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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20화 (120/307)

제120화

120화

이윤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가득했으나, 기억이 조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토트윈 멤버들은 그 반대였다.

리허설을 끝내고 돌아온 멤버들은 곧바로 에르제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정말? 얼마나 돌아온 거야?”

“우리의 아름다웠던 우정은 생각났어?”

그리고 그중에서 윤치우와 태현우가 제일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애 아직 정신없는데, 너무 몰아붙이지는 말고.”

그들의 공세에 이윤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멤버들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지금은 예전 연습생 시절의 기억만 일부 돌아왔어. 하필 왜 그때인 건지…….”

이윤이 말꼬리를 흐렸다.

‘서은우’의 연습생 시절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윤치우와 태현우는 그 뒷말을 알아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들의 침묵에 힘을 얻었는지, 이윤이 아까부터 에르제를 설득하고 있던 말을 다시 꺼냈다.

“후우……. 은우야, 네 의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물론 기억이 돌아왔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게 그렇게 좋은 기억은 아니잖아. 오늘은 일단 푹 쉬고, 내일 무대에 집중하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아.”

태현우도 적극적으로 이윤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나도 윤이 형이랑 같은 생각이야. 리허설 때도 괜찮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루만 푹 쉬자. 그러면 기억이 더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그래, 그것도 있고.”

둘의 협공에 에르제는 잠시 침묵했다.

둘 다 서은우가 당시 겪었던 일을 떠올리는 모양인지 표정들이 심각했다.

‘……하긴.’

기억이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리허설을 망쳤는데, 그 기억이 부정적인 기억이라면 이들의 입장에서 걱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태현우가 말한, 기억이 더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것도 꽤나 어필이 됐고.

하지만 에르제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애초에 내 기억도 아니니까.’

심지어 서은우 영혼의 기억을 떠올린 것도 아니었다. 그냥 윤소희의 기억에서 읽어 낸 서은우의 과거를 봤던 것뿐.

‘거기다 윤치우가 예전에 말해 줬던 내용을 조합한 거고.’

에르제는 걱정으로 가득한 눈동자들을 마주하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로드였을 때는 그냥 하자고 하면 하는 거였는데.’

장로나 일족들의 반발이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음유시인을 할 때뿐이었다.

음유시인으로 사는 것은 에르제에게 꿈이자 행복이었으나, 그들의 입장에서는 로드로서의 일을 내팽개치고 놀러 다니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때문에 그것을 제외하면 자신의 결정과 의견에 반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에르제가 볼을 긁적였다.

‘요즘엔 그걸 꼰머라고 부른다던데.’

무슨 합성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단다.

‘나이가 많으면 그럴 확률이 특히 높다고도 했으니.’

2500년이나 산 자신은 인간 기준에서 아득한 경지의 꼰머일 수도…….

‘응?’

그럼 자신은 중2병과 꼰머를 둘 다 가지고 있는 건가?

두 개가 양립할 수가 있나?

“……은우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삼천포로 빠지고 있을 때, 이윤이 그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다.

“아……!”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에르제가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좋은 생각이 나서였다.

‘서은우를 괴롭힌 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고 한 게 오히려 역효과였을지도.’

아무래도 과거의 아픈 기억을 어떻게든 이겨 내 보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비쳐진 모양이다.

이윤과 태현우는 일단 이대로 무리시키지 않고 현상 유지를 하고 싶은 것일 테고.

‘그럴 때 특효약이 있지.’

더 좋아지고 싶다가 아니라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로 가면 확실한 효과가 있다.

무대에 서지 않으면 더 안 좋아질 거라는데, 뭐 어쩌겠는가?

에르제는 이전 세계에서 지켜보았던, 어느 인간의 삶을 떠올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려고 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날 무대에 서지 못해 망가져 버린 한 인간의 삶 말이다.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첫 마디는 그렇게 시작했다.

“이대로 도망치면…… 저는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할지도 몰라요.”

이윤과 태현우는 무슨 말인가 싶어 입을 다물었고, 에르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말하는 동안 눈을 깜박이지 않아서 자연스러운 충혈과 함께 울컥한 표정을 연출했다.

“매일이 두렵겠죠. 무대 위로 오르는 계단이 하늘보다 더 높아 보이고, 그 위를 오르는 내 다리는 돌을 얹은 듯 무거울 거예요.”

에르제의 손이 허공으로 뻗어졌다.

“기억이 떠오른 오늘 도망치게 된다면, 다시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겠죠. 주변에서 평범한 일상을 떠드는 것들이 모두 절 조롱하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신경쇠약에 걸리고,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되고, 또…….”

“알았어.”

이윤이 질린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무슨 말인지 알았다고.”

“…….”

옆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태현우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해치웠나?’

에르제가 그렇게 생각하며 이어 가던 말을 멈추자, 이윤이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오, 진짜.”

그러고는 살짝 노려보듯이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네 맘대로 해라. 대신, 오늘 무대 끝나고 나한테 솔직하게 보고해. 기억이 더 떠오른 건 있는지, 혹은 무대 설 때 두려움은 없었는지.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에르제는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뒤바뀌는 에르제의 표정을 보며 이윤은 ‘대표님한테 은우 배우도 시키자고 해 볼까.’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 * *

‘AM’과 ‘FM’ 무대를 위해 백스테이지로 이동한 에르제는 팔짱을 낀 채 고민했다.

오늘 에르제가 꿋꿋이 무대에 오르려는 이유는 2가지 때문이었다.

동발은 아니었으나, 어찌 됐든 8월에 LAK와 맞붙게 되었다는 것.

LAK 타도를 외치고 있는 토트윈에게 음악 방송 첫 무대는 팬들에게 첫 인사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윤이 팬들에게 어떠한 변명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만약 아프다는 핑계를 댄다면 며칠간은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아이돌 그룹에 비해 멤버 수도 적은데, 비주얼 센터가 빠지면 큰일이지.’

이건 자만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실제로 몇 주 전에는 다리를 다친 어느 아이돌 그룹의 멤버는 깁스를 한 상태로 무대에 서지 않았던가.

‘그만큼 타격이 크겠지.’

이제는 에르제도 아이돌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상황을 이윤이 모두 무마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거고.

‘이윤이 그렇게까지 믿음직스럽지는 않아.’

여태까지의 행보를 보면 그랬다.

음, 음.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또 다른 이유로 생각을 넘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라하임에게 메시지를 남겨야 해.’

라하임이 자신을 찾아오겠다는 뜻을 피력했고, 그렇기에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장소를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를 찾아올 시기를 재고 있을 텐데.’

괜히 곤란한 상황에 라하임이 찾아오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접 적당한 시기를 알려 주면 좋을 터.

‘오늘 AM 무대는 라이브로 진행하니까 끝나고 팬들에게 인사하는 척하면서 멘트를 치면 되겠지.’

현명한 라하임이라면 분명 알아들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라하임이 찾아올 거라는 것은 아직 추측 단계에 불과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결론 중에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만큼 에르제는 그 결론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에르제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일단 뭐가 됐든 오늘 무대는 완벽하게 끝낸다.’

“토트윈, 무대 오르겠습니다.”

스태프가 와서 호출했고, 토트윈은 무대에 오르기 위해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와, 사람 엄청 많네.’

제이의 홈마는 대포 카메라를 든 채 제일 좋은 자리에서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그녀가 앉은 자리는 토트윈의 팬들인 이브가 점령하다시피 한 자리였는데, 확실히 2집 때보다도 주황색 호박 풍선이 많이 보였다.

‘확실히 팬들이 많이 늘었구나.’

아무리 토트윈과 관련된 버즈 양이 늘어가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고 해도, 이렇게 직접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슬슬 토트윈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녀의 친한 지인 중 하나인 이곳의 스태프가, 다른 데 말하지 말라며 그녀에게만 알려 준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우가 어디 아프다고 했던 거 같은데…….’

최애의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까지 들고 왔는데, 아프다니!

사진을 찍지 못한 아쉬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다.

‘은우, 어떻게 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대에 서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무대에 서지 못하고 다른 멤버들이 무대를 소화하는 모습을 홀로 지켜봐야 하는 서은우의 심정은……. 그녀로서는 감히 짐작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 아플 것이 분명했다.

“은우, 엄청 속상할 것 같은데…….”

제이의 홈마는 고개를 숙이고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괜찮을까…….”

그러자 그런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옆에 앉아 있던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미인이 말을 걸어왔다.

“괜찮을 거예요.”

“……?”

제이의 홈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손에도 커다란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뭐지?’

보통 같은 그룹의 팬끼리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흔했다.

서로 싸 온 음식이나 보온병에 담아 온 음료를 나눠 먹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그냥, 확신을 하고 있는 듯한 말투.

“서은우 님은 절대 아프지 않아요.”

“……예? ……서은우 님?”

아니, 그보다… 은우가 아픈 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 사람도 다른 데서 들었나? 왜 괜히 공공연해진 느낌이 드는 거지.

제이의 홈마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미인의 옆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사람이 슬쩍 선글라스를 내리며 타박했다.

“어머, 언니. 그렇게 말하면 큰일 나요. 티 나잖아요.”

“그래?”

그 순간 제이의 홈마는 선글라스 팬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장미영?’

최근에도 계속 서은우와 ‘알바 몬스터’에 출연하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음악 방송 무대까지 찾아올 정도의 사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기에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나저나 둘 다 서은우 팬인 거야? 아니, 그리고 옆에 계신 분은 장미영 님이랑 친…… 해 보이는데, 누구지? 저 사람도 배운가?!’

그렇게 그녀가 온갖 혼란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 앉아 있던 미인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무대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봐요. 괜찮다고 했죠?”

“……??”

제이의 홈마의 시선이 그 손가락을 따라 이동했고.

“헙.”

그 끝에서는 토트윈 전원이 리프트를 타고 무대 위로 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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