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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59화 (159/307)

제159화

159화

에르제는 미리 받아서 읽어 보았던 대본의 대사와 지문을 떠올렸다.

‘흑마법사들처럼 하면 되겠지.’

지구의 사이비 교주와 제일 비슷한 것을 뽑자면, 단연 카테이아 대륙의 흑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인간들을 현혹하여 제물로 바치거나,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로 만드는 데 아주 능했으니까.

뱀파이어였던 만큼 그들과도 몇 번 접촉을 해 보았기에, 연기를 하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촬영장에서 내준 검은색 사제복 의상을 입은 에르제는 정해진 자리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현재 그가 위치한 세트장은 마치 성당과 비슷한 느낌의 장소였는데.

눈앞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긴 의자에 신도들이 앉아 있을 터였다.

그렇게 3분 정도 대기했을까?

곧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고, 에르제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이익―.

불쾌한 소리가 날 수 있도록 느리게 문을 연 에르제는 문이 완전히 다 열리고 난 뒤에야 걸음을 옮겼다.

‘여유롭게, 그리고 엄숙하게.’

흑마법사들의 집회를 떠올리며, 에르제는 그때 보았던 고위 흑마법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끼익, 끼익.

문을 열 때와 비슷한 소리가 에르제가 나무 바닥을 밟을 때마다 넓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꿀꺽, 하는 소리가 신도들 사이에서 들려왔다.

에르제는 중앙 단상에 서서 느른한 눈매로 그들을 찬찬히 훑었다.

그러고는 양팔을 좌우로 뻗었다.

양 소매에서 펄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이곳을 찾은 신도들은 기적을 보기 위해 온 이들이었다.

그들이 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악마 ‘라칸’의 기적을.

“위대하신 지고의 존재, 라칸의 신도들이여.”

느긋하고 능숙하게 대사를 처리한 에르제는 그 부분에서 잠깐 끊었다.

신도들이 머리를 숙이고, 양손으로 기도를 하는 자세를 취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였다.

곧 하나둘, 파도타기를 하듯 고개를 푹 숙이는 신도들의 모습에 에르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 그대들에게 라칸 님의 기적이 현현할 것이다.”

에르제는 다시 한번 품이 넓은 소매를 펄럭이며 몸을 90도 틀어 옆을 향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 끝에 위치한 것은 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동상이었다.

돼지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고 머리에는 뿔이 달린 괴상한 생명체였다.

에르제는 소중한 것을 쓰다듬듯 손등으로 겉면을 미끄러트렸다.

“오오.”

경건한 것을 뵈었다는 듯 무릎을 꿇었다.

“라칸 님이시여.”

에르제가 손등으로 만진 부분에서 금빛 물결이 찰랑였다.

“……기적을.”

에르제는 다른 신도들과 같은 자세를 취했고, 약 20명의 신도들도 같은 대사를 합창했다.

“기적을……!”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질 것이니.”

에르제는 느릿하게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신도들 쪽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오늘 영생의 기적을 받게 될 자, 앞으로 나오라.”

에르제의 근엄하고 묵직한 목소리에 신도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곧 한 여성이 파르르 떨리는 오른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을 안으로 말았다.

“앞으로.”

여신도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에르제의 앞에 공손히 섰다.

“이리 올라오너라.”

에르제의 말에 여신도는 단상 위로 한 발씩 올라왔다.

그녀가 단상 위로 다 올라오자, 에르제는 다시금 손바닥을 아래를 향해 펼쳤다.

그러자 여신도는 양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기도를 하던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히죽, 에르제의 한쪽 입꼬리가 기괴하게 뒤틀려 올라갔다.

하지만 에르제는 금세 표정 관리를 하고, 여신도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살포시 얹었다.

여신도의 목이 움찔, 거북이처럼 들어갔지만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만히, 그대로.”

꾹꾹 눌러 담은 에르제의 목소리가 겨울바람처럼 서늘하게 퍼져 나갔다.

그는 나머지 팔만 단상 쪽으로 뻗어, 그곳에서 무언가를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푸른색 보석이 검은색 손잡이에 박혀 있는 단검이었다.

에르제는 여신도를 바라보던 자세 그대로, 단검을 든 오른손을 하늘로 치켜 올렸다.

에르제의 눈동자에 광기가 맺혔다.

“라칸이시여! 어리석고 우매한 자들을 이끄는 신이시여!”

목소리가 성당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오늘 그대에게 육신의 생을 버리고, 영원한 생을 위해 여행을 떠나느니!!”

단검을 치켜든 에르제의 손등과 팔에 힘줄이 불끈 드러났다.

그리고 눈을 꽉 감고 있는 여신도의 목을 향해 에르제의 오른팔이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단검이 여신도의 목에 닿으려는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앙―!

신도들이 이곳으로 들어왔던 커다란 문이 굉음을 내며 안쪽으로 쓰러졌다.

“…….”

에르제는 혀로 입술을 느릿하게 핥고는,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여신도의 머리채를 잡고 있다시피 한 에르제의 표정은 광기 위에 짜증스러움이 덧칠해져 있었다.

신도들이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좌우로 갈라지자, 에르제는 천천히 굽혔던 허리를 폈다.

역수로 쥐고 있던 단검을 고쳐 쥔 그는 한쪽 눈만 가늘게 뜬 채 연기 속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연기를 뚫고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에르제가 입고 있던 것과 비슷한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였다.

늘어뜨린 한쪽 팔에는 거대한 석궁이, 그리고 반대편 손의 손등에는 붉은색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네놈도 라칸 님의 신도가 되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냐?”

에르제가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묻자, 남자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그럼?”

남자는 팔을 들어 올리며 그대로 석궁을 어깨에 견착했다. 그러고는 에르제를 정확하게 조준했다.

뒤집어 쓴 로브 밑으로, 날카로운 눈빛이 빛났다.

“퇴마하러.”

핑! 쏘아진 석궁이 그대로 에르제의 이마를 관통했다.

* * *

“컷!!”

그 순간, 감독의 쩌렁쩌렁한 소리가 세트장에 울려 퍼졌다.

스태프와 배우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여들고, 곧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오케이!!”

감독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 내며,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멀리 지서후와 함께 이곳으로 걸어오는 에르제가 보였다.

“하, 거참.”

감독은 혀를 내두르며, 옆에 있던 에르제의 매니저에게 물었다.

“서은우 씨, 연기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나?”

“더빙을 제외하고는 그렇습니다.”

라하임의 대답에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눈에는 욕심이 가득했다.

“아, 이거. 그냥 다른 각도로 몇 번 더 찍고 넘기기에는 너무 아쉬운데.”

“그렇죠?”

감독의 말을 들은 지서후가 신이 나서 발걸음을 빨리했다.

감독의 옆에 도착한 지서후가 에르제의 어깨에 올려놓은 손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괜히 추천한 게 아닙니다, 감독님.”

“난 또 둘이 엄청난 친분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봐?”

감독은 헛헛하게 웃으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멀뚱멀뚱 서 있는 에르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냥 연기를 잘해서 추천한 거였어?”

“둘 다죠, 감독님. 저희 친해요.”

지서후가 미간을 좁히며 말하자, 감독이 손사래를 쳤다.

“알지. 그냥 그만큼 서은우 씨가 연기를 잘했다는 뜻이야.”

그의 말에 에르제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잘했나요?”

“깜짝 놀랄 정도로 잘했다고 하면 좀 식상하려나?”

옆에 앉아 있던 작가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랑 감독님, 둘 다 엄청 몰입해서 봤어요. 서은우 씨, 혹시 예전에 사이비 교주 같은 거 한 거 아니죠?”

“그러니까. 눈빛이 살아 있던데? 나 이마에 땀났잖아.”

감독과 작가의 칭찬 릴레이에 에르제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폈다.

‘지구에서도 잘 먹히네.’

예전 카테이아 대륙에 있을 때 쌓은 연기력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그만큼 노래를 부를 때에도 표현력이 죽은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이거, 토트윈 팬들도 그렇겠지만 일반 시청자들도 깜짝 놀라겠어.”

감독은 검지로 턱 밑을 쓸다가, 이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서은우 씨, 오늘 혹시 뒤에 스케줄이 더 있나?”

이에 대한 대답은 라하임이 해 주었다.

“딱히 없습니다. 오늘 촬영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른다면서 장 대표님이 촬영 뒤는 빼 두셨습니다.”

“오, 그래요?”

감독은 만족스럽게 웃고는, 말을 이어 갔다.

“일단 이 구도는 원 테이크로 끝났으니까 괜찮을 것 같고. 이대로 다른 방향으로 중요한 장면만 더 따 봅시다.”

감독이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혹시 좀 갑작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는 다른 대본 하나를 에르제에게 건넸다.

“다른 구도 촬영 끝난 뒤에 외울 시간은 충분히 드릴 테니까 이거, 가능하겠어요?”

받아 보니, 지서후가 말했던 악귀 역할이었다.

에르제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 * *

촬영을 마친 에르제가 숙소로 돌아가려고 할 때.

차를 세워 둔 곳에 도착하니,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 뮬 님.”

“그냥 지서후라고 해.”

지서후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배우님까지 붙여 주면 더 좋고.”

“네. 지서후 님.”

“……로드나 그 일족이나.”

지서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에르제가 열었던 차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인데?”

“말해줄 게 있어서.”

조금 전, 장난기가 어려 있던 지서후의 표정이 금세 차갑게 식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라하임을 지나 에르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말해줄 거?”

“응.”

지서후는 에르제를 끌고 조금 더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너, 김지원 알지?”

“김지원?”

고개를 잠시 갸웃하던 에르제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뱀파리스. 알고 있어. 왜?”

“음…….”

미간 쪽을 검지로 쓸어내리던 지서후는 숨을 깊게 마셨다가 뱉어 냈다.

“저번에 내가 시내에 나갔다가 김지원을 봤어.”

“……김지원을?”

에르제는 인상을 썼다.

‘지서후한테 김지원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니, 알고 있는 게 특별한 것도 아니고…….’

에르제가 갈피를 잡지 못하자, 지서후가 말을 덧붙였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는 것 같더라고. 전화로 살려 달라고 하면서.”

지서후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건 녀석이 그렇게 도망치다가 떨어뜨린 스마트폰.”

그가 보여 준 통화 목록에는 자신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그때 너한테 전화를 걸었더라고.”

“나한테?”

“응. 부재중으로 뜬 것도 아니니까 네가 전화를 받았다는 거겠지. 아무튼.”

지서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에르제 뒤편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혹시 몰라서 녀석의 냄새를 쫓아갔는데, 죽어 있더라.”

지서후의 시선이 다시 에르제에게로 향했다.

“피가 다 빨려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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