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158화
상담 내용은 그의 말대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그는 에르제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에르제 또한 성심성의껏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보통 기억상실증의 경우,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사고가 났을 때 혹은 그 전에 어떤 사건에서 도망을 치고 있는 걸 수도 있습니다.”
“저는 어떤 것에서도 도망치지 않아요.”
“……혹시 평소 어떤 것을 보면 두렵다거나 무섭다는 생각은 없나요?”
“태양이요.”
“그…… 렇다면 반대로 애착이 가거나,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소중하게 여겨진다거나 하는 거는요?”
“인기요.”
“아이돌 서은우 말고, 인간 서은우에게요.”
“돈?”
상담사의 이마에 맺히는 땀의 양이 더욱 늘었다.
“혹 스스로가 자신이 아니라고 느껴진다거나 다른 인격이 느껴지는 일은 없었나요?”
“사고 이후에 살펴봤는데, 아마 다른 세계로 간 것 같아요.”
“……네에.”
상담사는 무언가를 적으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단은 해리성인가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고요. 확실히 기질성 기억상실로 보입니다. 사고로 인한 후유증이고, 이건 꾸준하게 상담을 받으면서 트리거를 찾는 게 제일 좋겠네요.”
‘아, 안 되는데.’
에르제는 상담사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턱 밑을 어루만졌다.
물어보는 것에 열심히 대답해 준 것 같은데,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기억이 돌아오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이대로 꾸준히 상담사를 만나러 오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갑자기 기억이 돌아온 척할 수는 없었기에.
에르제는 드라마에서 보았던, 남자 주인공의 기억이 돌아오는 장면을 떠올리며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일단 아이돌 활동을 하시는 것을 보니, 그래도 직업적 활동에서 어려움을 크게 겪지는 않으시는 것 같고…….”
상담사는 턱 주변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상실된 기억 외에는 기존에 알고 있던 정보와 기억을 소실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까. 음.”
상담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상 밑에서 커다란 패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곳에는 16개 정도의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단순한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이걸 30초 동안 보여 드릴 거예요.”
“?”
“보통 기질성 기억장애가 심한 경우, 새로운 정보의 습득이 불가능하거나 더디기 때문에 그 부분을 한 번 확인하는 작업이에요.”
상담사는 에르제가 미리 보지 못하게 뒤집었던 패널을 다시 보이도록 방향을 바꾸었다.
‘자라, 비행기, 섬유 공장…….’
에르제는 주어진 30초 동안 그것을 읽어 가다가 적절한 타이밍을 찾아냈다.
“자동차…… 자동차…….”
서은우가 교통사고로 의해 의식을 잃었기에 일부러 그 부분을 반복해서 중얼거리다가.
“……!!”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허공의 한 점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당황한 상담사가 패널을 집어 던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혹시 자기 때문에 에르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식겁한 표정이었다.
“서은우 씨!!”
하지만 에르제는 훌륭한 연기력으로 남자 주인공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크윽……!!”
그대로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운 듯 허리를 아래로 숙였다.
상담사를 속이는 일이라 조금 죄책감이 들었으나, 꿋꿋하게 연기를 이어 갔다.
“으으윽!! 기억이……!”
“기억이?!
기억이라는 말에 상담사가 순간 멈칫했다.
에르제는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입술을 뗐다.
조금 전까지 고통스러워하던 것과 다르게, 어딘가 평화로우면서도 아득히 먼 추억을 회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어렸을 때, 저는 고아원에 버려졌어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없이 자랐어요. 그리고…….”
에르제는 윤소희의 기억에서 보았던 서은우의 기억을 조금 바꾸어서 이야기를 했다.
뱀파이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기억 여행이 끝났을 때, 상담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받았던 내용과 거의 똑같네요. 저번에 돌아왔다던 그 기억이랑.”
장 대표에게서 그 정보를 받은 건가! 아차, 싶은 에르제는 황급히 내용을 덧붙였다.
“저는 노래 부르는 걸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기억을 잃기 전 노래 실력이 전혀 늘지 않았다고 되어 있네요.”
“좋아하는 것과 실력은 상관이 없어요.”
“그건 그렇지요.”
상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서은우 씨.”
그는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굉장히 고민이 깊어 보였다.
하지만 결국 말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는지, 안경을 벗어 내려놓고는 깍지를 끼고 책상 위에 얹었다.
“서은우 씨, 혹시 약 해요?”
“아뇨. 강한데요.”
* * *
상담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온 에르제는 장 대표와 잠깐 대면 시간을 가졌다.
“너 약 해?!”
“아니요.”
“그런데 상담사가 혹시 모르니 확인 부탁한다고 왜 그러는 거냐?”
“그게 확인이 돼요?”
강하고 약한 걸, 어떻게 보여 줘야 하는 건지.
뱀파이어 로드이고, 로드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자신은 매우 강하다. 그러나 그렇게 설명할 수가 없었기에 에르제도 답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장 대표는 되레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약 한 거 다 걸려, 인마. 그래서 뉴스에도 나오고, 이미지 다 망가지고 그러잖아. 치료받고 와도 대중은 좋게 봐주지도 않고.”
약하다는 것만으로 뉴스에까지 나온다니. 카테이아 대륙의 인간들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이어지는 장 대표의 말에, 에르제는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가 약을 할 녀석은 아니라서 상담 과정에 뭔가 오해가 있던 모양인데. 아무튼 아니라고 하니까 내가 말을 해 놓긴 하겠다만, 다음에 상담 받으러 가면 잘 설명 드려.”
‘아, 약…….’
에르제는 볼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 봐.”
에르제가 나가고 나서, 장 대표는 옆에 있던 이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믿는다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내심 불안한 모양이었다.
“은우가 약 할 애는 아니기는 한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저도 대표님이랑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지?”
장 대표는 머리를 한 차례 헝클어뜨리고는, 에르제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라하임 씨나 네가 지속적으로 옆에 있으면서 확인해 보고. 그거 말고도 다른 문제 있으면 바로 보고해 줘.”
“알겠습니다.”
“그, 라하임 씨는 매니저 일 잘하는 것 같아?”
“아직까지는 특별한 문제도 없고, 일도 빨리 배워서 저는 만족스럽습니다. 덕분에 바쁜 것도 많이 해소됐고요.”
“그래. 이번에 신인상을 타기도 했고, 원체 예능 나가면 묻히지도 않았으니까 앞으로는 더 바빠질 거야.”
장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다가,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리고 은우, 이번에 드라마 카메오 출연하는 거. 그거 네가 일정이랑 그런 것들 자세히 은우한테 말 좀 해 줘라.”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래, 고생해라.”
* * *
상담을 받고 온 뒤로 일주일이 지났을 때.
에르제는 라하임과 함께 외출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카메오로 출연하게 된 드라마 촬영 때문이었는데, 이윤이 아닌 라하임이 온 것은 경험을 쌓기 위함이라고 했다.
드라마에 아예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거라면 이윤이 왔겠지만, 카메오였기에 라하임에게 일을 맡긴 모양이었다.
“제가 그만큼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로드.”
“열심히 하네.”
“로드를 위한 일이니까요.”
라하임은 자랑스럽고 뿌듯한 표정으로 차의 시동을 껐다.
드라마 세트장에는 먼저 촬영을 하고 있었는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라하임은 에르제를 PD와 간단하게 인사시키고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둘이 두런두런 일족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들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랜만.”
지서후였다.
그는 드라마를 위해 이번에도 흑발로 염색한 모양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로드의 친구분이시군요.”
이미 늑대인간과 친구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라하임은 거부감 없이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예전에 뮬 님과 한 번 붙은 적이 있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기억하고 있지. 그때 너 죽을 뻔했잖아.”
“네. 배가 반쯤 손톱에 갈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에는 꽤나 심각한 상황이었고, 되새김질하기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다른 세계에 오게 된 영향 때문인지 둘은 피식 웃으며 그 기억을 공유했다.
“로드랑 싸우셨을 때는 3일 동안 쉬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지서후가 입술을 비죽 내밀며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큼.”
에르제가 딴청을 피우자, 지서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라하임의 기억을 정정해 주었다.
“쟤가 자기 혼자 동굴에 짱박혀서 쉬고 오고 그랬어. 나는 갈 데가 없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늑대인간이랑 뱀파이어는 신체 조건이 다르잖아. 각자 종족에 맞게 싸우는 법이 있는 거지.”
“알긴 아는데, 얄밉더라.”
지서후와 에르제는 시선을 마주치고는 쿡쿡 웃었다.
곧 지서후가 멀리서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 하나하나를 짚어 주었다.
“저쪽은 김서영 배우, 저기는 마정석 형님. 악귀들 물리로 때려잡는 역할인데, 액션 장난 아니셔.”
“음.”
마정석은 플랑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이야?”
“어. 나도 처음에 인간 아닌 줄 알았어.”
무엇보다 인간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옆으로 누우면 머리가 땅에 안 닿을 것 같은데.”
그 정도로 팔 두께가 장난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대략적인 배우들의 정보를 들은 뒤에 에르제는 PD의 호출을 받았다.
PD는 익숙한 듯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곧 은우 씨 촬영 들어갈 거고요. 대본이랑 지문은 슛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확인 부탁드릴게요.”
“네.”
“장면이 길지 않으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마시고, 편하게.”
지서후의 추천 때문인지, 아니면 저번 더빙 연기를 좋게 본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카메오라서인지.
PD는 그에게 꽤나 호의적인 태도로 대했다.
‘내 역할이 사이비 교주지.’
악귀에 완전히 씐 뒤에 사이비 교주가 된 인물이었다.
‘전도를 하다가 퇴마하러 온 지서후에게 곧바로 제압당하는 역할.’
그렇게 인간 역할을 맡은 자신은 쉽게 제압당하고, 그 뒤에 튀어나올 악귀는 다른 사람에게 연기를 맡길 예정이라고 했다.
“네가 연기 잘하면 악귀도 네가 할 수 있어.”
“음.”
지서후가 에르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옆으로 빙 돌아서 본인의 자리에 위치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신 48,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스태프의 큰 목소리와 함께, 에르제가 지구에서 처음으로 연기하는 순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