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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26화 (126/307)
  • 제126화

    126화

    당장에라도 놈의 목을 비틀려던 에르제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붉게 변했던 눈동자도 로드라는 말에 차츰 색이 빠졌다.

    “방금…… 나보고 뭐라고?”

    에르제는 들어 올렸던 팔을 내리며 되물었다.

    놈은 양팔을 앞으로 뻗으며 뒤로 물러섰다.

    “로드! 저, 레스터입니다!”

    “레스터?”

    에르제는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레스터라면.’

    에르제는 일족들의 이름을 완전 기억 능력으로 저장해 두었었다.

    기억의 궁전을 뒤져 녀석의 정보를 찾아낸 에르제는 그대로 얼굴을 굳혔다.

    ‘이 녀석이었나.’

    레스터는 일족 중에서는 중견급 나이에 속하는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가 된 지는 1783년 정도 되었으니까.

    하지만 에르제가 그를 일족으로 받아 주었던 기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대략 400년가량.

    ‘……그 전에는 뱀파리스 쪽에 속해 있었지.’

    더는 인간을 해치기 싫다고, 강자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계가 싫다고.

    레스터는 그렇게 말하며 에르제의 일족으로 편입하여 이른바 교화된 뱀파리스를 자청했다.

    그리고 실제로 녀석은 보랏빛 눈동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흡혈이라는 충동을 제어할 수 있도록 노력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에르제는 레스터가 사는 마을을 방문해 그를 치하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자신의 일족으로 받아들인 이가 어둠 속에 숨어서 어린아이를 사냥하고 있는 것인가.

    에르제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내가 없으니 아주 제멋대로구나.’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자 제어장치가 사라지니 다들 이렇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모양이다.

    한 놈은 기껏 끊었던 마약에 다시 손을 댄 수준이고, 다른 한 놈은 적진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라하임의 얼굴이 떠오른 에르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레스터를 바라보았다.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하고 있는 듯, 에르제를 보며 손을 달달 떨고 있었다.

    “아니, 네가 한 짓은 마약보다 더하지.”

    “로……드.”

    얼음장보다 차가운 에르제의 목소리가 녀석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무리 일족이라고 해도…… 아니, 일족이기 때문에 더욱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데.”

    피를 몽땅 빨린 채 싸늘하게 죽어 있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만약.

    그 아이 하나뿐이었다면……. 일족이기 때문에 에르제는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애썼을지도 몰랐다.

    레스터는 이곳에 갇혔고, 흡혈을 하지 못해 죽어 가는 상황에서 우연히 아이를 발견했다면……. 만약 그랬다고 한다면 말이다.

    ‘……그래,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겠지.’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하지만, 레스터가 그렇게 변명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녀석이 누워 있던 자리. 그 뒤에서 풍겨 오는 지독한 혈향이 지금까지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 왔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몇 명이나 죽였어?”

    “그, 그게…….”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야?”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레스터의 모습에 에르제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렇게 하면 화가 좀 가라앉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쿵쿵쿵쿵―.

    심장박동 소리가 또다시 고막을 때리기 시작했으니까.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는 에르제의 모습에 레스터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사정이! 사정이 있었습니다!!”

    “……무슨 사정?”

    “이, 이걸 좀 봐주십시오!”

    레스터는 품 안을 뒤적거리며 보석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것을 에르제에게 공손한 자세로 건넸다.

    손톱만 한 크기의 보석을 받아 든 에르제는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흡혈…… 이 아니라, 보석 안에 혈기를 모으고 있었던 거야?”

    “예, 로드.”

    “자세히 설명해.”

    대답 여하에 따라서 처분을 결정하겠다는 말.

    그 뜻을 알아들은 레스터가 눈동자를 굴리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로드께서는 지구에 오신 뒤에 라하임 님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에르제가 고개를 저었다. 녀석의 표정에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작은 안도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역, 역시!”

    녀석은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말을 이었다.

    “이 모든 것은 라하임 님이 시키신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저에게 그 보석을 주더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곳에서 혈기를 그 안에 모으라고 시켰습니다!”

    에르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인간이 죽을 정도로 혈기를 모으라고 했다고?

    라하임이?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했다.

    “……라하임이 어째서 그런 명령을 내렸지?”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에르제가 묻자, 레스터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대답했다.

    “그…… 의식에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로드를 지구로 불러오는 의식에요.”

    “이 보석으로 날 지구로 불러올 수 있다고?”

    에르제가 헛웃음을 터뜨리자, 레스터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보석만으로 의식을 진행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단순히 혈기를 한곳에 응축하기 위한…… 하나의 저장고에 불과하고, 진짜는 단검입니다.”

    “단검?”

    “예. 아마 라하임 님이 가지고 있을 겁니다.”

    “……하.”

    에르제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레스터가 한 말이 기존의 모든 내용과 연결이 되기는 한다.

    라하임이 드워프에게 제작 주문을 했던 의식용 단검과 손잡이 근처에 조그맣게 파여 있던 홈.

    ‘그 홈에 보석을 박아 넣도록 설계가 된 거겠지.’

    에르제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잡고 있던 보석을 손바닥 안으로 밀어 넣고 주먹을 꾹 쥐었다.

    보석 안에 갇힌 혈기가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보석 하나를 만들기 위해 희생됐을까.’

    게다가 그것으로도 부족해 아직 완성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완성이 되었다면, 레스터가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차갑게 식은 붉은색 눈동자가 레스터를 향했다.

    “……물론 네 말을 다 믿어 준다는 전제하에.”

    “믿, 믿어 주십시오!! 저는 그냥 라하임 님이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랬던 겁니다!”

    “그래?”

    “예! 게, 게다가 라하임 님은 그 단검을 완성시킨 이후에 일족 하나를 제물로 바칠 생각이었습니다! 그, 그래야 로드께서 이곳에 오실 수 있다고…… 죽지 않으실 거라고……!”

    “…….”

    그래, 의식용 단검을 봤을 때부터 제물이 필요할 거라고 예측은 했다.

    하지만 레스터의 설명은 모두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석연찮은 부분이 존재했다.

    ‘라하임은 결국 단검으로 의식을 진행하는 걸 포기했어.’

    그게 아니었다면, 드워프의 손에서 자신에게로 단검이 넘어왔을 리가 없었다.

    눈이 돌아갔던 라하임이 이성을 되찾고 드워프에게 다시 단검을 돌려주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레스터에게 혈기를 모으는 일을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고?’

    라하임이 그걸 까먹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위험한 물건을 레스터에게서 회수해 가지도 않았다.

    에르제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레스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나한테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겠지?”

    “……예?”

    레스터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그에게로 에르제는 천천히 다가갔다.

    “기억을 확인해 보면 확실해지겠지.”

    “제, 제 말을 믿어 주시지 않는 겁니까!?”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그……!”

    “오히려 진실이라면, 내가 널 더 확실히 믿게 되는 일일 텐데.”

    에르제는 가까이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왜, 두려워?”

    그리고 품에서 단검을 꺼내 레스터의 앞에 던졌다.

    “네가 말한 의식용 단검은 내 손에 있어.”

    “그럴 리가…….”

    “라하임은 분명 의식을 포기했는데, 넌 어째서 이곳에 아직도 머무르고 있는 걸까?”

    바닥에서 단검을 주워 든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네 말만 믿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유를 이해했지?”

    “……하나만 확인해도 됩니까?”

    레스터가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이게 진짜 라하임 님이 가지고 있던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이곳에 보석을 끼워 보면 확실할 듯합니다. 저도…… 어째서 단검이 라하임 님의 손을 떠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보석을 끼워 보면 알 수 있다고……?”

    에르제가 미간을 좁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의심 어린 눈빛에 레스터가 순순히 단검을 내밀었다.

    “의심이 드신다면 로드께서 직접 해 보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보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하자.”

    지금까지의 상황만 보면 레스터를 쉽게 믿을 수는 없었기에 에르제는 직접 단검에 보석을 끼워 넣었다.

    달칵―.

    보석은 마치 제자리를 찾은 듯 단검의 손잡이 부근에 위치한 홈에 딱 맞게 들어갔다.

    “……?”

    그러자 보석에서 흘러나오던 귀기 어린 피의 비명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내 단검 날에서 똑같은 비명 소리가 나며 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에르제의 눈동자가 커졌다.

    ‘단검이…… 보석에 담긴 힘을 흡수하고 있는 건가?’

    그러나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다.

    히죽 올라간 레스터의 입술 위로 놈의 혀가 훑고 지나갔고, 에르제의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이 순식간에 그에게로 날아갔다.

    “다행히 아직 절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

    레스터가 단검을 쥐고 달려들었으나, 에르제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자식처럼 여기던 일족이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배신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푹―.

    살갗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뚫리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악……!!”

    복부에 단검이 박힌 에르제의 비명이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크…… 하하하!!”

    레스터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넘어가시지. 그랬으면 내가 이런 짓까진 안 하잖습니까?”

    “왜…….”

    에르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미 찔린 부근은 고통에 의해 그대로 바스러지고 있었다.

    “왜냐고? 글쎄, 궁금하면 내 기억을 읽어 보시죠.”

    레스터가 단검을 박아 넣은 자세 그대로 머리를 에르제의 어깨에 툭툭 부딪쳤다.

    “못 하나?”

    낄낄 웃은 레스터는 단검을 뽑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덥석.

    그러나 에르제의 손이 그 위를 덮었다.

    “뭐, 뭐야!”

    “이런…… 짓을 했다는 건…… 대가를 치르겠다는, 윽…… 뜻이겠지.”

    에르제는 흐릿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은 채 레스터가 단검을 뽑지 못하게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주변에 떠다니는 검은 안개를 두 뱀파이어 주위로 동그랗게 둘러쳤다.

    곧, 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안개는 고체가 되어 둘을 안에 가두었다.

    “윽…… 무슨 힘이…… 아직도!!”

    손목을 붙잡힌 레스터가 안간힘을 썼으나, 에르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악, 하악.”

    거친 숨을 내뱉으며 에르제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해결책이…… 필요해…….’

    의식용 단검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힘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직은 레스터를 붙들어 둘 힘이 있으나, 이 상태가 지속되면 위험했다.

    ‘……내 혈기를 빼앗아 보석에 저장…… 하는 건가.’

    에르제는 긴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뱀파리스, 뱀파이어 사냥꾼, 용사 파티 그리고 미친 황제.

    이 정도 죽음의 위기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헤쳐 왔다.

    그리고 이성을 잃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살길은 존재했다.

    믿었던…… 아니, 믿고자 했던 일족의 배신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겪었다는 사실을 애써 의식 한구석에 밀쳐 두었다.

    ‘집중……해.’

    눈앞이 흐릿해서 에르제는 아예 눈을 감았다.

    “놔……!! 놔, 이 X끼야!!”

    시끄러워서 귀도 닫았고.

    콰득―!

    목을 파고드는 송곳니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도록 촉각도 차단했다.

    그리고 단검으로 흘러 들어가는 혈기의 길을 찾아내 남아 있는 모든 정신력을 그곳에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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