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145화
지구에 온 이후 늘 꿈에 그렸던 시간인 만큼, 에르제는 일족과 정다운 담소를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옛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틈틈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회포를 나누고 있을 만큼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오늘 에르제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도 라하임이 자신을 촬영장에서 픽업하러 왔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곧 라하임은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로드, 이제 가야 할 시간입니다.”
“벌써?”
라하임의 말에 에르제는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확실히 지금 출발해야 고지했던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예. 차가 막힌다는 거짓말로도 한계가 있어서.”
“알았어.”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이제는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이들이었다.
자신이 보낸 일족 모두를 만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잠시.”
에르제는 재촉하는 라하임에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원하는 뱀파이어를 찾았다.
뱀파이어들 중에서는 특이하게 민머리인 이였다.
그의 이름은 바란. 녀석은 라하임이 뱀파이어 진영의 수장 노릇을 시켰던 이였다.
에르제가 가까이 다가가자, 바란은 에르제에게 목례를 했다.
“로드를 뵙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래도 로드는 제 주인이신 라하임 님의 주인님이십니다.”
에르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바란과는 일족과의 추억 여행 이후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으나, 그때는 그저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기만 했을 뿐.
정작 그에게 궁금했던 점을 묻지는 못했다.
하여 에르제는 이곳을 떠나기 전에 그를 찾은 것이다.
“바란.”
“하명하십시오.”
“궁금한 게 있어.”
“무엇입니까?”
바란이 공손하게 물어왔다.
에르제는 윤소희의 기억을 읽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뱀파이어가 인간 자식을 낳을 때, 왜 그 자식을 뱀파이어로 만들려고 하는 거야?”
“아!”
바란은 별것 아니라는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세력을 늘리기 위해서입니다.”
“…….”
그의 대답에 에르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세력을 늘리기 위해서, 라는 말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간으로 태어난 아기가 뱀파이어가 된다면 세력이야 늘어나겠지.
“그 과정에서 아이가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아?”
“예. 뱀파이어가 되는 아이들은 희박하죠.”
바란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이어 갔다.
“대신 그만큼 강력합니다.”
바란이 손짓을 하자, 그의 뒤로 그림자 세 개가 빠르게 다가왔다.
“뱀파이어의 피는 대를 거듭할수록 옅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생기는 거고요. 하지만, 그렇기에.”
바란은 방금 다가온 뱀파이어 셋을 곁에 서도록 지시했다.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뱀파이어가 된 이들은 순혈 뱀파이어가 됩니다. 쿼터 밑에서 순혈이 태어나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순간이지요.”
에르제가 바란이 내세운 뱀파이어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말을 이었다.
“나날이 커지는 뱀파리스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의 눈에 광기가 감돌았다.
“라하임 님이 저희를 지키기 위해 결국 뱀파리스들의 밑으로 들어가셨을 때, 저는 결심했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
에르제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해는 했어.”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어째서……!”
“내가 있으니까.”
에르제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 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그래, 명령인 걸로 하자. 네가 말했지. 내가 네 주인의 주인이라고.”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리라고 믿어.”
“예.”
바란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지워진 뒤였지만, 에르제는 굳이 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라하임이 없는 동안 바란이 고생을 많이 한 것도 사실이고, 그가 했던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상은 위험해.’
문득 레스터의 얼굴이 떠올랐을 정도였다.
‘이런 녀석을 라하임은 어떻게 통제하고 있었던 거지.’
사실상 뱀파리스에 더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가.
에르제는 바란의 어깨를 한 번 툭 쳐 주고는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일족도 아니고, 레스터 때와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지만, 에르제는 이내 그 생각을 거두었다.
라하임 때문이기도 했고, 그간 일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조금 가혹하지.’
에르제는 차에 올라탄 이후, 정리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라하임, 네가 시킨 건 아니지?”
“예. 제가 떠나고 독단으로 한 일로 보입니다.”
“그래.”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의 주시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아. 그 순혈 뱀파이어라는 이들도 마치 바란의 친위대처럼 보였으니까.”
“…….”
“네가 믿고 일을 맡긴 녀석이겠지만, 이후 그 속내가 어떻게 변했을지는 모르는 일이야. 레스터도……. 일족인 레스터도 그랬으니까.”
“예, 로드. 그럼 제가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라하임은 그렇게 대답하고,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 * *
기다려 왔던 순간이 지나가고, 시간이 빠르게 흘러 어느덧 10월 31일이 되었다.
토트윈은 소속사에서 대관한 스튜디오에 미리 모여서 간단한 리허설을 진행했다.
마지막 팬송을 부르는 것까지 리허설을 마친 뒤에야, 토트윈은 스튜디오 한쪽에 앉아서 쉴 수 있었다.
윤치우는 스튜디오 내부를 한 번 쓱 훑고는 감회가 새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데뷔 1주년이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 시간 진짜 빨리 간다.”
“그만큼 우리가 열심히 했다는 거예여.”
안단테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즐거운 일을 하면 시간이 빨리 가잖아여.”
“젊음이 부럽구나.”
태현우가 있지도 않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뇌에 찬 얼굴을 만들었다.
“으.”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민주혁이 질색했다.
“이따 라이브 켰을 때도 그래라.”
“같이할래?”
“아니, 절대.”
민주혁의 정색에 태현우가 킥킥 웃었다.
그렇게 떠들고 있으니, 오늘 돌잡이 사회를 맡으러 와 준 선배가 다가왔다.
“안녕. 다들 잘 지냈어?”
“아!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토트윈이 전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서연에게 인사를 했고, 에르제도 예의 고고한 인사법으로 존경을 표했다.
“넌 매번 나한테 그렇게 인사하더라?”
한서연이 풋, 하고 웃었고 태현우가 말을 덧붙였다.
“얘는 팬들한테도 그래요.”
“알아. 나도 봤어.”
‘블링블링’은 여자 아이돌 그룹 중에서는 꽤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고, 그래서 같이 음악 방송 무대에 섰던 적도 많았다.
한서연은 최근 음악 방송 무대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분위기가 좀 바뀌어서 그런가? 잘 어울리던데?”
“연습을 많이 했으니까요.”
“……그런 걸 연습도 하는구나.”
한서연이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3주 연속 1위 축하해.”
“아……! 감사합니다.”
윤치우가 빠르게 손을 맞잡으며 그들을 대표해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서사도 잘 쌓고 있는 것 같고,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면 되겠던데?”
한서연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 데뷔 쇼케이스 할 때도 내가 사회를 맡았는데.”
“아, 맞아여. 기억나여.”
안단테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때로부터 벌써 1년이나 지났네. 우리는 겨우 정규 1개에 싱글 1개 냈는데, 너희들은 진짜 바빴겠다.”
“하하……. 휴가를 1번밖에 못 갔어요.”
태현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한서연이 풋 하고 웃었다.
“원래 장 대표님 스타일이 그래. 잘될 때 마구 몰아치시는 스타일이야. 그만큼 너희한테 신경을 제일 많이 쓰고 계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아무튼 이따가는 라이브로 진행되니까 너무 긴장들 하지 말고 편하게 해.”
“네, 선배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서연이 손을 흔들고는 자리를 떴고, 토트윈은 반으로 접었던 허리를 다시 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튜디오의 공기가 확 바뀌었다.
촬영이 임박했다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읏.”
덩달아 같이 긴장한 안단테의 모습에 에르제는 그의 등에 손을 살짝 올렸다.
“?”
안단테가 뒤돌아보았으나, 에르제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 줄 뿐.
곧 그의 손에서 약하게 흘러나온 혈기가 빠르게 뛰고 있던 안단테의 심장을 조금 진정시켜 주었다.
“어…….”
안단테가 멍한 얼굴로 에르제를 바라보았지만.
탁, 탁―.
에르제는 그의 등을 두어 번 두들겨 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시작하겠다.”
이어진 에르제의 말에 토트윈의 시선이 일제히 한서연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토트윈보다 먼저 스튜디오 왼편에 나와 대본을 들고 서 있었다.
곧 라이브를 시작한다는 말과 함께, 카메라 촬영 영상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한서연은 반갑게 카메라를 보고 인사하고는 텐션을 높인 상태에서 진행을 이어 나갔다.
“오늘 모카 라이브 진행을 맡은 한서연이에요! 반갑습니다~!!”
그녀의 말과 함께, 라이브로 진행되는 만큼 채팅창도 활활 불타올랐다.
― 오빠들은 어디 있어요? 언제 나와요?!
― luv tot-win!
― (입틀막 이모티콘)
― 드디어!! 5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 언니, 예뻐요!
지금까지 수많은 라이브를 해 보았던 한서연도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채팅창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한서연은 토트윈의 팬들과 소통하는 대신, 토트윈을 빨리 무대로 불러오기로 결정했다.
“팬분들이 정말 많이 기다리고 계신 것 같은데, 오프닝은 이쯤하고 빨리 토트윈을 어서 모셔 볼까요?”
‘네!!’라는 글자가 채팅창에 온통 도배가 되었다.
그리고 한서연의 말뜻을 알아들은 오디오 팀에서 스튜디오 내에 음악을 틀었다.
토트윈의 노래가 아니라, 생일 때 부르는 축하 노래였다.
빠빠바바바바밤―!
Congratulation, Congratulation~!
경쾌한 음악과 함께, 토트윈이 스튜디오에 일렬로 등장했다.
오늘 그들의 의상은 캐주얼.
조명을 밝게 켜 둔 스튜디오의 분위기에 맞추어 화사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방긋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등장한 토트윈은 중앙에 쭉 늘어섰다.
‘하나, 둘.’
윤치우의 입모양과 함께, 토트윈은 공식 인사를 크게 외쳤다.
“Trick or treat! 안녕하세요. 토트윈입니다!!”
“안녕! 나는…… 트릭, 트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