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143화
굳이 윤소희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저번에 잠시 휴가를 갔던 건 특이한 케이스였고, 보통 낮 시간대면 그녀는 항상 모카 엔터테인먼트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에르제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온갖 짜증을 가득 담은 채로 서류를 뒤적거리던 윤소희가 눈동자만 올려 문으로 들어오는 이를 바라보았다.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왔다는 사실에 이미 신경질적인 표정을 장전하고 있었다.
“누가…….”
아니나 다를까, 불청객에게 한 마디 하려던 윤소희는 방문을 닫는 사람을 확인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윤소희는 서류를 뒤집어 놓더니 깍지를 낀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으으…….”
조금은 뭉친 어깨가 풀린 건지, 시원하다는 듯이 소리를 뱉어 낸 윤소희가 에르제에게 물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조금 전까지 회의하고 있던 거 아닌가?”
“맞아요.”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실장실에 놓여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부탁할 게 있어서요.”
“부탁?”
윤소희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미간을 좁혔다.
“부탁할 거 있을 때 매번 코코아톡으로 하더니, 오늘은 웬일로 직접 찾아왔대?”
에르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윤소희가 정말 자신이 직접 찾아 온 이유를 몰라서 그렇게 말한 건 아니었으니까.
역시나 윤소희는 그것을 되묻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래서, 부탁할 게 뭔데?”
“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하는 게 좋을까.
잠시 뜸을 들인 에르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하임을 찾았다는 건 말씀드렸죠.”
“응. 이번에 매니저로 들어왔더라. 근데? 걔 잘 봐달라고?”
“아니, 그건 아니고.”
그건 라하임이 알아서 할 일이다. 본인이 선택한 일이니까.
고개를 저은 에르제가 말을 이었다.
“아직 그쪽한테 말을 안 한 게 있어서요.”
“뭔데?”
“에이리스, 라고 알아요?”
“에이리스?”
윤소희는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아니? 그게 뭔데?”
“뱀파리스들의 로드요.”
“……뭐?”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던 윤소희의 몸이 반쯤 위로 들렸다.
뱀파리스라는 종족이 발견된 게 수백 년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 종족의 조직도는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다.
“간부도 아니고…….”
마녀들의 네트워크로도 그쪽의 로드와 간부들이 누구인지 전혀 밝혀내지 못했는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직접 만났거든요.”
“뭐?”
결국 윤소희의 몸이 의자에서 완전히 떨어졌다.
“누군데? 어떻게 생겼어? 강해?”
‘이럴 줄 알기는 했는데.’
에르제는 머리를 긁적이며 가까이 다가오는 윤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그래서!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것까진 말해 주긴 어려운데요.”
“부탁할 거 있다며? 등가교환은 당연한 거 아니야?”
“그래서 알려 드렸잖아요. 뱀파리스 로드가 누구인지.”
“이름만 알려 주면 내가 퍽이나 오, 그래? 하고 믿겠다, 그렇지.”
“믿었으니까.”
에르제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윤소희를 가리켰다.
“지금 저한테 그렇게 묻고 있는 거 아닌가요?”
“…….”
윤소희가 눈을 가늘게 만들며 입술을 짓눌렀다.
“전에는 그래도 담백한 맛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저를 맛본 적이 있어요? 어느 틈에?”
에르제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자, 윤소희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농담이에요.”
어깨를 으쓱한 그는 내렸던 오른쪽 다리를 꼬았다.
“뭐 정말로 이름만 알려 줄 생각은 아니었어요.”
“……알았어. 일단 가만히 듣고 있을게.”
윤소희는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다시 자리로 돌아가 털썩 앉았다.
회전식 의자라 관성에 따라 빙글 한 바퀴 돌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에르제가 입술을 떼었다.
“이름은 에이리스, 여성체, 허리까지 오는 긴 흑발…… 이긴 한데. 뭐, 외관은 더 말해 봤자 의미는 없을 것 같네요. 애초에 바깥에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아서.”
에이리스가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것은 직접 목격을 했으니까.
“왜?”
“나돌아 다니기 좋은 상태가 아니라서요.”
에르제가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다.
“지금 걷지 못하는 상태예요.”
“아.”
윤소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메모지에 빠르게 휘갈겨 썼다.
에르제가 말해 주는 정보를 메모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언제 회복될지는 몰라요. 계속 경계하고 있어야 해요.”
“그렇겠지. 불편한 몸을 그대로 둘 이유가 없으니까.”
“네.”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갔다.
“그리고…… 당장은 전쟁을 벌인다든가 뭘 하려는 생각은 없어 보이기는 했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윤소희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만약 그럴 생각이었으면,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진즉에 전쟁이 터졌을 거니까요.”
에르제는 쓴 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래서 더 무섭기는 해요. 뒤에서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 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으음.”
윤소희와 에르제, 둘 모두 뱀파리스들의 특성은 인지하고 있었다.
뱀파이어, 인간, 그 외의 다른 종족들. 그들 모두를 자신들보다 하등하다고 여기며 무시하는 게 뱀파리스였다.
그래서 카테이아 대륙에서는 심심하면 온갖 종족들과 국지전을 벌이기도 했었다.
“이곳 세상에 적응해서 기업이나 정치, 연예계…… 그런 쪽으로 뱀파리스들이 진출해 있기는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하고 있을 리는 없겠죠.”
“후우.”
윤소희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럼 결국…… 앞으로 뭘 할지는 모른다는 거네.”
“그것까지는, 네.”
부정적인 대답과는 다르게 에르제는 씩 웃었다.
“대신, 대비는 할 수 있겠죠.”
“……대비?”
“네. 에이리스는……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뭘 하려고 할지,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대략적으로 추리할 수는 있었다.
에르제는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일단 우선적으로 본인의 몸 상태를 회복하려고 할 거예요. 그게 뱀파리스들을 움직이기 위한 선제 조건으로 삼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회복이 되고 나면 예상되는 건 일단 3가지 정도예요. 첫째는 최악의 상황이겠지만, 당연히 전 인류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 사실 전쟁이라고 말은 하지만, 일방적인 살육전이 되겠죠.”
“하지만 우리도 충분히 그 점을 인지하고 있고, 대비도…….”
“아니. 늦어요.”
윤소희가 반발하려던 것을 에르제가 단칼에 쳐냈다.
“새로 온 세계에서 벌이는 전쟁인데, 과연 무작정 시작을 할까요? 에이리스는 통제 불가능한 녀석들을 통제하는 괴물이에요.”
에르제는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머리도 그만큼 좋고요. 지금 그 정도의 안일함이면 전쟁은 시작하자마자 끝이 날 거예요.”
“…….”
“그리고 두 번째, 살육전까지는 가지 않는 것. 지금의 상황에서 조금 더 나아가는 거죠. 정재계, 그리고 매혹의 힘을 쓰기 좋은 연예계……. 아마 그 외에도 많은 곳들에 깊이 침투해 들어가겠죠. 죽이거나 뱀파리스로 만들지는 않겠지만, 결국 인간들이 지배당한다는 점에서는 변함없을 거예요.”
그 말에 윤소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의 것은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지만, 이번 에르제의 말은 조금 더 피부로 크게 느껴져서일 것이다.
현재 뱀파리스들의 움직임을 보면, 그 결괏값이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와서일 것이다.
윤소희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들도 노력 중이야. 현재 파악한 뱀파리스들의 움직임도 계속 주시하고 있고, 인간들을 건드리려고 하면 막고 있어.”
“그건 좋은 소식이네요. 우리는 뱀파리스들의 간부와 로드가 누구인지만 파악했을 뿐이고, 그 밑에 있는 일반 뱀파리스들은 대부분 모르니까요.”
지금 자신에게 있는 정보는 예전 김지태와 안병인의 머릿속을 뒤져서 찾아낸 뱀파리스들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다행히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와 목적이 맞물린 상황이었다.
에르제는 속으로 만족감을 삼켰다.
‘……카테이아 대륙에서는 마녀들이 뱀파리스까지 견제해 주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이곳은 인간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이라 그런지, 그런 부분들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하기가 한결 편해졌다고 여기며, 에르제가 소파 뒤로 몸을 기대었다.
그 모습에 윤소희가 먼저 운을 뗐다.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럼, 세 번째는?”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게 세 번째에요.”
“……지금 상태를 유지한다고?”
“네. 제일 희망적인 관측이지만, 지금처럼 그냥 적당한 영향력만 행사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뭐랄까……. 인간들과의 화합?”
“……화합? 뱀파리스가?”
윤소희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희망적인 관측이라고 했잖아요. 원래 살던 곳과는 다른 세계에 왔으니 그에 맞춰서 사는 방식을 바꾸는 거죠.”
“아.”
말뜻을 이해한 윤소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이 그럴 생각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먼저 공격하는 건 괜히 벌집을 건드리는 꼴이 되겠네.”
“그렇겠죠. 그러니까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해야 하는 거고요.”
“그래서 나한테 부탁을 하러 왔다?”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소희가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미리 말해 두지만, 저번에 라하임을 찾아 달라고 했을 때처럼 마녀들을 움직이는 건 쉽지 않아.”
“하지만, 결국 제가 먼저 찾아냈죠.”
굳이 따지자면 라하임이 자신을 찾아온 거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에르제가 입꼬리를 올렸다.
“엄청난 수의 마녀들을 움직이는 거라고 했던 것치고는…… 좀.”
“……뱀파리스 본진에 머리 박고 꽁꽁 숨어 있던 놈을 어떻게 찾아내냐?”
윤소희가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리 와 닿지는 않았다.
“결과가 과정을 설명하는 법이에요. 그동안 노력을 별로 안 기울였던 걸 수도 있죠.”
에르제가 피식 웃고는, 반발하려는 윤소희를 제지했다.
“아무튼, 이번에는 그렇게 많이 움직일 필요도 없어요.”
“……그럼?”
에르제가 상체를 숙이며 무릎 위로 팔꿈치를 얹었다.
“이번에 뱀파이어 쪽은 제가 전부 흡수했어요.”
“……어디를? 설마, 뱀파이어 진영을 전부……?”
“네. 장진규가 속해 있는 곳이요.”
“하…….”
윤소희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네가 뱀파리스 로드를 직접 만났다는 것보다 훨씬 믿기 어려운 말인데?”
“그건 조만간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뱀파이어 진영이 자신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곧 인지할 수 있을 거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에르제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니까 이제 그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해서, 뱀파이어 진영을 감시하던 마녀들을 뱀파리스 쪽으로 돌려 주셨으면 해요. 이 정도라면 원래 하던 일을 바꾸는 것뿐이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요.”
“…….”
그러나 이번만큼은 대화의 흐름을 잡지 못했는지, 윤소희가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지금은 이해 못 해도, 뱀파이어 쪽이 내 수중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면 괜찮아진다.’
에르제는 그렇게 판단을 내리고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해요.”
“……지원?”
“네. 마녀들이 만든 물건들 중에서 우리들에게 쓸모 있는 것들 전부요.”
에르제가 표정을 대번에 굳혔다.
“나는 아이돌을 하고 있는 지금이 좋아요.”
한층 또렷해진 동공이 눈동자에 맺혔다.
“그러니까 그 일상을 지키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