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140화
에르제가 로드의 힘을 끌어올렸으나, 에이리스는 미동도 없었다.
그저 웃음을 띤 채 가만히 턱을 괴고 있을 뿐이었다.
“데 캄을 넘겨줄 생각은 없어.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고.”
“풋.”
그 말에 에이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나도 서로를 죽이지 못하는 건 알고 있잖아?”
“?”
“우리의 힘은 비슷할 텐데, 잊었어?”
로드의 힘을 반씩 나누어 가졌다는 걸?
말을 끝까지 하지는 않았으나, 에이리스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몸에서 짙은 보랏빛 기운이 피어올랐다.
일견 보기에도 에르제의 힘과 그리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
에르제는 앞으로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이해가 가지 않아 질문을 던졌다.
“왜 재생 능력으로 다리를 치료하지 않았지? 로드의 힘은…… 그게 환술이 아니라면 그대로인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에이리스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들겼다.
“그걸 내가 말해 줄 이유는 없지?”
“…….”
에르제는 입술을 씹으며 다시 힘을 거두었다.
이곳에서 둘의 힘이 맞부딪히면, 도시 하나는 그대로 반파될 것이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을 벌이게 될 테니까.
‘……성급하기는 했어. 에이리스가 저 상태였으면, 진즉 데 캄한테 잡아먹혔겠지.’
굳이 데 캄이 자신에게 있는 로드의 힘을 빼앗아 에이리스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흥분했나.’
에이리스의 등장에 놀라 잠시 사고가 멈춘 모양이었다.
데 캄도 아니고, 자신이 이렇게 일차원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할 줄이야.
속으로 한숨을 내쉬자, 그런 그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에이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이 상황에서도 무고한 인간들이 피해를 받을까 봐 나와의 싸움을 피하는구나?”
비웃음과 경멸이 담긴 폭소였다.
“그러니까 그런 우월한 힘을 가지고도 인간들한테 사냥이나 당하는 거야.”
그녀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에르제와 에이리스, 두 사람의 과거가 오롯이 담겨 있는 말이었으니까.
“한결같은 네 성정을 이용해야지, 그러면.”
조소를 머금은 에이리스는 손가락으로 에르제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보랏빛 기운이 일렁였다.
“데 캄을 당장 넘겨. 아니면 당장에라도 이 동네를 날려 버릴 거야.”
“…….”
그러나 여기서는 에르제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각, 사각.
검은 기운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반구 형태로 위를 덮기 시작했다.
예전에 윤소희가 플라스크로 에르제를 낚았을 때와 같은 방법이었다.
외부로 향하는 모든 충격을 상쇄할 수 있도록 돔 형태로 그들 전부를 가둬 둔 것이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에이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저 돔을 만들기 위해 에르제는 상당한 힘을 공짜로 바친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50대 50의 싸움을 굳이 40대 60으로 만들겠다고?”
“글쎄.”
에르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의지는 확실히 보였다. 데 캄을 절대 넘겨줄 수 없다는 걸.
“라하임이 다시 뱀파리스 밑으로 들어가게 둘 수는 없어.”
“그러면서도 인간들이 다치는 꼴도 못 보겠고?”
그 말에 에르제는 당당히 대답했다.
“이곳에 내 팬이 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
그러고 보니 아이돌이었지. 에이리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역겹구나.”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에이리스가 이번에는 한 발 물러섰다.
“좋아. 그럼 데 캄을 넘겨. 링크는 내가 지워 줄게.”
“…….”
에르제는 대답 대신 라하임 쪽을 돌아보았다.
그거면 족쇄가 확실히 풀리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라하임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데 캄의 링크만 아니면, 이 이상 뱀파리스 쪽에 속박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
확인 작업을 마친 에르제는 다시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쉬운 쪽이 먼저 성의를 보이는 걸로.”
어차피 자신의 힘에 의해 죽어 가는 데 캄이었다.
에이리스라고 해도 겨우 목숨을 붙여 놓는 수준에서 그칠 터. 정상적인 회복은 불가능하다. 이미 뱀파이어의 능력을 발현할 주요 부분이 갉아먹혔을 테니까.
데 캄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에이리스는 고작 그를 위해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내게 거동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리기까지 했어.’
그리고 그 생각이 사실인 듯, 에이리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 캄을 회수할 수만 있으면 상관없어.”
그녀는 손바닥에 상처를 낸 뒤에 눈을 반개했다. 그러고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처에서 새어 나온 피가 구체를 형성하고, 공중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툭, 툭.
불순물들을 걸러 낸 피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곧 술법이 끝이 났는지 에이리스는 제이를 앞으로 나오도록 손짓했다.
제이의 눈동자는 아직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이걸 가져다주고 오렴.”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리스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명령을 했다.
그것이 익숙한지 제이도 군말 없이 회전하는 핏방울을 받아 든 채 에르제가 있는 곳까지 걸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본인이 모시던 로드와 동급이었다는 사실 때문일까, 제이의 태도가 한층 공손해져 있었다.
“음방에서 보죠.”
에르제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한 후 그것을 받아 들고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걸 라하임에게 주라는 뜻은 아니겠지?”
“그런 술법을 사용했으면 의심 간다고 거절했을 거잖아. 그 정도는 알아, 나도.”
에이리스가 조금 짜증을 내며 말했고, 에르제는 혹시 몰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저번에 ‘다이 랜드’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경계심이 잔뜩 생긴 상태였다.
‘거짓말은 아니네.’
에르제는 자신의 힘까지 흘려보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데 캄의 앞에 쪼그려 앉아 강제로 입을 벌렸다.
비대한 데 캄의 몸은 아직까지도 에르제가 심어 둔 로드의 힘을 버텨 내고 있는 모양인지 계속해서 꿈틀대고 있었다.
하지만 저항할 힘은 없는지 순순히 에르제의 뜻대로 피를 받아들였다.
화아악―!
피가 데 캄의 몸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곧 놈의 몸에서 보랏빛이 밝게 치솟았다.
“……!!”
동시에 라하임이 머리를 감싸 쥐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에르제는 당황하지 않았다.
링크에 걸린 이가 다시 속박에서 풀려날 때의 조짐과 같았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걸려 있는 연결 고리를 강제로 끊어 내기에 생기는 고통이었다.
고통스러워하던 라하임의 얼굴이 점점 편하게 바뀌어 갔다.
“아, 아아.”
라하임이 개운해진 얼굴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꽉 붙잡아 두던 링크가 드디어 제거되었다는 환희가 엿보였다.
“됐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에이리스가 입을 열어왔다.
“나는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 그쪽 차례야.”
“데 캄이 그 정도의 인물인가?”
“그건 내가 판단해.”
에르제가 의문을 표했으나, 단호한 그녀의 말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데 캄의 목숨을 거둠과 동시에 링크를 끊어 내려고 했으나,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졌다.
어차피 에이리스가 데 캄의 목숨을 구해 준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는 폐인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될 테니까.
‘상관없겠지.’
제일 좋은 것은 여기서 에이리스까지 처리하는 것이겠지만…….
둘 사이의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주변의 모두가 피해를 입을 터였다.
하여 에르제는 순순히 데 캄을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돌아가자.”
에르제는 라하임과 플랑을 보며 말했고, 두 뱀파이어는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반갑다는 말은 끝까지 해 주지 않네.”
에이리스가 섭섭하다는 듯이 뒤에서 말을 걸었지만, 에르제는 무시하고 데 캄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경고를 남겼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르는 척 서로 엮이지 말고 살아가자. 여기는 카테이아 대륙이 아니니까.”
한 호흡 쉰 에르제가 말을 마무리 지었다.
“내 일족, 내 사람들, 다시는 건드리지 마. 그때는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거야.”
“아이고, 무서워라.”
에이리스는 에르제의 경고에도 웃으며 대답했다.
에르제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박쥐로 변해 남은 두 뱀파이어와 함께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 * *
에르제가 떠나고 난 뒤, 에이리스는 제이에게 앞으로 가자고 손짓했다.
제이가 뒤에서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고, 곧 두 뱀파리스는 데 캄의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에이리스가 따뜻한 목소리를 뱉었다.
“꼴이 말이 아니네.”
“……로…… 드.”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는 데 캄이 에이리스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죄, 송…… 합니다. 한…… 번만 용서…… 를.”
“후후.”
에이리스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눈웃음까지 지어 가며 고개를 저었다.
“용서는 무슨,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로드의 힘을 얻어서 날 꺾으려고 한 거? 너희들의 기본 습성인 걸 어떻게 하겠니.”
“그, 그러…… 면.”
“그런데 나는 말이야. 머리가 나쁜 녀석까지 살려 둬야 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단다.”
“……!!”
말뜻을 알아들은 데 캄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 그러면…… 왜…….”
“어째서 널 넘기라고 했냐고?”
에이리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내 지금 상태를 고쳐 줄 어여쁜 혈석을 방금 본 내 오빠에게 강탈을 당했거든.”
에이리스가 제이 쪽을 향해 눈을 흘겼다.
“뭐, 공명으로 확인하라고 한 내 잘못이니 그건 자비롭게 넘어가야지.”
“가…… 감사합니다.”
제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하자, 에이리스의 시선이 다시 데 캄에게로 향했다.
“아! 널 왜 살려서 넘기라고 했는지 물었던가?”
데 캄의 눈동자가 사방팔방 굴러다녔다. 불안감이 극치에 달한 모습이었다.
“혈석이 없어졌으니 대체를 해야 해서?”
에이리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걸 다시 구할 방법은 라하임밖에 모르는데, 스스로 기억을 지워 버려서 알아낼 수도 없었거든.”
라하임은 정신계 쪽으로 특출 난 뱀파이어였기에 그녀로서도 그의 기억을 읽어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에르제조차도 라하임의 승낙이 없다면 기억을 되살릴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에이리스는 차선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 그 시작이었고.
“제…… 발…… 로드…….”
그녀는 부들거리는 팔로 자신의 다리를 붙잡으려는 데 캄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평소에 나오지도 않는 바깥을 왜 기어 나와서는 이런 꼴을 당하는 거니?”
“……자비…… 자…… 비를.”
에이리스는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데 캄을 무시하고는, 제이 쪽을 향해 말했다.
“먹어.”
“……예?”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너도 같은 꼴이 되고 싶은 거니?”
“아, 아닙니다.”
에이리스가 데 캄 쪽을 향해 턱을 까딱 움직였고, 제이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은 채 데 캄의 앞에 멈추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