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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25화 (125/307)

제125화

125화

연기는 무릇 노래와 춤과도 연관이 있는 만큼 에르제는 자신 있었다. 예전에 음유시인으로 활동했을 때만 하더라도, 표정 하나만으로 사람을 홀렸던 전적이 꽤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달걀귀신이라는 요상한 탈을 쓰고도 실감 나는 귀신 연기에 자신이 있었다는 말이다.

‘고스트 계열 쪽 흉내를 내면 되겠지.’

에르제는 인간 커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무런 말도 없이 슬그머니 그들 앞에 나타났다.

“히이이익!!”

“읏?”

두 사람 모두 다른 패턴의 귀신이 등장하자, 몸을 움찔 움직이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저, 저리가!!”

인간 남자는 조금 전에 근육을 자랑하던 패기는 어디로 갔는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한 채 소리만 질러 댔다.

슬금, 슬금.

에르제는 일부러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느릿하게 발을 옮겼다.

‘인간들에게 공포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최고는 이거지.’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것.’

이곳까지 오면서 만났던 귀신들은 분명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쫓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그 순간에는 무섭고 당황할지라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다니다 보면 금세 공포를 잊게 된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도 하강의 두려움을 비명을 질러서 즐거움으로 착각하게 만든다고도 했으니까.’

에르제는 놀이공원에 간다고 했을 때부터 공부했던 부분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러니까 나는 완전히 다른 패턴으로 간다.’

던전에 침입한 인간들을 농락하는 고스트 계열의 몬스터처럼.

스으으윽―.

에르제는 그들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닌, 느릿하게 움직여 이내 통로 옆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그러고는 속으로 다섯을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정확히 그때가 되자, 커플은 움츠렸던 몸을 펴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에르제를 찾았다.

“뭐, 뭐야. 끝이야?”

“별…… 거 없네! 크, 크흠?”

그렇게 말한 그들이 다시 통로를 따라 전진하려고 할 때, 에르제가 숨었던 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흐으읍!!”

“악!!”

이번에는 반응이 좀 더 좋았다.

‘조금만 더.’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이 물러나는 동선을 예측해 슬쩍슬쩍 막아서자, 그들은 결국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서로를 꼭 껴안았다.

“왜, 왜 이러는 건데!!”

“그…… 직원 맞지? 마, 맞는 거지??”

“……?”

귀신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인간 둘과, 귀신인 척하는 말 없는 뱀파이어. 잠시 동안 셋의 기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이 정도면 됐나?’

더 했다가는 기절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에르제는 마무리를 짓기로 결정했다.

몸을 뒤틈과 동시에 한 발씩 그들에게 다가갔다.

“끼기기기기?”

기괴한 소리를 내주는 것은 덤이었다.

이번에는 도주로를 내준 채 쫓아갔기 때문에 커플은 고개를 휙휙 돌려 도망갈 곳을 찾고는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흐아아아아악!.”

“같이, 같이 가!”

에르제는 유도한 곳으로 잘 도망치는 커플을 보며 달걀귀신 탈 안에서 미소를 지었다.

‘저쪽으로 가면 다음으로 만나는 게 박장호였지.’

아마 놀라게 할 겨를도 없이 알아서 지나갈 것이다.

에르제는 박장호의 수고로움을 덜어 주었다는 보람을 느끼며, 다시 원래 자리로 천천히 돌아갔다.

일정 시간을 두고 손님들이 입장을 한다고 하였으니, 곧 있으면 또 다른 손님이 이곳으로 올 터.

― 무조건 무섭게! 최대한 무섭게! 막 제자리에 주저앉을 정도로!!

이곳 직원이 저렇게 열심히 강조했으니까 여기서 뭉그적거리다가 손님을 만나게 된다면 그만큼 난처한 일도 없을 듯했다.

“하필 생긴 게 이 모양이니 다른 쪽으로 공을 들일 수밖에.”

에르제는 본인이 쓴 탈의 겉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동글동글한 계란 형태의 달걀귀신은 솔직히 귀신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아까울 정도로 단순한 형태였다.

고작 무섭게 한다고 달아 놓은 것이 배 쪽에 위치한 커다란 눈알이었는데, 카테이아 대륙의 고스트들과 비교하자면 한참 밑도는 수준의 외형이었다.

‘이렇게 생긴 마족이 있었다면, 인간들도 코웃음을 칠 정도니까.’

공포를 먹고 자라야 하는 마족들은 절대 이렇게 평범한 외형을 만들지 않았다.

신체 일부가 없거나 혹은 과도하게 많거나, 최소한 그 정도의 노력은 기울였다.

만약 카테이아 대륙에서 마족들이 넘어온다면, 이곳의 인간들은 그 자리에서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에르제가 재미난 상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응?’

지금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붉은색의 선이 보였다.

‘……혈로?’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피로 이루어진 선이었다.

‘뭐지? 이곳에 왜…….’

에르제는 굽혔던 무릎을 펴고, 혈로가 새어 나오고 있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관찰한 후, 에르제는 자연 발생한 혈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르제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했다.

‘손님들이 도망치다가 흘린 피…… 라고 하기에는 이상해.’

혈로가 생겨난 지점은 이곳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시작 지점이 아닌 끝 지점이었다.

‘그럼 시작은…….’

에르제는 혈로가 새어 나온 구멍을 바라보며 입술을 짓이겼다.

구멍은 벽이 아닌 바닥에 나 있었는데, 지금의 생각대로라면 지하에서부터 파생된 혈로라는 뜻이 된다.

에르제는 불편한 탈을 벗어 던진 다음, 동전 크기의 구멍에 몸을 숙여 눈을 가져다댔다.

지하로 나 있는 구멍 속은 완벽히 어둠에 가려져 있었는데, 어두운 것에 익숙한 에르제조차도 쉽게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빛의 농도가 적었다.

‘어떻게 한다.’

이대로 무시하고 계속 귀신 흉내를 내는 게 맞을까? 아니면, 의심스러운 곳을 조사할까?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고민하던 에르제는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결론을 내렸다.

‘내려가야 해.’

피 냄새는 뱀파이어가 아닌 인간의 것이었다. 혹시나 운 없이 지하로 떨어진 인간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

[ 제 자리도 부탁드릴게요. ]

에르제는 박장호에게 메시지를 남긴 후, 구멍에 손가락을 쑥 집어넣었다.

콰드득―.

그리고 그대로 검지에 힘을 주어 갈고리처럼 지면을 파냈다.

지반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구멍을 넓힌 에르제는 칠흑 같은 어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 * *

지하로 내려온 이후, 에르제는 희미한 시야를 따라 꽤 오랜 시간을 이동했다.

“답답하네?”

빛이 거의 들지 않아 느릿하게 나아갔기 때문에 시간에 비해 이동한 거리는 그리 길지 않은 편이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에르제는 투덜거리며 벽을 짚은 채로 조금씩 발을 옮겼다.

그렇게 10분 정도 혈로에 의존하여 따라갔을 때였다.

“……!!”

에르제는 조금 앞에 벽에 기대고 있는 형체를 발견하고 뛰다시피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인간을 확인하고는 눈을 꾹 감았다.

어린아이였다. 고작해야 7살 남짓한 어린아이.

‘이 아이가 혈로의 시작 지점이었구나.’

꾹 감았던 눈을 뜬 에르제는 혹시나 싶어 아이의 코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으나 바람은 나오지 않았다.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부터 예측은 했으나, 막상 다시 한번 확인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어쩌다가 이곳에 빠져서.’

안타까운 마음에 상처가 난 곳을 살피던 에르제는 이내 이상한 점을 깨닫고 황급히 아이의 몸에서 손을 뗐다.

“!”

아이의 목에 두 개의 송곳니가 파고든 흔적이 있었다.

‘이건…… 흡혈의 흔적인데?’

에르제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 흔적이 뱀파이어와 뱀파리스, 어떤 쪽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게 흡혈에 의해서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어떻게 고귀한 종족의 탈을 쓰고 이런 짓을…….’

쿵! 쿵!

빨라지는 심장 소리가 귓전을 때리기 시작했다.

인간을……. 그것도 인간 아이를 흡혈해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에 에르제의 얼굴은 분노로 달아올랐다.

‘어떤 쓰레기가.’

에르제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통로 더 깊숙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놈이 거처를 옮기지 않았다면 분명히 저 안에 있을 것이다.

이대로 아이의 죽음을 애도만 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발견한 이상, 스스로에게 떳떳해야만 했다.

“하.”

‘선을…… 너무 많이 넘었잖아.’

까드득, 송곳니를 깨문 에르제는 아이의 몸을 옆으로 뉘어 준 후 더욱 안으로 진입했다.

쿵쿵쿵쿵―.

심장박동이 더욱 빨라지면서, 에르제의 주위에서 검은 기운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공기를 갉아먹는 소리를 내는 검은 안개 사이에서 붉은색 안광을 번들거리는 눈알들이 나타났다.

‘이대로 쭉 일직선인가?’

갈림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에르제는 안으로, 더욱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어느덧 녀석이 있는 곳이 가까워졌는지 공기가 찌릿찌릿하게 진동했다.

‘역시, 옮기지 않았구나.’

비릿한 조소가 에르제의 입가에 걸렸다.

‘들키지 않을 줄 알았나 본데.’

걷던 속도가 점점 뛰듯이 바뀌었다.

그보다 한 발 늦게 출발한 검은 기운이 에르제의 뒤를 쫓듯이 따라갔다.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둘 사이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

곧 놈도 에르제의 접근을 눈치채고 누워 있던 몸을 재빠르게 일으켰다.

“뭐……!!”

“늦었어?”

그러나 에르제의 속도가 이를 상회했다.

꽉 쥔 주먹이 혈기를 담아 그대로 놈에게 달려들었다.

카가가각―.

양팔을 교차시켜 막은 놈의 몸이 3m가량 뒤로 밀려났다.

“크……?”

놈은 낮은 신음 소리를 흘리며 빠르게 오른쪽 다리를 에르제에게 뻗었다.

“어딜?”

에르제가 반대편 손으로 이를 막자, 놈은 그것을 반동으로 이용하며 뒤로 공중제비를 하여 착지했다.

“칫.”

탁탁, 손을 턴 놈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일부러 여유로운 척하는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누군데 남의 영역을…… 이렇게 함부로 침입하는 거지?”

“알 필요 없어. 오늘 이곳이 네놈의 무덤이 될 테니까.”

싸늘하기 그지없는 에르제의 대답에 놈은 저릿한 손목을 주무르며 헛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날 죽이겠다고? 무단 침입도 모자라서, 살인 협박까지. 대한민국의 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 줘야 하나?”

“……?”

놈의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에 에르제는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이곳이 놈의 영역이라는 것을 직접 들은 이상,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이유도 필요성도 없었다.

어린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제에 법 같은 소리를 운운하다니.

“법규다. 쓰레기.”

에르제는 로드의 힘을 더욱 강하게 끌어올렸다. 곧 그의 몸을 뒤덮을 듯이 검은 기운의 양이 많아지고, 그 안에서 세로로 동공이 길게 찢어진 눈동자들이 번뜩였다.

하지만,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현실에서는 벌어지곤 한다.

에르제의 힘을 그제야 자세히 보게 된 놈이 입술을 달싹였다.

“……어?”

놈의 눈이 에르제와 검은 기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두려움으로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로,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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