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134화
갑자기 캠핑을 좋아하냐고 묻길래 무슨 말인가 했더니, 이번에 ‘바람 좀 쐬자’라는 예능이 들어왔다고 했다.
‘바람 좀 쐬자’는 1박 2일 캠핑을 기본 플롯으로 하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2년 넘게 장수했고 시청자들에게도 인기가 아주 많단다.
뭐, 출연자는 서로 누가 오는지 모른 채 캠핑장에 도착해서야 알게 된다고 하는데.
‘이미 제이가 오는 건 알려 줬으니까…….’
아무래도 모르는 척 연기하라는 뜻인 듯싶었다.
에르제는 이윤의 자세한 설명 이후에도 따로 무튜브에 ‘바람 좀 쐬자’의 다른 회차를 찾아보며, 대충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공부했다.
‘제이를 만나서 요리도 해 먹고, 제작진 측에서 준비해 준 질문이나 팬들의 Q&A에도 답하고…….’
그러고 하루 자고 난 뒤에는 또 오전 촬영분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제이랑 하룻밤을 보내야 해요?”
문득 물었던 질문을 듣고 태현우는 놀라 사레들렸고, 이윤은 기겁하면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다행히 대답은 제대로 해 줬다. 캠핑카가 2대라서 따로따로 잘 거라고 하더라.
에르제는 한숨을 내쉬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안 그래도 먹으라는 말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데…….’
그러나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할 명분도 딱히 없어서 결국 ‘바람 좀 쐬자’에 출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바람 좀 쐬자’ 촬영 당일.
에르제는 제작진에서 미리 준 셀프 캠을 들고 이윤의 차에 올라탔다.
촬영은 홍천에 위치한 글램핑장에서 진행될 예정이었기에 초반 촬영 분량을 각자 나누어 준 셀프 캠으로 보충하는 모양이었다.
이윤은 백미러로 셀프 캠을 켜는 에르제를 긴장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예능에 나가기 전까지 열심히 교육을 시켰지만, 그럼에도 불안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음.’
에르제는 그런 이윤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잔소리를 할 수 없도록 재빨리 셀프 캠을 들어 올렸다.
‘근데,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바람 좀 쐬자’ 측에서는 그냥 편하게 하고 싶은 말 하면 된다고 했지만, 소속사에서는 하고 싶다고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된다고 했다.
특히나 달빛과 관련된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말라고.
‘음…….’
고민하던 에르제는 일단 현재의 감상부터 털어놓기로 했다.
[ 안녕하세요, 토트윈의 뱀파이어 서은우예요.
캠핑은 처음이라서 굉장히 기대도 되고 설레기도 하고 떨리기도 해요.
두근두근.
아! 심장이 몇 근인지 아세요?
그건……. 아, 잠시만요. ]
잠깐 끊겼던 셀프 캠이 시무룩한 에르제의 얼굴을 다시 잡았다.
[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정답을 알려 줄 수 없게 된 점,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그 전에 힌트를 주었으니 똑똑한 여러분들은 충분히 답을 알 수 있을 거예요. ]
[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요즘 굉장히 고민이 많았는데, 캠핑을 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면 머릿속이 개운해진다는 후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굉장히 재미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하고 있어요. ]
[ 아 참, 이번에 같이 출연하게 될 분이 정말 궁금한데, 같이 요리해서 먹는다고 하니 꼭 티즐 고크드르늘을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
가는 길 내내 에르제의 입은 쉬지 않았다.
초반에는 예능과 관련된 생각과 이야기를 떠들던 게 어느새 토트윈과 관련된 화제로 넘어갔다.
[ 민주혁은 요즘 새로운 재능을 찾았어요. 매일 풀만 먹는 게 지루했는지 풀 아트인지 뭔지를 시작하겠다고 했거든요. 어제는 상추로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보여 줬는데, 솔직히 바퀴벌레인 줄 알았어요. 둘 다 바퀴가 있으니까 비슷할지도……. 앗, 이건 멤버들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
그렇게 얼마나 떠들었을까.
“도착했다.”
이윤의 말과 함께, 에르제는 처음으로 글램핑장이란 곳을 볼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에르제는 싱긋 웃었다.
‘그렇게 생소한 느낌은 아니네.’
예능을 미리 본 효과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카테이아 대륙에서의 경험이 컸다.
예전에 마차를 타고 돌아다녔던 덕분에, 캠핑카라는 것이 그리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안에 침대도 있고, 요리할 수 있는 기구도 있고 그렇다던데.’
카테이아에서는 그것을 마법으로 해결했으니, 그것 또한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주변을 둘러보는 에르제를 데리고, 이윤은 이번 예능을 총괄하는 이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신채원 PD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반가워요.”
그녀는 이윤과 악수를 나누며 미소를 지었다.
“전에 블링블링 촬영 때 뵈었죠?”
“기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하.”
이윤이 멋쩍게 웃고는 에르제를 인사시켰다.
“안녕하세요. 서은우예요.”
“은우 씨 활약은 TV에서 많이 봤어요. 예능도 캐릭터 잘 잡아서 하시는 것 같던데요? ‘히어로’ 랜딩은 정말 인상 깊었어요. 좀 놀라기는 했지만.”
신채원 PD는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럼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릴게요. 정말 캠핑장에 놀러 왔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해 주시면 돼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에르제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제이 쪽으로 향했다.
이윤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제이가 예능 경험이 많아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네 분량은 잘 챙겨 먹어야 해. 최대한 양쪽 팬들 사이에서 불만 안 나오게 편집으로 커버는 쳐 주겠지만, 없는 걸 만들어 낼 수는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에르제의 대답과 함께 곧 오후 4시가 되면서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처음은 두 사람 모두 서로 올 줄 몰랐던 것처럼 인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아! 선배!”
에르제가 반갑게 인사하고, 먼저 앉아 있었던 제이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오는 게 은우 씨였어요?”
미리 연출된 상황이기는 했지만, 둘의 연기는 꽤나 자연스러웠다.
“네. 첫 캠핑을 선배랑 하게 되다니 설레네요.”
“나도 그래요. 여기.”
제이는 그들 앞에 준비되어 있던 커피를 내어주며,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의자는 캠핑용이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접이식 의자는 아니었고, 흔히 우드 캠핑 의자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아마도 감성을 위해서 비치해 둔 모양이었는데, 숲속이라서 그런지 상당히 잘 어울렸다.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어요?”
“셀프 캠 주신 걸로 열심히 떠들어서 그런가, 시간이 금방 흘러가더라고요.”
“나도 그랬는데.”
제이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가볍게 대화를 이어 가고 있을 때였다.
작가 한 명이 둘에게 제비뽑기 통을 내밀었다.
“아, 이게 그건가 보네요.”
에르제가 그것을 받아 들며 제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팬분들이 주신 질문이요?”
“네. 하하, 은우 씨가 먼저 뽑아 볼래요?”
“그럴게요.”
통에는 꽤 많은 뽑기 종이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에르제는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겨우 하나를 골라냈다.
“아이돌 생활을 하면 힘든 일이 많을 텐데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는지 궁금해요, 이렇게 적혀 있네요.”
에르제가 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먼저 대답하라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뽑은 사람이 먼저 대답하는 걸로.”
“음…….”
에르제는 잠시 고민했다.
아이돌 생활을 하면서 힘들었던 일이 있었던가? 솔직히 재미있기만 했다. 오히려 힘든 건 일족들과 관련된 것들이 힘들었지.
‘뭐…… 일단 질문 자체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느냐는 거니까.’
고민하던 에르제는 종이를 다시 꾸깃꾸깃 접어서 내려놓았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라……. 보통 쉴 때 무튜브를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저희 무대 영상도 많이 찾아서 보고요.”
“그렇구나. 저희 멤버 중에도 그런 친구가 있어요. 은우 씨가 채선이랑 비슷한 것 같네요.”
하필 이채선을 거론한 제이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보통 사진을 즐겨 보는 편이에요. 특히 동물 사진이요.”
“동물이요?”
“네. 강아지나 고양이 사진을 보면 힐링이 되거든요.”
제이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어 에르제에게 보여 주었다. 그곳에는 폴더별로 정리된 동물 사진이 즐비했다.
‘……4분의 1 박쥐가 왜 다른 동물들을 좋아할까?’
왠지 떨떠름했으나, 에르제는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귀엽네요.”
“그렇죠?”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양 제이는 스크롤을 내리며 신나게 떠들었다.
골든 리트리버, 말티즈, 닥스훈트 등등 무슨 개 종류가 그렇게나 많은지 제이의 입은 쉬지를 않았고, 작가가 어쩔 수 없이 개입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저 혼자 신나서 너무 떠들었나 봐요.”
제이가 머쓱한 얼굴로 제비뽑기 통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제가 다음 질문을 뽑을게요.”
신중했던 에르제와는 달리, 제이는 시원시원하게 아무거나 골라서 종이를 펼쳤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적힌 것을 읽었다.
“만약 아이돌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흠…….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이는 제비를 뽑을 때와는 반대로 대답은 조금 뜸을 들였다.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들기며 고민하던 제이는, 조금 멀리 떨어진 바비큐 그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아마 요리사를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멤버들한테 평소 요리를 자주 해 주기도 하고……. 저는 멤버들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더라고요.”
“저도 요리하는 거 좋아하는데.”
에르제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티즐 고크드르늘이라고 제 희대의 역작이 있는데, 한번 만들어 드리고 싶은데요?”
“아…….”
제이가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저 그거 태현우 씨 SNS에서 후기 봤어요. 절대 싫습니다.”
“오늘 각자 서로에게 저녁 요리를 대접하는 거는 알고 있죠? 선배의 의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이참에 체중 감량하는 셈 쳐야 하나.”
제이가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는 포기한 얼굴로 에르제에게 물었다.
“그럼 은우 씨는요? 어떤 일을 했을 것 같아요?”
“음.”
에르제는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애초에 지구에서 다른 직업을 가져 본 적도 없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정확하게는 모르니까.’
심지어 에르제가 자신 있어 하는 요리는 제이가 먼저 선수를 친 상태였다.
대장장이라고 할까, 하고 잠시 고민하던 에르제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아이돌 말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다시 태어나도 아이돌을 하지 않을까요? 노래 부를 때가 제일 좋기도 하고, 팬들도 계시니까요.”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뭐가 되니?
평온한 표정의 에르제에게, 제이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