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148화
에르제의 의견으로 시작된 데뷔 1주년 기념 돌잡이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특히 라이브로 진행되었던 돌잡이는 쇼츠로 제작되어 영상이 돌아다니기도 했고, 팬송 또한 곧바로 음원 차트에 진입을 했다.
덕분에 상승세를 이어 나간 토트윈은 5주 연속 음악 방송에서 1위를 차지하며 연말에 있을 시상식에서의 수상 기대감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때문에 이번 연도 마지막 스퍼트를 위해서 토트윈의 일정은 더욱 바빠졌다.
음악 방송, 단발성 예능, 인터뷰 등등.
장 대표가 토트윈의 휴식을 그나마 최대한 배려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지쳐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하루 짬이 난 오늘, 이윤은 거실 혹은 방에 늘어져 있는 토트윈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밖에 나가서 운동 같은 거라도 좀 하고 올래? 아님 다들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데려다줄게.”
“없어여어어.”
소파에 건조 오징어처럼 늘어져 있던 안단테가 몸을 빙글 돌리며 대답했고.
태현우는 멍하니 TV를 보다가 옆으로 스르륵 몸을 기울이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 모습에 이윤이 볼을 긁적이다가 물었다.
“치우는?”
“형은 방에서 자고 있을 걸요. 어제도 늦게까지 연습하고 와서.”
그나마 멀쩡한 상태인 민주혁이 책을 읽으며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살짝 한숨을 내쉰 이윤이 에르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르제는 안단테를 피해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심드렁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그래도 에르제는 민주혁과 마찬가지로 토트윈 중에서는 멀쩡해 보이는 편이었다.
“그러면 은우만 데리고 나가야겠다.”
“?”
에르제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저 어디가요?”
“장 대표님이 호출하셨어.”
“왜요?”
“스케줄 관련해서 네 의사 물어볼 게 있으신 거 같더라. 뭐, 다른 것도 겸사겸사 확인하시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대충 준비하고 나와.”
에르제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귀찮은데.”
“오래 안 걸려.”
오래 안 걸리는 볼일이면 본인이 직접 올 것이지, 꼭 이렇게 오라 가라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장 대표가 제일 높은 사람이니 어쩔 수 없었다.
빠르게 체념한 에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윤을 따라나섰다.
그렇게 숙소에서 모카 엔터테인먼트까지 간 뒤에 에르제는 이윤을 따라 대표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장 대표가 서류를 내려놓으며 그를 반겼다.
“어, 은우 왔니?”
“네.”
둘만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이윤도 같이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그래, 여기 앉아라.”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장 대표가 내어준 의자에 앉았다.
이윤이 그의 옆에 다소곳이 섰다.
“쉬고 있을 때 불러서 미안하다.”
장 대표가 멋쩍게 웃으며 변명을 주워 담았다.
“나도 요즘 정신이 없어서 시간이 도무지 나질 않아.”
“네.”
에르제가 무심히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하자, 민망해진 장 대표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무튼, 오늘 오라고 한 건 물어볼 게 두 개 있어서야.”
“뭔데요?”
“음. 일단.”
장 대표가 옆에 놓여 있던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스테이플러로 찍어 둔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그것을 에르제에게 내밀었다.
“이번에 퇴마사와 관련해서 드라마 하나가 제작 중이더라. 이제 막 오디션 보고 배역 정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에르제가 그것을 받아 들자, 장 대표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주연이나 조연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냥 단역이나 카메오 자리만 남아 있는 상태이기는 한데 누가 너를 추천했다고 하더라고.”
“……저를요?”
에르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연기는 지구에 온 이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결이 애니메이션 더빙이었는데, 이렇게 드라마와 연결이 될 정도는…….
‘아니지 않나?’
혹시 이제는 직속 부하가 된 장진규의 의도인가? 만약 그렇다고 하면 라하임이 자신에게 먼저 말을 해 줬을 텐데.
에르제가 감을 잡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누가요?”
“지서후 알지? 그, 너랑 저번에 같이 더빙에 출연했던 배우.”
“아!”
그러고 보니, 그 늑대 녀석이 배우였지.
얘는 왜 말도 없이 이런 걸 나한테 추천하고 있어.
한쪽 눈을 약간 찡그린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죠.”
“잘 알아?”
장 대표가 목을 뒤로 빼며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왜?”
“친하니까요.”
“친해?”
장 대표의 목이 더욱 뒤로 밀려났다. 에르제가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지서후랑 친군데요.”
“……지서후는 20대 후반 아니던가?”
“대충 그 정도 될 겁니다.”
이윤의 대답에 장 대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윤이나 장 대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에르제는 일족을 제외하고 이 이야기를 따로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에르제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 장 대표였기에, 이내 사실을 캐는 것보다 다른 쪽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뭐 아무튼. 그거야 두 사람 이야기니까 넘어가고.”
목이 원래대로 돌아온 장 대표가 대본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게 드라마 대본인데, 너보고 카메오로 한번 출연하면 어떻겠냐고 물어보더라.”
“카메오요?”
카메오가 뭐더라.
에르제는 인터넷에서 공부한 것을 뒤적거리다가 곧 단어의 뜻을 찾아냈다.
“그럼 하루만 가서 촬영하면 되는 거네요?”
“모르지 그건.”
장 대표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더빙은 목소리로 하는 거지만, 연기는 네 표정까지 다 보이니까 네 연기가 못 써먹을 수준이라면 며칠씩 촬영해야 할 수도 있어. 그것도 아니면, 아예 출연 못 할 수도 있을 거고.”
“음.”
“아무튼 그래서 나도 고민이야. 지서후가 너를 굳이 추천한 의도도 잘 모르겠고, 지금 너희들 한창 바쁜 시기니까. 물론, 드라마에 네 얼굴이 한 번 나오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크겠지만……. 그래도 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네 생각도 들어 보고 싶어서 묻는 거야.”
장 대표가 데스크톱에 띄워 둔 토트윈의 스케줄표를 보며 턱을 괴었다.
“아직 드라마 제작이 들어간 건 아니라서 아마 내년 초쯤 될 것 같기는 한데…… 그때 되면 슬슬 4집 앨범 준비에 들어갈 때니까 바쁠 거야.”
장 대표의 말에 에르제는 잠시 고민했다.
그가 하려는 말의 의도는 파악했다.
드라마에 잠깐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있겠지만, 토트윈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 바빠질 것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시간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렇지 않아도 스케줄이 많은데 에르제가 그것까지 추가로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체력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에르제는 차분히 손익을 따졌다.
이번 연말이면 시상식 준비 때문에 시간이 아예 나지 않기에 거절했겠지만, 내년 초라면 다르다.
‘아마 예능이나 그런 것까지 나간다고 하더라도…… 카메오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계속해서 드라마 촬영을 가야 하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뱀파이어이기에 체력적으로 문제가 생길 것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르제는 연기에 자신이 있었다.
장 대표는 그의 연기력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지만, 에르제는 이미 카테이아 대륙에서부터 다져 온 실력이 있었다.
지서후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챘기에 추천했을 터.
에르제는 입술을 꾹 눌렀다.
‘오히려 연기 쪽으로도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요즘 다른 아이돌 그룹을 보면, 연기 쪽으로도 활발히 활동하는 이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게 결국 토트윈의 인지도에 영향을 미치겠지.’
그것과 관련해서 출연한 드라마의 OST를 부르게 될지도 모르고. 실제로 그런 사례를 보기도 했고.
곧 생각을 정리한 에르제가 자신감을 내비쳤다.
“한다고 해 주세요.”
“정말 괜찮겠어? 내가 오늘 너한테 물어본 건 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네 의사도 들어 봐야 해서 묻는 거지.”
“괜찮아요. 그리고 저, 연기 잘해요.”
“…….”
그 말에 장 대표의 불안감은 더욱 커진 것 같아 보였는데, 기분 탓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는 은우 연기 한번 시켜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이윤이 과거 대기실에서 에르제가 했던 연기를 떠올리며 말했고, 결국 장 대표는 수긍하고 말았다.
“그래, 하고 싶다는데 내가 더 말해서 뭐하겠냐. 그럼 이건 그렇게 진행하는 걸로 하고.”
그렇게 말한 장 대표는 잠시 입을 다물고 더욱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오늘 두 가지를 물어보겠다더니, 지금이 그 두 번째 질문 시간인 듯했다.
에르제가 가만히 기다리자, 장 대표가 큼큼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기억은 좀 어떠냐?”
“기억?”
예상치 못한 말에 에르제가 멍하니 되물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 저번에 조금 돌아온 것 말고는 딱히 없어요.”
“흠……. 그래?”
장 대표는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두들겼다.
“네가 사고가 난 뒤로 벌써 1년이 지났어. 어떻게든 데뷔를 해서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불안하기는 해.”
“뭐가요?”
“네 입이.”
처음엔 조심스럽게 말하던 그의 말투에 이제는 대범함이 묻어 나왔다.
“네가 그동안 했던 일과 말이 좀 많았어야지. 아마 이번에 시상도 하게 될 거고, 가요축제 같은 무대에도 서게 될 텐데 또 사고를 칠 수는 없잖아.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고.”
‘점점 더 대중에게 노출되는 빈도가 많아진다고.’ 장 대표는 그렇게 뒷말을 중얼거리듯이 말하곤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네 기억에서 상식만이라도 살려 보는 게 낫겠다 싶어서.”
“저는 상식이 풍부한 지구인인데요.”
에르제가 반발했지만, 장 대표와 이윤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녀석이 애가 생겼다고 톡을 보내냐?”
“연예인 병도 마찬가지지.”
동시다발적인 공격에 에르제가 허허롭게 웃었다.
“웃지 마. 정들어.”
장 대표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에는 얘 웃는 거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애 분위기가 왜 이렇게 바뀐 건지.”
“카메라 마사지 덕분이에요.”
“그래.”
대충 흘려들은 장 대표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연말 시상식까지 끝나고 난 이후에, 누구를 좀 만나 봤으면 좋겠다. 이건 네 의사를 묻는 게 아니고, 강요이기는 해.”
“설마 슾…….”
에르제가 양손으로 몸을 가리며 기겁하는 표정을 짓자, 장 대표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야……! 그거 말고 인마!”
“그럼요?”
“사고 때문에 기질성 기억장애일 확률이 높다고 하니까 그거 관련해서 치료를 진행할까 해. 그리고 조금 더 본격적으로 교육도 진행하고.”
그 말에 미간을 한껏 좁힌 에르제가 되물었다.
“성 기억장애요? 이 몸으로는 그런 적이 없는데?”
“…….”
입이 딱 벌어진 장 대표가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벌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통보야. 그냥 하는 걸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