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139화
서은우의 육체가 뱀파이어로 바뀌면서 얻게 된 가장 큰 이점은 더 이상 제약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예전 로드였을 때의 힘을 큰 부담 없이 그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
사가가가각―!
에르제의 몸 주변에서 피어난 검은 기운이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데 캄을 향해 이동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뜨이는 눈의 숫자도 훨씬 많아졌다.
“……카악, 우으으윽.”
내부가 진탕이 되어 가는 와중인데도 데 캄은 뱀파리스 최고의 탱커 자리를 굳건히 하려는 듯 보였다.
어떻게든 비틀거리며 일어선 데 캄은 보랏빛 안광을 번들거리며 입술을 비틀었다.
꿀꺽―.
입 안에 잔뜩 고인 피를 다시 삼켜 넘긴 데 캄은 손으로 두꺼운 복부의 지방질을 꾹 눌렀다.
“크흐…….”
어떻게든 몸의 내부에서 증식하고 있는 에르제의 피를 잡아 두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데 캄의 회복력은 이미 많이 봐 두어서 알고 있다.
에르제는 놈을 죽이고 라하임을 자유롭게 만들어 줄 찬스가 지금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매혹의 눈이 붉게 변함과 동시에, 에르제도 놈을 향해 다가갔다.
지척까지 닿아 있었던 만큼, 에르제의 손이 놈에게 닿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가 파라락 바람에 날리고, 그의 손이 데 캄의 턱에 꽂혔다.
퍼어억―.
지방으로도 미처 상쇄시키지 못한 피해에 데 캄의 얼굴이 반대편으로 꺾였다.
“후욱, 후욱.”
그 와중에 데 캄은 한 손으로는 복부를,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와 눈을 가린 채로 버텼다.
어떻게든 매혹의 눈에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다른 폭력은 비대한 몸으로 버텨 내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에르제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도 알 텐데. 내가 널 그동안 잡아 죽이지 못했던 건 튼튼해서가 아니라는 걸.”
그저 불리해졌다 싶으면 냅다 도망가는 게 문제였지. 이렇게 버티고 있어서 죽이지 못한 게 아니었다.
데 캄의 손에 죽어 나갔던 일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에르제는 꾹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정신 지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가리는 것까지는 좋은데 말이야.”
에르제의 손바닥이 데 캄의 발목에 닿았다.
“가만히 있는 사냥감만큼 손쉬운 게 없지.”
“끄으으윽……!!”
그대로 발목을 비틀자, 데 캄의 발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
이 상태로만 둬도 제대로 뛰기 어렵겠지만…….
찌이익, 에르제는 발목 뒤쪽의 근육까지 찢어 내고서야 만족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버텨 내고 있는 데 캄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하악, 카악.”
쇳소리를 내뱉는 데 캄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에르제는 양 손바닥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림자는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그 위로 떨어진 핏방울을 먹고 자라날지니.”
곧 손목을 타고 검은 기운이 시계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자, 잠깐, 만!”
어떤 술법인지 알아차린 데 캄이 황급히 소리를 쳤으나, 이제는 도망조차 칠 수 없는 상태.
“아아악!!”
에르제는 기어서 도망가기 시작한 데 캄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손바닥을 그의 등판에 가져갔다.
“네가 그토록 원하던 로드의 힘이야.”
꾸드드득―.
기괴한 소리를 내며 데 캄의 등이 뒤틀렸고, 에르제의 술법이 데 캄의 몸속으로 침투했다.
상대방의 혈관에 숨어들어 모든 피를 빼앗아 가는 극악무도한 술법.
원래는 고문용으로 개발된 술법이었으나, 이번 것은 에르제가 로드의 힘을 응용해 살상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곧 거대한 살덩어리가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
끔찍한 고통에 눈을 부릅뜬 데 캄은 비명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목구멍이 막혀 버린 듯,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 채로 손만 버둥거릴 뿐.
‘이제 끝인가.’
고개를 드니, 시선을 돌리고 있는 라하임이 보였다.
하긴 예전부터 라하임은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했었지.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약한 라하임답다.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먼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라하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라하임.”
“…….”
라하임의 시선이 천천히 이쪽으로 향했다.
녀석의 눈이 붉었다.
매혹의 힘이 아니라 충혈로 인해서.
그로테스크한 광경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걸까.
라하임은 버둥거리는 데 캄을 잠깐 바라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바닥으로 푹 숙였다.
“…….”
잠깐 말없이 기다리니, 라하임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로드.”
“그래.”
“왜…….”
바닥을 향해 있던 라하임의 눈에서 눈물이 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흙바닥이 오늘 처음으로 피가 아닌 물에 적셔졌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그 말에 에르제는 싱긋 웃었다.
“살아서 온다고.”
“……다행입니다.”
떨어지는 물의 숫자가 많아졌다.
“다행입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힘을 거둔 에르제의 손이 라하임의 정수리에 얹혔다. 그러고는 그대로 힘을 주어 자신의 어깨 안쪽으로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예. 아니,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그렇게 말하던 라하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물자국이 남은 얼굴이 퍽 우스운 모양새였으나,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라하임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제 기억을 살려 주셔야 합니다.”
“응? 기억을?”
“예. 링크를 건 데 캄이 죽고 나면, 그 이후에 제 기억을 살려 주십시오.”
무슨 기억이길래? 에르제가 고개를 갸웃하자, 라하임이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무슨 기억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지워 버려서. 하지만…… 혹시나 로드를 다시 뵙게 된다면, 부탁을 드려야 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래. 어려운 일도 아니고.”
기억을 읽는 것보다는 어려운 일이지만, 대상의 승낙이 있으면 쉬워진다.
봉인되어 있던 안병인의 기억을 푸는 것보다도 더.
무엇보다 중요한 기억임이 분명했으니, 에르제의 입장에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에르제가 알겠다고 하자, 라하임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그 말에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간헐적으로 꿈틀대는 데 캄을 마무리하기 위해 몸을 돌릴 때였다.
끼릭, 끼릭―.
쇠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숨어 있던 놈들이 이제야 움직이는 건가?’
에르제는 긴장조차 하지 않은 얼굴로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데 캄을 공격할 때부터 놈들의 움직임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움직임이 없어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뱀파리스의 성격상 데 캄의 죽음을 방관하고 도망가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다?
앞뒤가 맞지 않아서 에르제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니, 끼릭끼릭 하는 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그리고 곧 휠체어를 타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은 흑발을 무릎까지 내려뜨린 뱀파리스였고, 그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는 것은…….
“제이?”
갑자기 제이가 여기서 왜.
아니, 그보다 제이는 로드의 쪽이 아니었나?
왜 데 캄과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던 거지? 그냥 멀리서 감시만 하고 있었던 건가?
더욱 의문이 커져 가고 있는데, 휠체어에 타고 있던 뱀파리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거리는 대략 10m, 그쯤에서 제이가 명령을 받들어 휠체어를 멈추었다.
“로드.”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걸까, 그림자에 숨어 있던 플랑이 곧장 튀어나와 전투태세를 취했다.
‘설마?’
그런 플랑의 모습에 에르제가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익숙한 말투가 들려왔다.
“어머! 라하임, 나랑 했던 약속을 여기서 깨려는 거니?”
“…….”
라하임은 대답 없이 앞으로 나와 에르제의 몸을 반쯤 가렸다.
“더 이상 당신의 밑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후후, 카테이아 대륙에서 그런 소리를 했으면 곧바로 머리를 날려 버렸을 텐데.”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다가 급정색을 했다.
“오빠의 일족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 대신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온 거였지. 그럼, 이제는 그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구나.”
“…….”
“네가 기억을 지웠다고 해서 내가 그들의 위치를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것도 참으로 애석한걸.”
“!”
당장이라도 튀어나가려던 라하임을 플랑의 손이 멈춰 세웠다.
“기다린다. 로드 명령.”
까드득. 라하임이 이를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에 그녀는 후훗, 하고 웃으며 에르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네, 오빠.”
“…….”
에르제는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지금까지 ‘설마’라는 단어로 치부했던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되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자신과 로드의 힘을 반씩 나누어 가진 여동생이자, 일족을 배신하고 끝내 뱀파리스라는 종족을 창시한 뱀파이어.
“에이리스.”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절로 주먹이 꾹 쥐어졌다.
“난 네 오빠가 아니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에이리스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기야 그런 단어로 묶일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시간은 아니지. 너무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한번 그렇게 불러 봤어.”
에이리스는 가만히 턱을 괴고 에르제를 응시했다.
“내가 이 세계에 온 것도 벌써 몇백 년은 되어서 말이야.”
‘……나는 이제 막 1년이 되어 가는데.’
이곳에서 산 시간이 꽤나 차이가 난다.
어쩌면 자신이 제일 늦게 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에이리스의 상태가 이상했다.
‘……왜 휠체어를 타고 있는 거지?’
서 있기도 힘들 정도의 몸 상태인 건가.
‘아니면, 인간의 몸에 들어와서?’
파르만과 지서후, 자신까지.
지금까지 만난, 신에 의해 지구로 보내진 이들은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에르제의 미간이 좁혀졌다.
‘파르만이랑 지서후는 말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죽었어야 할 인간의 몸에 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친 상태 그대로 빙의하는 경우도 충분히 있겠지.
‘하지만…… 사고로 다친 몸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건 조금 이상한데.’
그 정도는 재생 능력으로 충분히 치료할 수 있지 않나?
어쩌면, 그 정도도 하지 못할 상태일지도 모른다.
‘……오늘 지난 과거를 모두 청산할 수 있지 않을까.’
에르제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에이리스를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데 캄을 넘겨. 그러면 조용히 물러가 줄게.”
다 죽어 가는 데 캄이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에르제는 그녀의 상태를 파악한 뒤였다.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라하임에게 링크를 걸어 둔 게 데 캄이야.”
에르제가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나는 오늘 라하임을 자유롭게 해 주려고 여기에 왔고.”
“…….”
“네가.”
에르제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다시금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걸 막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