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150화
11월 중순.
마녀 본 단에서 내어준 방에 머무르고 있던 윤소희는 곧 열릴 회의를 위해 올 블랙으로 옷을 맞춰 입었다.
화장까지 모두 마친 그녀가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을 때.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넓은 방 안을 울렸다.
윤소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어차피 거울로 문 쪽이 다 보였기 때문이다.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곧 문이 열리고, 10대로 보이는 소녀가 깍듯한 태도를 보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소녀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연신 두리번거리며 있자, 윤소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예의 따지는 사람이 아니니까 편하게 얘기해.”
“그…… 네……!!”
화들짝 놀란 소녀는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곧 최종 회의가 있을 예, 예정이라서……! 그…… 윤소희 마녀님을 모셔 가……려고……!”
소녀가 고개를 아주 살짝 들어 올리며 윤소희의 등을 흘긋 바라보았다.
“준, 준비는 다 되셨는지……! 여쭈어보려고!!”
말을 더듬다 보니 말끝에 모든 호흡이 다 쏠려서 잔뜩 긴장했다는 느낌이 윤소희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도대체 본 단에서 애들을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 건지.’
문득 이곳에서 지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윤소희가 인상을 팍 썼다.
“죄, 죄송해요!!”
그 모습에 소녀는 더욱 기겁해서 거의 비명에 가까운 사과를 했다.
윤소희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아니,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이……. 내가 뭐라는 건지. 아무튼, 지금 나가야 한다고?”
“네, 네!”
소녀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윤소희는 앞머리를 마저 정리하고 자리에서 느긋하게 일어났다.
급해 보이는 소녀와 달리 윤소희는 여유 있어 보였다.
‘하여간 그 할머니들 언제쯤 권력을 내려놓을는지.’
윤소희는 소녀의 뒤를 따라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가 할머니라고 부르는 이들은 마녀 본 단에 거주하는 원로들이었는데.
윤소희가 보기에 원로들은 본 단에서 하는 일도 없이 그저 밥만 축내는 것 같았다.
어린 마녀들의 교육과, 전반적인 마녀들의 지침 사항을 ‘대마녀’와 함께 정한다고 하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런 건 본 단에 있는 마녀들 아무나 앉혀 놔도 할 수 있는 거고.’
진즉 일선에서 물러나 후임을 키워도 모자랄 판에…….
윤소희의 눈에 그들은 아직도 권력을 내려놓지 못한 늙은 마녀들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종 회의를 하러 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또 체면이니 뭐니…….’
“하아.”
윤소희는 앞에 걸어가는 소녀의 등에 짙은 한숨을 뱉어냈다. 순간, 소녀의 어깨가 움찔 떨렸지만 지금은 그것까지 신경 써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나타내는 커다란 문이 둘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 도착했습니다. 윤소희 지, 지부장님.”
“응.”
소녀의 고개가 희미하게 위아래로 움직인 뒤, 이내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을 완전히 열어젖힌 소녀가 옆으로 빠지고, 윤소희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로들이 보기 싫은 건 보기 싫은 거고, 그들 앞에서 주눅이 들 이유는 없었으니까.
윤소희는 고개를 빳빳이 들어 높은 위치에 앉아 있는 7명의 원로들을 일렬로 훑었다.
다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윤소희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원로들보다 더 높은 자리, 윤소희가 고개를 위로 꺾어야 보이는 곳에 ‘대마녀’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어머니.’
윤소희는 그녀를 보고 속으로 되뇌었다.
생물학적 어머니라거나 윤소희가 직계라서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었다.
대마녀는 모든 마녀들의 어머니라고 불리고 있었다.
모든 마녀들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사실상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존경의 의미에 더 가까웠다.
윤소희 또한, 대마녀만큼은 원로들과는 다른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탁, 탁, 탁―.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윤소희가 길의 끝에서 발걸음을 멈추자, 그때까지도 턱을 괴고 있던 대마녀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귀찮다는 티가 팍팍 났다.
“발의자가 왔네. 어서 회의 시작하자.”
“예!!”
원로 및 그 밑에 양옆으로 늘어서 있던 마녀들이 큰 소리로 대답하며 자리에 착석했다.
1차, 2차, 3차 그리고 지금의 최종 회의까지.
일주일 간격으로 총 4번째 열리는 회의였는데, 다들 지루해하거나 지쳐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회의에 참석한 인원 대부분이 이번 회의로 인해 소집된 마녀들이기도 했고, 윤소희가 발의한 사안 자체가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마녀들의 존망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안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조금 긴장되네.’
윤소희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대마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귀찮다는 티를 풀풀 풍기던 대마녀는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3차 회의의 결론은 ‘도와주지 말자’였어. 일주일 동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긴 했지만……. 1차도, 2차도 모두 도와주지 말자는 결론이었고.”
대마녀는 무심한 눈으로 윤소희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회의라고 해서 대부분의 여론이 바뀔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데. 그사이에 네가 얼마나 많은 마녀들을 설득했을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도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윤소희는 공손하게 대답하며 원로들을 살짝 노려보았다.
대마녀가 대부분의 여론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원로들이 지금의 결론을 주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한쪽도 도와주지 말고 본인들의 안위만 지키려고 하는 원로들이 자신의 밑에 있는 마녀들을 쥐고 흔들어 댔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윤소희의 눈빛을 받은 원로들이 지지 않고 맞부딪쳐 왔다.
‘이번 회의에서는 원로들의 눈치를 보지 않게 만들어야 해.’
요즘 같은 세상에 거수로 다수결을 정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아직도 고리타분한 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답답한 본 단의 방식에 진절머리를 느끼며, 윤소희는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그저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부탁?”
대마녀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손가락만 펴서 관자놀이 쪽을 긁적거렸다.
“무슨 부탁?”
“이번 회의에서 최종 결정을 내릴 때, 익명 투표로 진행할 수 있게 해 주세요.”
“!”
“무슨!”
쾅―!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원로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익명 투표라니! 어디 애들 학교 반장을 뽑는 것도 아니고!”
“아하핫.”
윤소희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대통령 뽑을 때도 그렇게 하는데, 학교 반장이라뇨?”
“여긴 국가가 아니야! 신성한 마녀의 세계다!”
“그러니까요.”
윤소희는 얼굴에 짓고 있는 미소와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신성한 곳에서 자꾸 눈치를 주고 강요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뭐라?”
“누구라고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만 1차, 2차, 3차 회의 모두 어떤 7분에 의해 분위기가 주도되는 것 같더라고요. 각자 개인이 가진 생각이 있을 텐데, 불이익을 받을까 봐 고분고분.”
윤소희가 명백한 비웃음을 지으며 7명의 원로들을 노려보았다.
“그거야말로 초등학교 수준 아닙니까?”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 마녀가……!!”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네가 말하는 7분이 설마 우리를 말하는 게냐!!”
“적어도 그런 자각은 있으신가 보네요.”
윤소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원로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만.”
당장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던 분위기는 대마녀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귀 아프다.”
“……하지만!”
가장 나이가 많은 원로가 억울하다는 듯이 호소하려 했으나, 대마녀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윤소희를 바라보았다.
“그 정도도 생각하지 못했다면, 상당히 실망할 뻔했어.”
“?”
“이번 투표는 윤소희 지부장의 말대로 익명 투표로 진행한다. 이의 신청은 받지 않는다. 가지고 들어와.”
“!”
윤소희는 대마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으로 들어오는 어린 마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박스가 놓여 있는 이동식 테이블이었다.
‘이미…… 아니, 내가 이렇게 나오기를 기다리셨던 건가.’
윤소희가 헛웃음을 짓고 있으니, 대마녀는 박스 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어 공중에 팔랑팔랑 흔들었다.
“내가 따로 특수 처리를 해 둔 투표용지야. 글씨체도 자동으로 변환되고 추적도 불가능해. 익명이라는 사실은 그것으로 확실히 해 두지.”
이미 대마녀는 정당한 회의를 위한 준비를 해 두었다.
‘……내가 익명 투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면, 끝까지 하지 않으셨겠지.’
어쩌면 그것 자체가 자신에 대한 시험을 겸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대마녀의 지지를 얻은 만큼 윤소희는 최종 발언까지 순조롭게 이어 갔다.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 그녀의 의견은 뱀파이어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쪽이었다.
“어느 한쪽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도태되고 말 겁니다. 승리한 쪽에서는 저희를 믿지 않겠죠. 그럴 바에야, 확실하게 힘을 실어서 승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 승리한 쪽에서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그건 도와주지 않았을 때와 같은 결과 아닙니까?”
“아니지. 우리의 물적 자원을 요구했잖아. 인적 자원까지 요구할 것도 뻔하고. 이렇게 생각이 얕아서야…….”
“그들이 요구한 건 저희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입니다. 애초에 다른 종족을 겨냥하고 만든 물건인데, 그게 저희의 힘이랑 무슨 상관인 거죠?”
“그만큼 상대의 힘을 강하게 해 주는 것이지 않나?”
“실제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때 소모될 자원일 뿐입니다.”
“인적 자원은 잃는 만큼 우리에게 직접적인 손해가 될 텐데.”
“그건 그쪽과 적절한 조율을 통해서 합의를 봐야죠. 저희도 분명 도움을 받을 부분이 있을 겁니다.”
다시 한번 직전에 있었던 회의와 비슷한 양상을 띤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2시간가량 열띤 찬반 의견이 오고 간 뒤.
“최종 투표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각자의 앞으로 하늘거리며 날아온 투표용지에 본인의 의견을 적어 내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총 400개의 투표용지가 대마녀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용케 무너지지 않고 탑 형태로 쌓인 투표용지는 견습 마녀들에 의해 하나씩 공개되었다.
뱀파이어, 뱀파리스 그리고 중립.
3가지 의견이 숫자를 불려 나갔고, 곧 결과가 나왔다.
“음.”
대마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만 돌려 결과를 확인했다.
“앞선 회의의 결과는 모두 무효. 최종 회의에서 나온 결과만을 따른다.”
마녀식 회의의 룰을 입에 올린 그녀는 손가락을 허공에 까딱 움직였다.
“그리고 결정이 났으면 빠르게.”
회의에 참석한 마녀들을 쓱 눈으로 훑은 대마녀가 입술을 말아 올렸다.
“시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