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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31화 (131/307)

제131화

131화

큰 키,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장, 번듯하고 수려한 외모.

에르제는 단번에 눈앞의 남자가 조금 전 팬들이 수군거리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르제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일단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전에 팬사인회에 왔던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것이 정말 토트윈의 팬이라서 이곳을 찾은 것 같지도 않았다.

‘앨범도 들고 오지 않았고.’

에르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면밀히 관찰했다.

혹시나 그토록 기다려 온 만남일지도 몰랐다.

“…….”

“…….”

짧은 침묵과 함께, 둘의 시선이 공기 중에서 부딪혔다.

1초, 2초…….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에르제의 눈이 점점 커졌다.

혹시나 싶었던 것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라…….”

“거기까지.”

남자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너, 도대체…….”

미세한 떨림을 머금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에르제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에르제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라하임은 이 이상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린 채 종이에다 짧게 무언가를 써서 에르제에게 건네주었다.

‘왜 갑자기 안 보고 글을……?’

의아하다는 얼굴로 에르제는 라하임이 준 메모를 읽었다.

[ 링크 ]

메모에는 그렇게 딱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곧바로 에르제의 표정이 굳어졌다.

‘링크…… 라면, 링크를 걸어 둔 대상의 시야와 소리를 공유하는 술법인데…….’

의미를 가늠하던 에르제는 그제야 지금까지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라하임이 자신의 앞에 여태 나타나지 않았는지.

에르제는 메모지를 손안에 숨기며, 속으로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처음부터……. 내가 왔을 때 라하임은 이미 감시를 당하고 있었던 거야.’

자신이 서은우의 몸에 들어왔을 때.

라하임은 이미 뱀파리스 진영에 굴복한 이후였던 것이다.

‘그래서 날 바로 찾아오지 못하고…….’

에르제의 눈매가 깊이 패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지금 어째서 뱀파리스와 함께하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으나, 결국 에르제의 입술이 다시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분명히 지금도 라하임은 감시를 당하고 있을 테니까.

“일단.”

라하임은 얼굴에 힘을 꽉 준 채 먼저 운을 뗐다.

지금 둘의 사이는 뱀파리스와 뱀파이어.

딱 그 정도의 사이.

둘은 암묵적으로, 그리고 필사적으로 서로를 모른 척했다.

“그쪽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나를?”

라하임도, 에르제도 서로의 속내를 감춘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예. 서로에게 좋은 제안이 될 거라고 하시더군요.”

말뜻을 파악하기 위해, 에르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서로에게 좋은 제안이라는 건 없어. 항상 누군가는 이득을 보고, 상대방은 손해를 보게 되어 있으니까.”

“글쎄요.”

라하임은 픽 웃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이야기를 들어 보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

그가 내민 것은 아까와 같은 메모지였는데, 이번에는 누군가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에르제가 슬쩍 눈동자만 굴려 라하임을 바라보자, 그가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만나도 괜찮을 거라는 뜻인가.’

에르제는 메모지를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와서 라하임이 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필요는 없었다.

만약 배신했다면, 굳이 링크라는 단어를 자신에게 보여 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흐음.”

그렇기에 에르제는 일부러 한 번 튕겼다.

저쪽에서 혹시라도 의심을 하지 못하도록.

“만나서 무슨 짓을 할지 내가 어떻게 알고? 지금 굉장히 수상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거지?”

라하임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건 제 말을 믿어 달라는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군요. 판단은 본인이 하는 거겠지만, 아무쪼록 후회할 선택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후회는 무슨.”

에르제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라하임이 턱 부근을 매만졌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입술을 다시 떼었다.

“전 분명히 말했습니다. 서로에게 좋은 거래일 거라고. 조금 힌트를 주자면……. 흠, 그쪽이 가진 힘과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

힘이라는 말에 에르제가 눈썹을 찡그리며 라하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힘과 관련이 있다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이라면, 로드의 힘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

‘뱀파이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매혹의 힘에는 관심을 보이지는 않을 테니…….’

“…….”

그러다가 곧 에르제는 아, 하고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럼 김지원도 링크에 걸려 있었던 건가……?’

어째서 김지원 같은 말단에게 링크를 걸어 두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그날…….

‘김지원과 나누었던 대화도, 내가 사용했던 로드의 힘도 모두 들켰다.’

에르제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퍼즐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커다란 그림으로 완성되어 갔다.

‘……링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어.’

이제야 그들이 어째서 결계를 뚫어 가면서까지 김지원을 데려간 것인지 이해가 갔다.

꾸욱―.

에르제가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쥐자, 라하임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세한 미소를 지었다.

에르제의 표정으로부터 그의 생각을 읽어 낸 모양이었다.

라하임의 눈동자는 ‘역시 로드이십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시일은 그쪽에서 정하는 걸로.”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용건이 끝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이쪽에서 시간을 조금 끌어서 뒤쪽에서 가드가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럼.”

에르제도 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 주었다.

지구에 온 이후.

애타게 찾던 라하임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여지를 충분히 남겨 둔 채로.

다른 멤버들과는 이야기하지 않고 자리를 뜨는 라하임을 보며, 에르제는 아쉬운 얼굴을 했다.

‘감시를 받고 있어서 결국 이건 못 줬네.’

에르제는 품 안에 넣어 둔 보석을 더듬으며,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으아……!!’

대학생은 줄에 서 있는 상태에서 다시금 입을 틀어막았다.

오늘의 토트윈은 정말이지 청량함 그 자체였다.

‘미친 것 같아……!!’

대학생의 눈이 빠르게 토트윈의 의상을 훑었다.

살짝 노란빛이 도는 면티에 오버핏 흰색 셔츠를 입은 윤치우.

반대로 안단테는 안에 흰 티를 입고 겉에 다홍색 셔츠를, 그리고 민주혁과 태현우는 서로 색이 다른 티에 청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은우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학생의 눈이 서은우에게서 멈추었다.

분홍색과 흰색의 줄무늬 니트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청바지.

니트는 여름용으로 제작된 것인지, 브이넥에 얇은 소재였다.

‘와…….’

대학생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솔직히 독특한 조합의 의상은 아니었다. 캐주얼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누구나 생각할 법한 조합이었으니까.

하지만, 대학생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은우보다 니트랑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밝은 톤의 옷은 서은우의 하얀 피부와 아주 잘 어우러졌다.

‘저 다리 길이에 청바지는 진짜 반칙이지……!’

대학생은 팬싸컷보다 앨범을 적게 사고도, 팬사인회에 당첨된 자신의 행운에 무한한 감사를 표했다.

서은우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의 착장까지 모든 게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생은 오늘 토트윈의 착장이 어떤 건지, 사인을 하기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오늘 그들이 입고 온 것은 더블 타이틀곡의 의상이 아닌, ‘On Air’의 뮤비 의상이 확실했다.

대학생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AM이랑 FM 느낌과는 완전 달라.’

‘AM’과 ‘FM’은 라디오의 사연 느낌이었고, ‘On Air’는 그 라디오를 들으며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는 느낌이라고 할까.

조금 전까지 사람들이 많아서 더웠던 공간이 토트윈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진 기분이었다.

‘진짜 잘 어울린다, 다들.’

이미 ‘On Air’ 뮤직비디오는 수십 번도 넘게 돌려 봤지만, 2D와 3D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대학생은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손으로 누르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곧 다른 멤버들과 기억도 나지 않을 대화를 주고받은 이후, 대학생은 자신의 최애와 마주할 수 있었다.

‘미친.’

서은우를 직접 코앞에서 보니 순간 정신이 아득했다.

하얀 피부 위에는 잘생김이 가득했고, 어김없이 씩 웃어 주는 미소는 그동안의 과제 스트레스를 단번에 날려 주는 듯했다.

“반가워요.”

“네, 넵.”

서은우는 꽁꽁 얼어붙은 자신이 내민 앨범 위에 사인을 쓱쓱 해 주다가 요청 사항을 보고는 입술을 살풋 깨물었다.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릴 것 같은 눈동자였다.

“……저, 글씨 연습 많이 했는데.”

그렇게 말하고는 열심히 끄적거리는 모습…… 이었으나.

글씨 잘 쓰는 은우는 평행세계 어딘가에 존재하겠지, 라며 대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게 더 귀엽지만.’

앨범을 받아 들고 헤헤 웃자, 서은우가 당당히 어깨를 폈다.

“어때요? 많이 늘었죠.”

“느…… 네!”

대답이 한 박자 늦었지만,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 시간!’

대학생은 빠르게 준비해 온 말들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뱉어 냈다.

그리고 서은우는 그 말에 하나하나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쉬는 것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태현우가 방해하기는 하는데, 같이 스마트폰 보면서 떠드는 것도 재미있고요.”

“보통 뭐 봐요?”

“저희 무대 영상이요. 여러분들 나오는 영상이 그것밖에 없어서 멤버들하고 같이 자주 봐요.”

그렇게 치사량 이상의 대화를 주고받은 뒤에 대학생은 겨우 정신 줄을 붙들고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팬사인회였다.

‘집에 가는 길에 ‘On Air’ 뮤비나 다시 봐야겠다.’

그리고 그게 빈말이 아니었다는 듯.

팬사인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대학생은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On Air’의 뮤직 비디오를 재생했다.

― Hop on my car ―!

DADADADADA!

경쾌한 드럼 비트와 함께, 태현우의 맑은 보컬이 ‘On Air’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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