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144화
윤소희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아마 에르제의 제안에 대해 가능성 여부와 실효성을 따지는 듯했다.
“…….”
조금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에르제는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다시 연락 주세요. 저는 연습을 하러 가야 해서.”
이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현재 연습하고 있는 멤버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잠깐 초점이 풀려 있던 윤소희가 에르제를 바라보며,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그럼.”
달칵―.
에르제가 문을 닫고 나가고 윤소희는 그대로 의자를 한 바퀴 회전시켰다.
“후우.”
그녀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차분한 톤에서 오고 간 대화였음에도 마치 한바탕 전투라도 치른 듯한 기분이었다.
“머리 아파.”
윤소희는 방금 나간 에르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그저 서은우와 그 부모에 대한 동정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래서 서은우를 뱀파이어로 만들기 위한 의식을 진행했고, 실제로 성공도 했다.
‘……아직 서은우의 영혼이 이겨 내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번에 기억이 조금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에르제의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윤소희는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윤소희는 헛웃음을 흘리며 메모지 위를 검지로 쓸었다.
그저 다른 세계의 음유시인 뱀파이어를 불러왔을 뿐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진득하게 그와 얽히게 된 걸까.
지난 일들을 떠올리니 다시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오늘의 이야기까지.
윤소희의 표정이 차차 차갑게 식어 갔다.
‘일족들을 이끄는 로드에다 이제는 뱀파이어 진영까지 흡수했고…….’
뱀파리스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마녀들의 힘까지 빌려 달라고 이야기했다.
“…….”
에이리스 그리고 에르제. 뱀파리스와 뱀파이어.
마녀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둘 모두 인간이 아닌 종족일 뿐. 에르제를 도와주고 있는 것도 그저 최악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계속 휘둘릴 수는 없어.’
그녀는 마녀였고, 굳이 종족으로 따지면 인간이었다.
뱀파이어인 에르제를 백 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손가락으로 쓸던 메모지를 들어 올린 윤소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쳤다.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오늘 에르제에게 들었던 말과 부탁은, 앞으로 마녀들의 존망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입술을 꾹 짓누른 윤소희는 곧장 실장실을 나섰다.
‘어머니를 만나 뵈어야겠어.’
걸음을 옮기는 윤소희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 *
10월 중순이 될 때까지 윤소희에게서 답이 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와 이야기를 한 날 윤소희는 휴가를 내고 사라졌다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2주가 넘도록 회사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토트윈의 데뷔 1주년 돌잡이 때문에 한창 바쁜 시기임에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명확했다.
‘아직도 혼자 생각한다고 끙끙 앓고 있는 건 아닐 테고.’
에르제는 스마트폰을 차 시트에 내려놓으며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 마녀 본단에 논의를 하러 간 거겠지.’
에르제는 차창에 비친 밤 도로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하긴, 자신이 좀 과하게 요구하기는 했다. 윤소희 혼자서 결정하기는 어려웠을 터.
‘그래도 그쪽에게 선택권은 없을 텐데.’
차창에 머리를 쿡 박은 에르제가 미소를 지웠다.
‘나랑 뱀파리스를 저울질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최악보단 차악을 선택할 테니까.’
마녀는 단일 단체로서는 한없이 약한 쪽이었다.
인간으로서 다른 종족을 상대할 정도는 되지만, 뱀파이어 사냥꾼이나 마법사처럼 강력한 힘은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저주는 뱀파이어 종족에게는 통하질 않기도 했고.
‘결국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제외하면 이용 가치는 크지 않지.’
에르제는 차창에서 이마를 떼며 시트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르제가 마녀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유는 하나였다.
쓸 만한 물건이 많다는 것.
그들의 전투력을 상승시키거나 혹은 상대의 전투력을 반감시키거나. 마녀들의 물건은 최소한 둘 중의 하나는 해 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여 에르제는 그들에게 전력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물건들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편이 훨씬 도움이 되었으니까.
‘뱀파리스 말고도 다른 종족들까지 이 세계에 넘어와 있는 상황이니, 마녀들이 그 정도도 해 주지 못한다고 하면 곤란해.’
조금은 초조해진 마음에 에르제의 몸이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그 모습에 운전을 하고 있던 라하임이 한 마디를 했다.
“로드, 그렇게 앉으면 허리에 좋지 않습니다.”
“……너도 이윤한테 습관성 잔소리 증후군이 옮았어?”
“그런 병은 없습니다.”
“있을걸.”
“로드가 있다고 하면 믿겠습니다.”
라하임이 무표정으로 대답하자, 에르제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라하임에게 물었다.
“라하임, 너는 윤소희가 어떻게 나올 것 같아?”
“로드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까 합니다.”
라하임이 잠시 고민했다가 입을 열었다.
“다만, 조금 걱정인 것은…….”
“?”
“뱀파리스도 마녀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이겠지요. 상대는 에이리스니까요.”
“……음.”
에르제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소희는 서은우의 편이라 했으니 이쪽에 더 우호적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과연 다른 마녀들도 그럴까?
이곳이 카테이아 대륙도 아니고, 애초에 그들이 뱀파리스와 뱀파이어를 겉만 보고 제대로 구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그래서 윤소희가 본단까지 간 건가? 그런 사태를 막으려고.”
에르제가 중얼거리자, 용케도 그 말을 들은 라하임이 동의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아마……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그들 쪽에서도 두 파로 갈라져 싸우고 있는 건 아닐지.”
“윤소희가 직계라고 했으니까 그쪽의 힘이 더 크지 않을까? 물론…… 직계가 그녀 혼자라는 전제하에.”
쓰게 웃으며 대답한 에르제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 아프다.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 같네.”
“모두에게는 책임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라하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라하임이 핸들을 잡은 채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지금도 그 책임을 다하셔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그렇지.”
에르제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이내 문을 열고 먼저 내렸다.
곧 주차를 마친 라하임이 그에게로 다가와 길을 안내했다.
‘……전에 윤소희의 기억에서 본 것과 똑같네.’
에르제는 커다란 성처럼 지어진 건물을 보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마치 인터넷에서 본 듯한 유럽식 건물의 외관은 카테이아 대륙에서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설마, 네가 설계했어?”
“예.”
어쩐지 기시감이 들더라니.
에르제는 살며시 웃으며 건물 안쪽으로 들어섰다.
길게 뻗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연회장에 먼저 모여 있는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라하임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따라 쭉 들어간 에르제는 이내 고급스럽게 꾸며진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검은색 바탕의 문에는 금색 나뭇가지 문양이 줄기줄기 뻗어 있었다.
무심코 그 모양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던 에르제는 손잡이에 손이 닿자 그대로 멈추었다.
‘결국 정말로 이런 날이 오는구나.’
처음 이곳에 와서 오늘 같은 날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소망했던가.
쿵, 쿵.
평소에는 잘 들리지도 않던 심장 소리가 고막을 세차게 때려 댔다.
에르제는 손잡이를 잡은 채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고대한 만큼 두려워서.
이전과 같을까, 레스터처럼 변한 이들은 없을까, 여전히 나를 로드로 믿고 따를까.
그런 그의 어깨에 라하임의 손이 얹혔다.
“로드.”
“…….”
“로드.”
“알아.”
그런 녀석들이 이곳까지 왔을 리가 없지 않은가.
라하임의 밑에 모여 여태 자신을 기다려 왔을 리가 없다.
“고마워.”
에르제는 조금씩 멀어져 가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라하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끼이익―.
그리고 에르제는 그대로 손목에 힘을 주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연회장은 그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고요했다.
검은색 로브를 깊이 눌러쓴 이들이 침묵을 지킨 채로 에르제가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찰나의 기쁨을 느끼기 위해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
에르제는 연회장 맨 앞에 위치한 단상의 중앙까지 걸어가 몸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리고 눈앞의 그들을 찬찬히 살폈다.
서 있는 자세와 호흡 소리만 들어도 누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서 에르제는 그만 숨이 턱 막혔다.
세리나, 플랑, 라하임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수많은 일족들.
다른 세계에서, 다른 모습으로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사뭇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탁―.
곧 라하임까지 로브를 뒤집어쓴 상태로 군중의 가장 앞에 섰다.
“…….”
잠시 연회장 내부를 찬찬히 훑어가던 에르제는 마침내 두 입술 사이로 음성을 뱉어 냈다. 그의 목소리는 한껏 떨리고 있었다.
“회색 구름 사이로 비치는 달빛은 피보다 붉고 차가우리라. 자욱한 안개 속에서는 정신을 깨울 것이고, 깊은 어둠에서는 앞을 밝혀 주리라. 이윽고 다가온 생의 끝에서는 무수한 별빛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나리라.”
에르제는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오른팔을 아래로 원을 그리며, 최대한의 존중을 담아 그들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때에 이지러진 달빛이 그대의 마음에 깃들기를.”
찌르르르―.
에르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기가 강하게 진동했다.
“이지러진 달빛이 그대의 마음에 깃들기를……!”
로브를 뒤집어쓴 그들이 마지막 말을 한목소리로 반복하며, 아래로 훅 가라앉았다.
그들 모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들의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그리고 각자 한 명씩 앞에서부터 머리에 쓴 로브를 벗었다.
원래 알고 있던 모습들은 아니었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껍데기가 바뀌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에르제는 그들 모두를 알아보았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키얀, 제리, 바카룬…….”
맨 앞부터 하나씩 이름을 읊어 가자, 그들의 표정이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상태로 일그러졌다.
어쩌면 자신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아닐까.
에르제는 얼굴 근육이 마비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모든 일족들의 이름을 불렀다.
“……게일.”
이윽고 일련의 행위가 모두 끝이 났을 때.
에르제는 조금 높이 솟아 있던 단상에서 아래로 내려와 무릎을 굽혔다.
일족들과 시선의 높이가 얼추 비슷해졌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에르제는 시린 미소를 지으며 붉은 입술을 살짝 위로 끌어올렸다.
“내 아이들아.”
살아 있어 줘서, 기다려 줘서…….
그 외에 수많은 말들이 압축되고 또 압축되어 세 글자에 꾹꾹 눌러 담겼다.
“고맙다.”
에르제의 눈동자에 일족의 모습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