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33화 (133/307)
  • 제133화

    133화

    제이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로드를 영접하기 위해 알현실로 걸음을 옮겼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지나고, 촛불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카펫 위를 걷는 제이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길래.’

    데 캄도 모자라서 로드까지 자신을 찾는 걸까.

    자신은 그저 일개 뱀파리스이자 아이돌 그룹의 리더일 뿐인데.

    ‘라하임만으로도 귀찮아 죽겠는데.’

    로드가 이렇게 자신을 따로 호출한 것으로 보아, 그냥 평범한 일은 아닐 듯싶었다.

    제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로드의 앞에 당도해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로드.”

    “아, 왔니?”

    로드의 품 안에 안겨 있는 하얀색 박쥐가 날개를 파드득거리며 붉은색 눈동자로 제이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말은 하얀 박쥐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상당히 이질적인 상황임에도 제이는 의문을 표하지 않고 고개를 더욱 숙였다.

    “예.”

    잠시 말을 멈춘 제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어떤 일로 부르셨는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내가 꼭 무슨 일이 있을 때만 널 부른다고 생각하는 거니?”

    “아……! 아닙니다. 실언했습니다.”

    살벌한 기운에 제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더욱 납작 몸을 숙였다.

    ‘……X발.’

    김지원 때문에 계획을 말아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에는 목이 날아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 있다고 말해 놓고 실패를 했으니까.

    그러나 그 일 이후, 자신을 따로 부르는 일이 없어서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나 싶었는데.

    ‘설마…… 문책 때문에 날 부르신 건 아니겠……지?’

    제이는 아까부터 불안한 마음이 현실이 될까 싶어서 그냥 조용히 로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로드는 말없이 박쥐의 귀 부근을 천천히 긁어 주다가 이내 입술을 떼었다.

    “이제 네게 복잡한 건 바라지 않기로 했단다.”

    “……!”

    이건 무슨 의미인 건가.

    하염없이 회색 바닥만을 향해 있는 제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에 로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죽인다는 뜻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렴.”

    “가, 감사합……니다. 로드.”

    “하지만 잘해 보라고 결재해 준 일을 망친 잘못은 스스로 해결을 해야겠지?”

    “물론, 물론입니다!”

    제이가 강한 어조로 대답하자, 로드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좋아. 그럼 일단…… 이것부터.”

    그 말과 함께, 하얀 박쥐가 엎드리다시피 한 제이의 얼굴 앞까지 날아와 땅에 내려앉았다.

    “내게 할 말은 없니?”

    박쥐, 아니 로드가 그렇게 물었고, 제이는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할 말……?’

    로드에게 따로 전해야 하는 말이 있었던가?

    웬만한 것들은 다른 뱀파리스를 통해 보고를 올렸고, 무엇보다 계획 실패 이후 자신은 특별한 명령을 받은 것이 없었다.

    ‘결과 보고를 할 것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제이가 문득 든 의문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잠시만.’

    로드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린 채, 가만히 날개를 접고 있었다.

    ‘설마 데 캄의 움직임이 로드에게 보고하지 않은 독자적인 행동이었나?’

    라하임까지 움직였기 때문에 당연히 로드의 명령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은 그 일을 로드에게 말도 없이 도운 게 된다.

    제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로드가 저렇게 물어올 만한 것은 그것밖에 없다. 그렇게 확신을 내린 제이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혹시 데 캄과 관련된 일, 로드께서 내린 명령이 아닌 겁니까?”

    “흐응~. 역시 내 명령인 줄 알고 있었구나?”

    “……아니었습니까?”

    제이가 낭패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로 로드가 내리신 명령인 줄로 알고 도와주고 있었던 건데…….”

    “그만, 그만.”

    하얀 박쥐가 앙증맞은 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걸 문책하자고 부른 건 아니야. 그냥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데 캄이 멍청한 녀석인 거지.”

    훗 하고 웃어넘긴 로드는 휘젓던 날개를 제이의 머리 위에 올렸다.

    “어디 보자. 나는 데 캄과 라하임이 서은우에게 접근했다는 것 말고는 보고가 아직 올라오지 않아서.”

    “자, 잠시……!”

    제가 보고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려던 제이의 외침은 그의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이미 로드에 의해 제이는 그와 관련된 기억을 읽히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그의 몸이 꿈틀꿈틀 발작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제이의 머리에서 날개를 떼어 낸 하얀 박쥐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너도 아는 게 별로 없구나? 이를 어쩐다.”

    겨우 정신을 차린 제이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로드가 입을 열었다.

    “원래는 네 기억을 읽어서 데 캄에게 대처하고, 이후에 두 번째 일을 맡기려고 했는데…….”

    흐음, 로드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숨을 뱉어 냈다.

    “아무래도 하나로 합치는 편이 좋겠구나.”

    제이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바닥에 짚으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일단 데 캄과 서은우는 만나게 둬. 녀석이 노리고 있는 게 뭔지 몰라도…….”

    그녀는 피식 웃었다.

    “서은우가 내가 아는 뱀파이어가 맞는다면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로드께서 아시는 뱀파이어…… 라고 하면……?”

    “넌 그것까지 알 필요가 없단다.”

    그녀는 단호하게 제이의 말을 잘라 버리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네게 두 번째 일을 맡긴다고 했지? 최근에 내가 애지중지 키우던 보석이 있었거든. 꽤나 믿을 만한 녀석에게 맡겨 두었는데, 꼬리를 밟힌 모양이네?”

    “보석…… 이라면 어떤……?”

    “혈석을 키우고 있었거든. 근데 아무래도 그걸 서은우한테 빼앗긴 것 같단 말이지. 아마도, 이기는 하지만.”

    “……예?”

    제이가 멍하니 되묻자, 그녀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렴.”

    “죄송합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할 시간에 제대로 설명이나 해 주지.

    제이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으니, 로드가 조금 전의 말을 이어 갔다.

    “네가 일을 좀 해 줘야겠다.”

    “……예??”

    쏘아보는 눈빛에 흠칫한 제이가 황급히 자신의 멍청한 대답을 수정했다.

    “아, 아닙니다. 서은우랑 예,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멍청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필했다.

    “보석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오라는 말씀이신 겁니까?”

    “맞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걸 내가 설명하게 하지 마렴.”

    서늘한 목소리로 말한 하얀 박쥐는 다시 날아올라서 본체의 무릎 위에 살포시 앉았다.

    “마침 좋은 게 있더구나.”

    “?”

    툭―.

    제이가 바닥에 박고 있다시피 한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떨어진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으로 조그만 돌 하나도 같이 굴러왔다.

    제이는 우선 서류부터 집어 들어 확인했다.

    [ 바람 좀 쐬자 ]

    서류 맨 위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게 뭐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제이가 손을 뻗어 서류를 확인하려 했으나, 로드의 말이 먼저였다.

    “예능이 하나 들어왔단다. 마침 대중적인 이미지도 네가 서은우랑 친하다는 걸로 포장되어 있기도 하고.”

    “아……!”

    서류를 집으려던 제이의 손이 시간이 정지한 듯 딱 멈추었다.

    어디서 봤다 했더니, ‘바람 좀 쐬자’는 TV 예능 프로그램 이름이었다.

    곧 예능의 플롯을 떠올린 제이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아, 여행은 안 좋아하는데.’

    잘못 걸렸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로드의 입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거기에 나가도록 해. 서은우가 있는 소속사에는 내가 말해 줄 테니까.”

    “……예.”

    겨우겨우 힘겹게 대답한 제이가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러고는 서류와 함께 굴러왔던 돌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이건……?”

    “서은우가 혈석을 가지고 있는 지 확인할 수 있는, 열화판 혈석이랄까. 가까이 붙어서 네 힘을 흘려보내면 된단다.”

    “……알겠습니다.”

    “나가보렴.”

    제이는 겉으로 드러난 표정을 빠르게 지워내고는, 알현실 바깥으로 나갔다.

    제이가 나가고 난 뒤, 그녀는 팔걸이에 올려 둔 팔에 턱을 괴며 새빨간 입술을 올려 웃었다.

    “정말 에르제일까?”

    이번에 제이가 예능에 출연해 소임을 다한다면, 곧 확신할 수 있게 되겠지.

    지구에 오게 된 이후로 무료하기만 했는데, 만약 서은우가 에르제라는 게 확실해지면…….

    ‘드디어 반쪽짜리 힘이 하나가 되겠는걸.’

    에이리스는 즐거운 상상에 소리 내어 웃었다.

    * * *

    토트윈의 숙소에 그리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잔소리와 일거리를 늘 양손에 하나씩 들고 오는 이윤이었다.

    “으하하하!!”

    하지만 오늘따라 웃음이 굉장히 호쾌했다.

    에르제가 심심할 때마다 즐겨 보던 사극에서 나오는 어떤 장군의 웃음소리 같았다.

    현관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이윤의 웃음소리에 방에 있던 멤버들까지 모두 거실로 뛰어나왔다.

    “무슨 일 있어요?”

    윤치우가 대표로 물었다.

    “흐흐.”

    이윤은 의기양양하게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너희, 초동 나왔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허리춤에 올려 두었던 손을 다시 펼쳐 보이며 검지 두 개를 세웠다.

    태현우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전설의 쌍 법규?”

    “아니야, 인마.”

    잠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이윤의 얼굴에 다시 행복감이 차올랐다.

    “110만.”

    “……!! 진짜로요?!”

    “110만이여? 10만 말고 110만이여??”

    멤버들이 놀라서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리고 곧 양팔을 치켜들고 거실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어지러워, 그만해.”

    홀로, 아니 에르제와 똑같이 침착한 표정으로 서 있던 민주혁이 안단테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억.”

    순간 허공에서 버둥거리던 안단테가 제자리에 우뚝 섰고, 뒤에서 달려오던 태현우와 가볍게 부딪쳤다.

    그 모습에 이윤이 피식 웃으며 민주혁에게 말했다.

    “너는 별로 기뻐 보이지가 않는다?”

    “……당연하죠.”

    민주혁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LAK 초동은 135만 넘겼잖아요. 후, 이번 연도에는 꼭 따라잡고 싶었는데.”

    “오!”

    태현우가 고개를 돌리는 민주혁에게 삿대질했다.

    “현실파 민주혁이 그런 허황된 상상을……!!”

    “왜 그게 허황된 상상이야? 이번에 충분히 기대해 볼 만했는데.”

    윤치우가 민주혁을 두둔하고는, 태현우의 손가락을 잡아서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사람한테 삿대질하는 거 아니야.”

    태현우가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순간 우리 주혁이가 아닌 줄 알았지~.”

    “누가 우리 주혁이야?”

    민주혁은 그런 그에게 눈을 흘겼다.

    “너희들은 변하지 않아서 참 좋다.”

    이윤이 쿡쿡 웃으며, 이번에는 무표정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근데 넌 좋은 소식에 왜 그리 심각한 표정이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르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말과 반대로 그의 속마음은 한숨으로 가득했다.

    ‘축복을 내려 줄 거면, 직관적으로 좀 알려 달라니까.’

    도대체 ‘먹어라.’라고 하면 누가 그걸 알아듣느냐고.

    새삼 카테이아 대륙의 성직자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이런 걸 해석하는 것도 큰일이겠다 싶어서.

    에르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곧 이윤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면 됐고.”

    과하게 웃고 있어서인지, 이윤의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켰다.

    “은우, 캠핑 좋아하니?”

    “?”

    뜬금없는 말에 에르제의 고개가 50도 넘게 옆으로 꺾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