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119화
리허설을 하는 동안, 에르제는 멍하니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
그저 무대 한복판에 선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목소리를 내면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춤을 추기 위해 발을 떼면 당장이라도 몸뚱어리가 뱀파리스 지부로 쳐들어갈 것만 같았기에.
라하임의 멱살을 잡고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겨웠다.
“서은우 씨!! 지금 뭐 합니까?!”
멀리서 뮤직 큐 음악 PD가 거칠게 헤드셋을 벗으며 소리쳤고, 이윤이 황급히 달려가서 말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은우야, 무슨 일 있어?”
“야,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너 설마…… 저번 주에…….”
“혀엉…….”
다른 멤버들도 우르르 몰려와서 에르제의 상태를 걱정했으나, 지금 에르제에게는 모두 윙윙거리는 소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무대에 서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리허설을 하기 위해 나왔지만, 하필 AM의 가사가 이별이다.
― 기다리고 있어.
In my world.
― 시간이 오래 걸려도
It’s okay.
돌아갈게.
그것도 지구에서 일족들을 기다리던 자신의 감정이 쉽게 투영될 만한 가사들도 많았다.
‘하필.’
에르제는 멤버들의 걱정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은우야! 은우야!!”
멤버들 뒤편에서 이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잔소리하려고 하나.’
그냥 시간이 좀 지나면, 들끓는 감정이 가라앉을 것도 같긴 한데.
고개를 내리고 물끄러미 이윤을 바라보니, 그가 헐레벌떡 뛰어와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PD님께 너 몸 안 좋다고 이야기해 뒀어. 어제 병원도 갔다 온 상태라고 거짓말하니까 별말씀 안 하시더라.”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작게 이야기하는 이윤의 말에는 걱정스러운 감정이 묻어 있었다.
“후우, 일단 그렇게 이야기하긴 했는데 뭐 때문에 그런 거야? 진짜로 어디 아파? 병원 가 볼래?”
“…….”
말없이 고개를 저었으나, 태현우가 끼어들었다.
“윤이 형. 저번 주에 은우, 화장실에 혼자 불 끄고 변기 위에 앉아 있었거든요. 그때는 그냥 또 이상한 짓 하나 보다 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요.”
“……무슨 말이야?”
둘의 표정이 아주 심각해졌다.
태현우가 이윤의 귀에 속삭였다. 물론, 에르제에게는 잘 들렸지만.
‘혹시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 하체 쪽으로. 오늘 그래서 갑자기 춤추는데 무리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무슨 뜻인지 알았어.’
그런 거 아니다. 뭘 알았다는 건데.
에르제가 황당한 눈으로 태현우를 바라보았으나, 이윤이 더 빨랐다.
“은우야, 병원 가자.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 없는데, 그냥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이윤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너 지금 얼굴도 엄청 창백하고, 손도 떨리고 있는 거 알지?”
“……?”
그렇게 심하게 손을 떨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에르제가 손바닥을 펴 보이자, 이윤이 양손으로 그 손을 꽉 잡았다.
“오늘 무대는 애들한테 맡기고 쉬자. 멋진 무대 보여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건강관리가 우선이야.”
이윤이 멤버들을 돌아보았고, 다들 무슨 소년 만화의 주인공처럼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고 있었다.
“형……. 몸 안 좋은 거였어여……? 빨리 나아야 해여…….”
“네 보컬 파트는 내가 부르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안무 공백은 주혁이가 알아서 해 주겠지, 뭐.”
태현우의 말에 민주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맡기고 다녀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한두 명 빠졌을 때 안무 구성도 생각해 뒀으니까 문제없어.”
“…….”
그들 중 유일하게 윤치우만이 ‘뱀파이어도 그런 거로 아픈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긴 했으나, 결국 만장일치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는 결론이 나 버렸다.
“주말이니까 응급실 쪽으로 알아봐야 하나.”
이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다가 얼른 에르제를 잡아끌고 무대를 내려갔다.
“…….”
에르제는 이윤에게 잡혀 끌려가는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좀 나아진 것 같은데.’
확실히 손의 떨림이 약해졌다.
그리고 화장실 이야기 때문인지 그 이후로 조금 정신이 깬 기분도 들었다.
맑아진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야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을 듯했다.
뇌에 피도 조금 도는 것 같고.
‘……진짜 하체 쪽 검사를 받으러 갈 수는 없지.’
라하임과 관련된 감정을 컨트롤하는 수밖에 없다.
일족의 배신이 2500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은 아니었으니까.
대기실에 도착하고, 차 키를 찾는 이윤에게 에르제가 말했다.
“몸 아픈 거 아니에요.”
“어?”
이윤이 몸을 돌려 에르제를 살폈다.
피가 통하기 시작하면서 안색이 돌아온 덕분에, 에르제의 말에 설득력이 생겼다.
“……그럼 뭐 때문에 그런 건데?”
그래서 이윤은 외부적인 요소부터 떠올리며 물었다.
“무대 울렁증이야? 아니면 카메라 공포증? 그것도 아니면…… 설마 공황이야?”
“……?”
지금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병명이 저렇게나 많은 건가.
아무튼 병 문제는 아니었기에 에르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그쪽 문제는 아니에요.”
“그럼 뭔데? 말을 해야 알지. 나 네 매니저다. 회사에서 돈 받고 너희들 케어 하라고 있는 사람이야. 무슨 뜻인지 알지?”
어르고 달래려는 말투가 느껴진다.
‘……생각하자.’
에르제는 잠시 입을 닫고 생각했다.
이윤에게 라하임에 관한 일을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눈앞에 있는 대상이 윤치우라면 모를까.
그리고 어디가 아파서라는 변명도 스스로 잘라 냈다.
이런 건 어찌 됐든 일시적인 변명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에르제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을 꾹 쥐었다.
‘무대는 서야 해.’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토트윈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LAK에게 이겨 보자며 다 같이 으쌰으쌰 하는 와중이지 않은가.
라하임의 배신에 자신이 충격을 받은 만큼, 멤버들도 똑같이 자신 때문에 충격 받았을 것이다.
‘생각해.’
한번 생각이 물꼬를 트기 시작하자, 뇌로 가는 혈액의 양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사고를 가속했다.
이윤에게 괜찮은 대답을 내놓기 전에 스스로 빌어먹을 감정을 정리해야 한다.
‘어차피 무대에 서려면 라하임에 관한 생각을 떨쳐내야 해.’
때문에 에르제는 이윤에게 할 변명보다 라하임에 관한 생각부터 먼저 끄집어냈다.
‘아까는 곧바로 리허설에 끌려와서 미처 생각을 정리할 겨를이 없었어.’
다시 차분히, 처음부터 되짚는다.
‘배신이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지었어.’
물론, 정말 배신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도 마찬가지다.
‘왜 뱀파리스 쪽에 있는 건지 그것부터 파악해야 해.’
직접 이야기를 듣지 못하니 결국 추론에 불과하겠지만, 녀석의 충성심만큼 자신도 라하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생각하자.’
왜 녀석이 뱀파리스들에게 협력하고 있는지.
에르제는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들을 병렬로 늘어놓았다.
‘녀석은 분명 나를 지구로 불러들이려고 했어.’
의식용 단검을 사용하려 시도했고, 또 자신을 불러오는 의식용 문서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일의 성패를 확인하지 않고…… 잠적했어.’
플랑에게 함께하자고 한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일족들을 모아 놓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녀석은, 자신이 언젠가 이곳에 올 거라고 생각해 일족들을 대신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다른 종족들도 지구에 왔다는 사실을 알아냈겠지.’
드워프에게 의식용 단검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만 보아도, 현명한 라하임은 진즉에 현 상황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뱀파리스들도 만났을 테고.’
그러다가 문득 에르제의 머릿속에 김지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뱀파리스 쪽에서는 분명 자신이 만든 ‘티즐 고크드르늘’을 알아본 녀석이 있었다.
에르제는 곧바로 확신했다.
‘라하임은 아니야.’
만약 라하임이었다면, 김지태 하나만 달랑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녀석은 자신의 힘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라하임을 제외하고 뱀파리스 내에도 카테이아 대륙에서 넘어온 뱀파리스가 있다는 소리인데.’
종족당 하나.
보통은 뱀파이어와 뱀파리스는 한 종족으로 취급하지만, 신에게는 다르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만약…… 뱀파리스에서 카테이아 대륙에서 넘어온 녀석이 있다면.’
에르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뱀파리스 쪽에서 먼저 선수를 친 건가.’
라하임이 일족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접근해서 제압했을지도 모른다.
‘……라하임이 모은 일족들을 인질로 잡았다고 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야.’
라하임을 제압할 만한 무력을 가지고 있고, 그런 쪽으로 머리를 굴릴 수 있는 뱀파리스는 하나뿐이다.
‘……신이 지구로 보낸 종족들의 지위를 보더라도 충분히 들어맞아.’
카테이아 대륙에서 뱀파리스들의 정점에 군림하던 로드.
‘에이리스.’
녀석이 신의 선택을 받아서 지구로 온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라하임의 배신보다 훨씬 현실적인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하임이라면, 내 결계를 깼을 때 자신의 정체를 들킬 거라는 건 알고 있었겠지.’
어느 정도 퍼즐이 맞춰지면서 전체적인 그림이 보였다.
그리고 라하임이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일부러 자신이 지구에 있다는 사실을 알렸어.’
그 와중에 뱀파리스 쪽에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은 건 자신이 오해를 해도 상관없다는 뜻이기에.
‘조만간 날 찾아오겠다는…… 메시지이겠지.’
생각이 정리되고, 그럴듯한 결론이 나오자 머리가 맑아졌다.
배신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한결 가벼워졌고.
‘……하필.’
한동안 연락도 없던 늑대 놈은 이걸 왜 오늘 보내서…….
만약 숙소에 있을 때 보냈다면, 이런 추태를 보일 일도 없지 않았을까.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있었을 테고 말이다.
‘……괜히 걱정하게 만들었잖아.’
이 이상의 이야기는 자신을 찾아올 라하임에게 들으면 된다.
에르제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사고 가속 덕분에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침묵이 짧았던 것은 아니었다.
꽤나 긴 시간을 자신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준 이윤에게 내적 고마움을 느끼며, 에르제는 적절한 변명을 떠올렸다.
적당히 이유도 되면서 무대에 서야만 하는 근거가 되는 변명을.
“사실…….”
에르제는 말끝을 흐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요.”
정확하게는 윤소희의 기억을 읽은 것이지만, 어쨌든 서은우에 관한 진짜 기억이긴 하다.
거짓말을 한다는 죄책감이 덜어졌다.
“!!”
그리고 이윤은 저도 모르게 에르제의 양 어깨를 꽉 잡았다.
“정말? 얼마나? 그래, 그래. 기억이 갑자기 돌아오면 막 정신이 없을 수 있지, 응.”
그러고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중얼거림인지 모를 말들을 횡설수설하는 모습.
“어떻게 하지? 좀…… 그 뭐냐. 기억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래. 무대는 애들한테 맡기기로 했으니까 병원 말고 숙소로 가자. 최대한 편하게…….”
“아뇨.”
에르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증명해야 해요. 연습생 시절에 얼굴만 믿고 아이돌 한다는 녀석들에게…… 절 무시하고 괴롭히던 녀석들에게 보여 줘야만 해요.”
에르제의 말에 이윤의 눈동자가 떨렸다.
“절대 무대에서 도망치는 일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