않았는데…….’
혹시나 지금 멤버들의 모습과 연관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나질 않았지만.
그러나 도와주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는데, 나가서 도와주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르제는 에라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냥 침대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았다.
세리나가 보정한 자신의 사진을 구경하기도 하고, 지서후의 SNS에 들어가서 댓글을 달기도 했다.
꽃을 든 채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 사진이었는데, 그 밑에는 지서후의 팬으로 보이는 이들의 댓글이 굉장히 많았다.
― 우와! 누가 꽃인 건지 모르겠다~.
― 이번 드라마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 (응원 도구 흔드는 이모티콘)
찬찬히 읽던 에르제도 댓글 하나를 남겨 주었다. 누가 꽃인 줄 모르겠다고 하는 댓글의 대댓글이었다.
― 왼쪽에 손에 잡혀 있는 붉은색 잎이 나 있는 것이 꽃이고, 그 오른쪽에 박혀 있는 코와 얼굴이 지서후입니다.
꽃과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여기면서.
카테이아 대륙에서도 그런 인간들이 있었다. 무슨 병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물체와 사람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때문에 가끔 살인이 일어나기도 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병이 아닐 수 없었다.
빠른 쾌차를 바란다고 쓸까 말까 고민하던 에르제의 스마트폰이 지잉, 하고 울렸다.
“?”
고개를 기울이며 코코아톡을 확인하니 지서후였다.
[ 미친놈아! ]
다짜고짜 욕이라니.
[ 조금 전에 내가 어떤 선행을 했는지 안다면, 미친놈이라는 소리가 쏙 들어갈 텐데 ]
[ 뭔 소리야. 무슨 선행? 모기라도 잡았냐? ]
모기라는 말에 에르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 종족 비하? ]
[ 아니, 미안. ]
빠른 사과에 에르제의 마음이 누그러지려던 차에 다시 메시지가 날아왔다.
[ 아무튼 선행은 모르겠고, 대댓글 단 거 지워, 미친놈아. ]
[ 내가 말한 선행이 그건데? ]
[ ? ]
[ ?? ]
그 뒤로 물음표가 10개는 넘게 양쪽을 오갔다.
[ 아무튼 지워. 그거 구분 못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다 알고 쓴 거지. ]
[ 세상에는 그런 인간들도 있어? ]
[ 내가 너랑 친구를 왜 했을까……. 그냥 연예계 동료로도 충분했을 텐데. ]
거참. 누가 늑대인간 아니랄까 봐 아직도 이렇게 편협한 사고를 하고 있을 줄이야.
충고를 좀 해야 하나, 에르제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벌컥―.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문이 열렸다.
“짠!”
그리고 열린 그 문으로 태현우가 스마트폰으로 에르제를 찍으며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