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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38화 (138/307)

제138화

138화

오랜 시간이 지나 노후가 된 동네, 그리고 그곳에서도 버려진 폐공장.

에르제는 약속 시간보다 5분 빨리 공장의 너른 공터에 도착했다.

땅으로 떨어지며 변신을 풀고 발을 디디자, 모래와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손으로 휘휘 저어 그것을 날려 보내자, 뿌예졌던 시야가 조금씩 회복됐다.

‘아직 도착 안 했나?’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분명 이곳에서 보기로 한 건 맞을 텐데, 어느 곳에서도 뱀파리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습을 대비해야 할 수도 있겠어.’

뱀파리스들이 주로 사용하던 뻔한 전술이다. 아니…… 전술이라고 하기도 뭐 하고, 그냥 불러 놓고 냅다 기습하는 그런 거.

“하아.”

에르제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전신의 힘을 끌어올렸다.

이어 기감을 넓게 퍼뜨려 주변에 매복하고 있는 뱀파리스는 없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곧 에르제는 허탈하게 웃었다.

‘……진짜 숨어 있었어?’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하기야 저들 입장에선 단순히 뱀파이어인 아이돌일 테니 이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 그게 아니면 제안하려던 게 수틀렸을 경우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걸 수도 있고.’

뭐가 됐든 필요 이상의 숫자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대충…… 10에서 20 사이인가.’

에르제가 숨어 있는 뱀파리스들의 수를 가늠하고 있는데, 그들 중에서 두 개의 기운이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하나는 볼 것도 없이 라하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몸이 뭐 이렇게 커.’

살포시 땅에 내려앉는 라하임과는 달리.

쿠우웅―.

놈의 발은 지진이라도 일으킨 듯 땅을 크게 굴렀다.

에르제는 눈동자만 굴려 놈을 관찰하며 혀를 내둘렀다.

‘뱃살이…… 사람 세 명은 일렬로 세워 놔야 비슷하겠는데.’

게다가 턱살은 축 늘어져 있고, 목은 몇 겹이나 겹쳐 있는지 모르겠다. 저래서야 숨이 제대로 쉬어지나 싶을 정도.

‘카테이아 대륙에 있을 때에도 저런 놈이 하나 있었는데.’

데 캄이라고 듣기 싫은 웃음소리를 내던…….

“캇캇캇.”

“?”

이리저리 구르던 에르제의 눈동자가 물음표를 만들어 냈다.

데 캄의 웃음소리가 딱 저랬는데? 지구에도 비슷한 게 하나 더 생긴 건가?

그러나 그런 에르제의 추측을 비웃듯, 옆에 서 있던 라하임이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인사를 올려라, 서은우. 차기 뱀파리스들의 주인이 되실 데 캄 님이시다.”

“……!”

데 캄이라고?

에르제가 황당한 눈으로 라하임을 바라보았으나, 그가 데 캄에게는 보이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데 캄을 이미 알고 있다는 티를 내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어째서?’

에르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

‘데 캄은 내가 에르제라는 사실을 모르는구나.’

로드의 힘을 보았다고 하길래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곳이 지구라는 사실이 작용한 모양이다.

‘난 카테이아 대륙에서 죽었고, 그 힘이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하는 거였어.’

그 사실을 깨닫고 보니,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데 캄은 어리숙해 보이는 서은우에게서 로드의 힘을 빼앗을 생각이고, 그것을 이용해 뱀파리스 로드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내게 자발적으로 로드의 힘을 바치도록 만들 생각인가.’

정말이지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데 캄의 낮은 지능은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매번 정치에서 밀리고 전략도 개판이니 그 힘을 가지고도 겨우겨우 3장로나 하고 있었지.’

에르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냥 그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결정했다.

오히려 그 틈이 데 캄의 허를 찌르는 데에 더 유리할 듯싶어서였다.

멍청하다면 그 멍청함을 이용하면 될 뿐.

‘막상 힘 대 힘으로 붙으면 귀찮아져.’

매복하고 있는 뱀파리스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도 아직 모르고.

따라서 에르제는 라하임의 말대로, 오른팔을 고고하게 아래로 내리며 인사를 했다.

“데 캄 님을 뵙습니다.”

“카카카캇!! 이거 요즘 보기 드문 예의 바른 젊은이구먼. 누가 가르쳤는지 몰라도 각이 아주 살아 있어? 응?”

에르제의 완벽한 인사에 만족했는지, 데 캄은 비대한 몸을 뒤로 젖히며 크게 웃어 댔다.

귀가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에 에르제는 살짝 인상을 썼다.

“처음에 그 뭐냐, 토트윈의 서은우입니다, 할 때는 그냥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인간의 방식으로 예를 다한 것뿐입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래, 그래. 요즘 것들은 말이야 예의가 없어. 그냥 하라면 하고 까라면 까는 게 맞지, 안 그래?”

데 캄은 턱살을 푸들거리며 말했다.

사내 드라마에서 보았던 어느 직장 상사 같은 모습에 에르제가 입 꼬리를 올렸다.

“역시 최고의 꼰머십니다.”

“꼰머?”

데 캄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주에서 최고로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카카캇!! 그래, 그렇지. 내가 그런 편이야.”

데 캄이 껄껄 웃어 댔다.

라하임이 그에게는 보이지 않게 고개를 돌리고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눈이 웃고 있잖아.’

에르제는 피식 웃으며 당당히 발을 디뎠다.

눈앞에 있는 것이 정말 데 캄이라면, 이런 단어를 알 리가 없었다.

애초에 바깥에 잘 나오지도 않고 외부 소식에도 매우 둔감하기 때문이다.

‘정보 수집도 귀찮아서 안 하는 놈이 머리를 쓰겠다고 하면 쓰나.’

에르제는 비웃음을 머금은 채, 데 캄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신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아, 그래.”

꼰머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는지 그것을 중얼거리던 데 캄은 에르제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내 너에게 제안 하나를 하려고 불렀다.”

“영광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연락을 늦게 드렸군요. 아이돌이라는 직업이 워낙 바쁘다 보니…….”

“괜찮다, 괜찮아.”

데 캄은 관대한 표정을 꾸미며 사근사근한 말투를 이어 갔다.

“혹시 감자면을 알고 있느냐?”

“?”

에르제가 고개를 갸웃하자, 라하임이 빠르게 웃음기를 지우고 정정해 주었다.

“감자면이 아니라 김지원입니다. 데 캄님.”

“아, 고맙군. 서은우, 너는 김지원을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김지원을 통해서 보니 네게 위험한 힘이 잠재되어 있더군.”

“위험한…… 힘이요?”

“그래. 네 그릇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힘이지.”

로드의 힘을 말하는 건가.

에르제가 대답을 하지 않자, 데 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라면 다르다. 그 힘, 내게 넘겨라.”

“…….”

진짜 뇌세포가 달랑 2개밖에 없는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모두 지방으로 퇴화한 게 분명하다.

‘그렇게 말하면 누가 옳다구나! 하고 넘기겠냐고.’

최소한 그 힘을 계속 사용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협박이라도 하던가.

진짜 맞춰 주는 것도 고통스럽다고 에르제는 생각하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제 그릇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요?”

“음……. 아주 위험하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계속 그 힘을 사용하면 제가 위험해진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데 캄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협박을 자체적으로 유도해서 당하니까 기분이 새롭네.

에르제가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데 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힘은 네가 직접 내게 양도를 해야만 해. 그게 아니면, 또 다른 놈에게 넘어가 버릴 수도 있으니.”

“……그렇게 되면, 또 그릇이 작은 이에게 넘어갈 수도 있는 거고요.”

“그렇지. 보기 드물게 아주 현명하고 똑똑한 친구로군.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

“……감사합니다.”

회사라는 곳에 다니는 인간들은 모두 이런 경험을 하면서 사는 걸까?

새삼 안타까움을 느끼며, 에르제는 데 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단 비위를 맞춰 주기는 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오늘 내가 굳이 이곳에 나온 이유가 있으니까.’

라하임이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거라면, 링크도 놈에 의해 걸려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 ‘놈’이 바로 눈앞의 데 캄일 테고.

‘내부적으로 분란이 일어나고 있는 듯하니 링크를 건 게 로드 쪽은 아니겠지.’

에르제는 차분히 상황을 판단하고 결론을 내렸다.

‘데 캄을 여기서 처리하고, 라하임을 다시 내 사람으로 데리고 온다.’

링크만 풀어 줄 수 있다면, 라하임이 뱀파리스 쪽에 투항한 문제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라하임도 날 믿었기에 이번에 날 찾아온 거겠지.’

진짜로 로드의 힘을 데 캄에게 바칠 생각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에르제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데 캄과 시선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굽히면 돼.’

“결정했나?”

데 캄이 물었고, 에르제는 담담히 대답했다.

“예. 저는 위험한 걸 싫어합니다. 어떻게 넘겨드리면 될까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다. 가까이 오거라. 네가 목숨을 잃는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데 캄은 몇 걸음 다가오는 것도 귀찮은지 에르제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에르제는 천천히 데 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곧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둘의 사이가 가까워졌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라. 눈을 감고 있으면 내가 알아서 하겠다.”

“예.”

에르제는 눈을 감은 척만 하고, 심장 박동을 천천히 늦췄다. 긴장감을 가라앉히기 위한 방편이었다.

‘어쩔 수 없어.’

데 캄의 무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는 않지만, 그렇게 자존심을 지키기에는 라하임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데 캄의 무력은 경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또한 라하임이 그의 명령을 듣고 있는 상태.

자칫하면 라하임과 싸우게 될 수도 있으니까.

‘일족을 위해서라면 자존심은 언제든지 내려놓을 수 있어.’

에르제는 입술을 깨물고, 데 캄이 마음을 놓을 때까지 인내했다.

“네게서 힘을 뽑아갈 거다. 고통스러울 수도 있으나 참도록.”

“예.”

“그리고 이 일을 무사히 마친다면, 너는 내 밑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될 거다.”

미끼를 던지려면 처음부터 그 말을 했어야지. 이제 와서 보상을 운운하는 게 답답했지만, 에르제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탁―.

데 캄의 손이 에르제의 어깨에 닿았다.

라하임이 불안한 눈으로 입술을 짓이기는 게 보였다.

곧, 데 캄의 손에서부터 그의 힘이 몸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

찌릿한 고통에 에르제가 눈살을 찌푸렸고, 데 캄의 힘을 따라 로드의 힘이 유도되어 끌려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데 캄이 얹고 있는 손을 통해 로드의 힘이 저항 없이 이동했다.

‘아직, 아직이야.’

에르제는 그 고통을 꿋꿋이 참아 내며, 제일 좋은 타이밍을 기다렸다.

데 캄의 몸 안으로 로드의 힘이 흘러 들어가는 순간을.

화아악―!!

에르제의 눈이 뜨이면서 세로로 길게 그어진 붉은 동공이 데 캄에게로 향했다.

“……뭐……!”

놀라서 손을 떼어 내려던 데 캄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비대한 몸을 비틀었다.

“카아악……!!”

놈의 몸에 흘러 들어갔던 로드의 힘이 내부에서 데 캄을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네놈……! 이 무슨 짓을 한……!!”

말을 하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데 캄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에르제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에르제는 싸늘하게 식은 적안으로 데 캄을 내려다보았다.

고고하면서도 오만한 눈빛이었다.

에르제는 어깨에 붙어 있는 놈의 손을 손쉽게 떼어 냈다.

“여전히 멍청하구나. 데 캄.”

“……!!”

데 캄의 입술이 여러 번 달싹이다가 겨우 한 마디를 뱉어 냈다.

“에…… 르제?”

“매번 덩치에 맞지 않게 도망치는 속도가 빨라서 잡질 못했는데, 이제야 네 목숨을 거둬 갈 수 있게 되어서 기쁘군.”

데 캄의 외피는 로드의 힘도 버텨 낼 수 있는 뛰어난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내부는 아니었다.

에르제의 의지를 따라 데 캄의 내부를 휘젓고 다니는 로드의 힘 때문에, 놈의 몸속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 상태에서도 움직일 수 있으면 진짜 괴물이지.’

뱀파리스를 상대로 자비를 베풀 이유는 없었다. 그것도 라하임을 멋대로 다루던 놈이라면 더더욱.

“잠깐이지만, 추억 여행은 즐거웠다.”

그 말과 함께 씩 웃는 에르제의 등 뒤로 매혹의 눈이 수십 개가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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