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127화
울컥―.
에르제의 입에서 토해진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후두둑.
입가에서, 단검에 찔린 복부에서, 흡혈을 당하는 목덜미에서 쉴 새 없이 로드의 피가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거의, 거의 다 됐어!!’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아귀의 힘을 제외하면, 에르제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더, 더……!!’
레스터는 흡혈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조금만 더하면, 로드의 힘은 자신의 것이 된다.
위기를 기회로.
“흐…… 크흐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워서 레스터는 송곳니를 박아 넣은 채 광소를 터뜨렸다.
처음 라하임의 보석을 훔쳐서 달아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억제력이 되어 주던 로드가 없으니 충동적으로 행한 일이었으나, 레스터는 보석을 훔친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숨어서 인간을 납치해 지속적으로 보석에 혈기를 공급한다면, 언젠가는 라하임의 힘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로드가 없는 지금, 라하임을 능가하게 된다면 자신이 정점에 설 수 있으니까!
‘그런데 더 큰 먹이가 이렇게 제 발로 걸어 들어올 줄이야.’
어떻게 로드가 지구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지금 보석으로 흡수되고 있는 로드의 힘을 자신이 갖게 된다면, 기존에 계획했던 목표를 손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뱀파이어와 뱀파리스를 자신의 발밑에 두고 모든 종족의 정점에 서리라.
‘우리들을 지구로 보냈을 때, 그때 그냥 곱게 죽으셨어야지.’
레스터는 끝내 자신에게 모든 힘을 내주러 온 에르제를 애도했다.
슬슬 에르제의 손에서도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꽉 조이고 있던 손목이 한결 자유로워진 것이다.
‘……끝인가?’
레스터는 에르제의 목에 박아 넣었던 송곳니를 빼내기 위해 턱을 들어 올렸다.
“……?”
하지만, 마치 접착제라도 바른 듯 송곳니가 목덜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뭐, 뭐야.’
재생 능력으로 목덜미의 구멍을 막아 둔 건가? 뭐지?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단검부터 뺄까?
온갖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레스터가 잠깐 고민하며 보인 빈틈이 그의 목숨을 결정지었다.
“카…… 아악!!”
곧 아래턱을 벌리고 있던 레스터의 입에서 고통에 휩싸인 울부짖음이 새어 나왔다.
“아아악!!”
분명 흡혈을 위해 박아 넣은 송곳니였는데, 어째서 자신의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인가!
피를 빨아들여야 할 송곳니가 역으로 자신의 피를 에르제에게 뱉어 내고 있었다.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에르제의 손에 다시 힘이 돌아왔다.
꾸욱―.
“나! 노으라거!!”
송곳니가 박혀서 제대로 된 발음도 하지 못하고, 레스터는 끔찍한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흐윽, 흐윽.”
말할 기력도 순식간에 사라져 신음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왜, 어째서, 도대체 내 피가 왜 반대로……!’
그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려 온 정신이 쏠렸다.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에르제의 머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끄으으윽!!”
몇 번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송곳니는 빠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벗어나야 하는데, 몸이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에르제가 자신의 몸에 기대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다.
곧 무겁던 어깨가 가벼워지면서 에르제의 고개가 들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
“끄윽……. 개X…….”
“그래도 욕할 힘은 남아 있나?”
조금 전까지 빌빌대던 에르제의 목소리에 어느새 힘이 실려 있었다.
“……학, 하악.”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이제는 그럴 힘조차 없었다.
숨을 토해 내는 것조차 폐가 아플 지경이었다.
‘……분명…… 잘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보아 왔던, 일족을 아끼는 로드의 성정을 잘 이용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거의 성공할 뻔하기도 했다.
“그래, 덕분에 오랜만에 죽을 뻔했다.”
에르제의 목소리가 고통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레스터의 귓가에 스쳤다.
“이유는…… 네 기억을 읽어 보면 알게 되겠지.”
그렇게 말한 에르제는 손에 힘을 주어 직접 단검을 뽑아냈다.
“윽…….”
고통에 얼굴을 찌푸린 에르제가 레스터의 머리를 손으로 밀었다.
그제야 송곳니가 툭 하고 빠지며, 레스터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졌다.
“죽으면 기억을 읽을 수 없으니.”
“학, 학―.”
어떻게든 살겠다고 기어코 숨을 토해 내는 레스터를 보며, 에르제는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았다.
‘안……돼.’
이대로……. 이렇게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는 없다.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피를 모아 보석에 정제하며 버텨 온 세월이 얼만데……!!
‘……제발……!!’
레스터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홈에 박힌 보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타악―!
그러나 너무나도 허무하게 에르제의 손이 그의 손을 쳤다.
“끝까지 미련을 놓지 못하는구나.”
에르제는 그렇게 말하며, 직접 레스터의 눈을 감겼다.
“미안하다.”
“……아.”
에르제의 손이 레스터의 이마에 닿았다.
“미안하다.”
그 말과 함께 레스터의 의식은 심연 깊숙이 가라앉았다.
* * *
“…….”
레스터의 기억을 읽은 뒤, 에르제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기억이 인위적으로 지워진 부분도 있었으나, 일단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석연치 않은 것들은 모두 거짓말로 판명이 났고, 결국 자신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죽일지, 살려 둘지.
아무리 뱀파리스에서 넘어온 녀석이라고 해도 받아들였다면 일족은 일족이었다.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일은 아니란 의미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욕심에 눈이 멀어 자신을 찌른 것은…… 용서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고, 자신은 일족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일족 전체를 배신한 행위는…… 용서할 수 없지.’
에르제는 간헐적으로 호흡만을 토해 내는 레스터를 보며 입술을 짓이겼다.
레스터는 라하임을 위시한 일족을 배신했고, 또한 일족의 규율을 어기고 어린아이들에게서 피를 흡혈했다.
게다가 그 욕심의 끝을 보여 주는 광경 또한, 일족 전체를 해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하아.”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서 에르제는 억지로 숨을 내쉬며 턱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이곳에 없었기에.
조금 더 빨리 이 세계에 오지 못했기에……. 그래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죄를 받아야겠지.”
일족의 목숨을 거두는 죄를 스스로 짊어지는 것이 맞았다.
“미안해.”
에르제가 다시 한번 눅눅해진 감정을 되뇌었다.
“네 피는 그대로 남겨 두고 싶지만.”
이미 보석의 힘을 이용해 녀석의 피를 반대로 빨아들였으니 돌려줄 수는 없었다.
‘그 방법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곳에 누워 있었을 테니.’
입술을 깨문 에르제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레스터의 심장 부근에 올렸다.
희미한 혈관의 움직임이 손가락 끝에 잡혔다.
“고통은…… 없을 거야.”
에르제에 의해 장악된 레스터의 혈액이 천천히 그 움직임을 멈추기 시작했다.
죽어 간다는 것도 모르게, 천천히.
얼마 남지 않은 혈액이 움직임을 멈추고, 레스터는 고요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
에르제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이미 배신자로서 목숨을 거두었기에 레스터의 죽음을 담아 낼 관을 만들어 줄 필요는 없었다.
레스터는 이곳에서 썩고 부패해 자연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후우.”
힘겹게 숨을 내쉰 에르제는 그대로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앉았다.
레스터에게서 뽑아낸 혈기는 자신의 몸에 남아 있었으나, 보석에 의해 흡수된 자신의 혈기는 이제야 천천히 회복되고 있었다.
힘을 완전히 보석에게 빼앗겼다면 회복이 불가능했겠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방법을 찾아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됐으면, 진짜 서은우가 될 뻔했어.’
“윽.”
그러나 여전히 몸은 만신창이 상태여서 그런지, 코에서부터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에르제는 재빠르게 손등으로 피를 닦아 내며, 어지러워 흔들거리는 시야를 차분히 가라앉혔다.
“……아깝게.”
그러고는 손등에 진득하게 묻어나온 피를 혀를 이용해 다시 삼키고는 턱을 위로 젖혔다.
이 이상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어느덧 칠흑 같았던 어둠에도 눈이 적응을 했는지 천장의 높이가 대략적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손가락을 들어 높이를 가늠하던 에르제가 혀를 찼다.
‘……손가락이 두 개로 보이네.’
허탈한 웃음을 보인 에르제는 옆에 떨어져 있는 단검을 주워 들었다.
그대로 단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르제가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보석을 홈에서 떼어 냈다.
홈에 끼웠을 때처럼, 빠지는 것도 손쉽게 빠졌다.
‘두 개는 완전히 분리해서 보관해야겠어.’
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지만, 두 개가 합쳐졌을 땐 어마어마한 상승효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에르제는 복부에 난 구멍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아직 욱신거렸지만, 그래도 지금은 참을 만했다. 애초에 단검 자체의 살상력보다는 보석의 힘이 컸던 거니까.
‘그럼…… 의식이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는 건가.’
단검에 찔렸던 순간을 떠올리며, 에르제는 라하임이 어째서 포기했는지 깨달았다.
단검을 숙주로 삼은 보석은 로드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도 막을 수 없을 정도의 흡혈 능력을 보였다.
‘일족을 제물로 바쳐서 나를 소환하려고 했던 거겠지.’
그렇지만 다행히 라하임은 거기까지 손을 대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이 세계에 소환할 수 있는지도 미지수였고.
‘애초에 서은우의 부모가 준 의식용 문서로도 오지 못했을 것 같은데.’
이미 영혼이 죽은 상태로 왔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에르제는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를 얼마나 쏟아 냈는지 바닥이 질척거렸다.
‘……옷은 갈아입어야겠네.’
아래를 향했던 그의 시선이 바닥을 따라 위로 느릿하게 올라갔다.
레스터는 처리했으나, 아직 녀석이 남겨 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살아 있는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어.’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은 에르제는 배를 움켜쥔 채 뒤쪽에 막혀 있는 커다란 돌덩이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