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141화
에이리스가 살아 있었고, 심지어는 이 세계에까지 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라 에르제의 표정은 세리나의 집에 도착한 후에도 잔뜩 굳어 있었다.
노예 계약에서 풀려난 라하임이 기뻐하는 대신 슬슬 에르제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유일하게 플랑만이 멀뚱멀뚱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로드, 도착했다. 들어가야 한다.”
“어? 아.”
에르제는 깊은 상념에서 빠져나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옮긴 세리나의 거처에 도착한 뒤로, 들어가지도 않고 문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살짝 털어 낸 에르제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가격에 구한 오피스텔이라고 했는데, 안은 세리나의 성격답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가끔 이곳에 들르는 플랑은 익숙하게 조그만 냉장고를 열어 음료수를 꺼내 왔다.
“날아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마셔라. 라하임.”
“아, 고맙다.”
라하임이 오렌지 주스를 받아 들고, 뱀파이어 수에 맞춰서 음료를 컵에 따랐다.
‘……그래도 어떻게 셋은 찾았네.’
레스터까지 치면 넷이기는 한데, 이곳에 와서 뱀파리스 쪽에 붙은 듯하니 넘기고.
에르제는 눈앞의 그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어느 마을의 어린 뱀파이어였지만, 지구에서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아와 지금까지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세리나.
경호 대장이었고, 지금도 경호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플랑.
‘그리고 라하임.’
에르제의 시선이 오렌지 주스만을 바라보고 있는 라하임에게서 멈추었다.
녀석도 인간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인지, 과거 뱀파이어였을 때의 모습은 하나도 없었다.
단정하게 자른 흑발에 심심하면 길거리 캐스팅을 당할 정도의 외모 그리고 큰 키.
‘토트윈으로 같이 데뷔했으면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문득 그런 생각을 하던 에르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하임.”
“예, 로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왜 뱀파리스 쪽에 있었던 건지 설명 좀 해 줄래?”
“아.”
라하임은 주스 잔을 내려놓고 에르제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까 부탁 드렸던 대로 제 기억을 살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랬었지. 에르제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하임이 앞에서 얼굴을 푹 숙이자, 에르제의 손이 그의 머리에 닿았다.
“방어는 풀었지? 네가 맘 먹고 정신계를 방어하면 나도 못 뚫는다?”
“당연한 말씀을.”
라하임이 살며시 웃었고, 에르제는 곧 술법에 집중했다.
검은 기운이 그의 손에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에르제는 기억을 되살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지난 과거를 읽어 낼 수 있었다.
― 드디어…… 찾았다.
이곳에서 처음 일족을 찾았을 때부터.
― 로드를…… 로드를 그대로 죽게 할 수는 없다. 내 목숨을 바칠 테니까 당장 의식용 단검을 만들어서 가져와. 제발…….
파르만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열을 하던 장면, 그리고 그사이에도 계속되는 뱀파리스들의 공격까지.
자신이 지구에 오기 훨씬 전에 라하임은 그 긴 시간을 일족과 자신을 위해 일했다.
언젠가 에르제가 지구에 올 거라고 여기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 파르만과 에이리스가 이곳에 왔다면…… 로드도 언젠가 오실 거다.
라하임은 명석한 두뇌로 정확한 추론을 해 자신이 올 때를 대비했다.
그렇기에, 그렇게 하기 위해서.
― 더 이상 에르제 님의 일족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그럼, 네 밑에서 어떤 일이든 하지.
안전한 곳으로 보내 둔 일족에 대한 기억을 스스로 지워 버리고, 에이리스의 부하가 되어 지금까지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오기 전까지.’
라하임은 버티고 있었다.
링크로 묶여 자유롭지 못했기에 자신을 바로 찾아오지 못했을 뿐.
“……로드.”
스스로 지운 기억이 돌아온 뒤, 라하임은 충혈된 눈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로드께서 오신 이후 다시 일족을 이끄실 수 있도록 많은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뱀파이어 쪽 진영도 네가 만든 초석이었구나.”
“예.”
라하임의 기억을 되살려 주면서, 에르제도 같이 그 기억을 읽었다.
그렇기에 현재 뱀파이어 진영의 수장이 라하임의 부하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일족은 아니지만, 라하임이 믿고 일을 맡긴 뱀파이어라…….’
기존의 일족을 찾아다니고 보호를 하고 있던 라하임이 오히려 반대편 진영으로 넘어가게 된 상황이었다.
구심점이 사라진 만큼 조직이 쉽게 와해가 될 수도 있었는데.
라하임이 일을 맡긴 뱀파이어는 어떻게든 잘 버텨 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습니다. 로드.”
라하임이 밝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그리고 에르제가 투덜대며 대답했다.
“오늘 보니까 에이리스는 이곳에 빨리 온 것 같던데, 신은 왜 나를 이곳에 이렇게 늦게 보낸 걸까.”
“그것까진 저도 모르겠습니다. 알아볼까요?”
“아니, 됐어.”
의욕적으로 나서는 라하임을 말리며, 에르제가 말을 이었다.
“뱀파이어 진영을 만든 건 아직 찾지 못한 일족을 찾을 확률을 높이고, 뱀파리스 진영을 견제하려고 했던 거지?”
“예, 맞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 라하임도 돌아왔겠다. 뱀파이어 진영이 자신의 수중에 들어왔다는 의미인데…….
에르제가 미간을 좁히며 잠시 고민했다.
‘라하임이 일족을 숨겨 둔 장소도 알게 됐고, 그렇다면 뱀파이어 진영이 유지될 이유가 있을까.’
차라리 일족을 중심으로 새로 조직을 개편하는 편이 더 좋아 보였다.
예전처럼 마을을 이루고 살 수는 없지만, 이곳에 에이리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냥 조직을 해체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일족이 아닌 뱀파이어들이 그쪽 진영에 흡수될 가능성이 높아.’
아니,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거다.
장진규만 보더라도, 자신이 인간보다 더욱 우월하다고 믿는 쪽이었으니까.
뱀파리스의 사상에 쉽게 물들 가능성이 높았다.
고민을 마친 에르제가 입을 열었다.
“일단 조직 개편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일족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 조직을 만들어.”
“음……. 그럼 조직 이름은 에르제 친위대나 에르제 님을 위하여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이 X끼, 또 시작이네. 카테이아 대륙에 있을 때도 매번 이러더니.
에르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라하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라하임이 손가락을 튕기며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예. 맞습니다.”
라하임이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서은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계시니까 서은우 님을 위하여가 좋겠군요.”
“……그냥 이브로 해.”
“예? 어째서?”
“맞다. 나도 서은우 님을 위하여가 좋아 보이는데.”
플랑까지 가세했다.
에르제가 급격히 피곤해진 표정으로 손을 이마에 대었다.
“이브로 하라면 이브로 해.”
“…….”
“……예.”
둘은 시무룩해져서 마룻바닥으로 시선을 내렸고, 세리나만이 옆에서 난감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라하임 님은 여전하시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결국, 새로이 창설될 뱀파이어 진영의 이름은 ‘뱀파이브’가 되었다.
그러던 중, 라하임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무게를 잡았다.
“로드,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뭔데?”
“운영비가 필요합니다.”
“……그건 내가 구해 볼게. 일단 장 대표가 정산금을 꼬박꼬박 잘 챙겨 주니까.”
“흐음, 제가 틈틈이 알아보니 아이돌의 수익은 인기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라고 하더군요. 앨범을 만드는 데에도 꽤 많은 돈이 투자되어서 정산금을 받는 시기가 미뤄질 수도 있다고 하고요.”
“음……. 그래?”
사실 그쪽으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에르제가 어깨를 으쓱했다.
라하임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리나도 그렇고, 플랑도 그렇고, 따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듯하니 저도 로드에게만 짐을 지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뱀파이브를 네가 이끄는 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어디까지나 그 주인은 로드이십니다.”
단호하게 대답한 라하임이 결심을 말했다.
“저도 일을 하나 찾아야겠습니다.”
“……이상한 것만 하지 말고.”
에르제는 불안한 눈으로 라하임을 바라보았다.
항상 똑똑하고 어려운 일들도 척척 해내는 라하임이었지만, 녀석은 플랑과 마찬가지로 충성심이 좀 과했다.
자신과 관련되면,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가 없다고 해야 할까?
‘예전에 왕이 나를 모욕했다고 왕국 하나를 날려 버리려고 했었지.’
사람만 안 다치게, 건물만 다 부숴 버리겠다고 해서 말리느라 굉장히 힘들었다. 일주일 내내 급발진하는 통에 진을 다 뺐을 정도.
“하아.”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린 에르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라하임의 결심은 이미 확고해 보였다.
“나는 일단 돌아갈 테니 나머지는 이걸로 연락해.”
스마트폰을 들어 보인 에르제는 멤버들이 깨기 전에 곧장 숙소로 돌아갔다.
* * *
“이번 주 1위는 토트윈입니다!!”
벌써 몇 번째 1위인지! 토트윈 3집 앨범의 상승세는 끝이 없었다.
LAK의 타이틀곡이 끝내 2위 자리를 수성하였지만, 마찬가지로 토트윈도 1위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팬덤의 크기가 아직 차이가 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굉장히 큰 성과였다.
“요즘 장 대표님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얘들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이윤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물론 그 덕분에 토트윈은 녹초가 되었지만 말이다.
에르제를 포함한 멤버들의 예능 출연 빈도도 상당히 높아졌고, 인터뷰도 계속 밀려들어 오는 상황.
나름대로 체력을 생각해서 스케줄을 분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힘들었다.
이제 데뷔한 지 고작 1년 된 아이돌이 소화하기에는 부담되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에르제를 제외하고 지쳐서 거의 곯아떨어지다시피 한 멤버들을 보며, 이윤이 안쓰럽다는 듯이 격려했다.
“신인상은 확실히 너희들 거다. D.D.는 그 뒤로 보이지도 않아.”
아육시로 데뷔한 ‘D.D.’는 확실히 전국 투어의 끗발까지 떨어지고 있는지 요즘 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나름 신인으로 토트윈을 견제하고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벌써부터 체급 차이가 너무 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걔네 심지어 너희들 잡겠다고 콘셉트도 그렇게 하고 나왔는데, 잘됐지 뭐.”
이윤은 고소하다는 듯이 말을 했고, 이내 차가 숙소에 도착했다.
멤버들은 언제 쓰러져 있었냐는 듯, 먼저 씻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하지만, 후다닥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였다.
“아, 오셨군요.”
에르제를 포함한 멤버 전원은 먼저 와 있던 인물 때문에 그대로 현관에 멈춰 섰다.
그는 가장 먼저 에르제를 확인했다가, 이내 다른 멤버들과도 찬찬히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오른팔을 아래로 내리며 고고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새로 매니저로 오게 된 라하임이라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