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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08화 (108/307)
  • 제108화

    108화

    “…….”

    “…….”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에르제는 침묵의 이유를 깨닫고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아, 이거 물려 있었지. 미안.”

    김지원의 입을 막고 있던 재갈을 풀어 주니, 그는 그제야 입을 뗐다.

    “……물…… 부터 좀.”

    “세리나.”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세리나에게서 물을 받은 에르제는 뚜껑을 땄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풀어 주며 물병을 쥐어 주었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고.”

    그 말에 김지원은 물을 꿀꺽꿀꺽 들이켜곤, 이내 플랑을 흘긋 바라보았다.

    “이미 몇 번 실패해서 의미 없다는 거 잘 알거든?”

    수분 보충이 되니, 아까보다 훨씬 듣기 좋은 목소리가 되었다.

    조금 원기를 회복한 김지원이 에르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이러는 거 법에 위반되는 건 알아?”

    “우와.”

    예상했던 반응이 그대로 튀어나오자, 에르제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렇게 뻔할 줄 몰라서 보여 줄 기회가 있을까 싶었는데.”

    에르제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사람들에게 거의 읽히지 않은 기사 하나를 보여 주었다.

    [ 벌써 2명째. 미라의 재림인가, 안전하지 않은 골목길 ]

    피를 빨려 미라처럼 변해 죽은 인간들에 관한 기사였는데, 큰 이슈가 되지 못하고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뭐 뱀파리스 쪽에서 막은 거겠지만.’

    그래도 완전히 기사를 없애지는 못해서 에르제는 키워드 조합으로 기사를 손쉽게 찾아냈다.

    에르제는 피식 웃으며 기사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거 너지? 살인이랑 납치, 둘 중에 뭐가 더 법적으로 위반이 되려나.”

    “……윽.”

    사실 기사를 보여 줄 필요도 없었다.

    방금 김지원의 기억을 읽으면서 기사 속 2명을 포함해 무려 5명의 인간이 녀석에게서 목숨을 잃었으니까.

    갓 뱀파리스가 된 녀석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행태였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피에 대한 갈증이 엄청나게 강해지고, 그로 인해 눈이 돌아가서 마구잡이로 인간을 사냥하게 된다.

    “내가 널 감금시킨 것도 이것 때문이야. 선량한 인간들이 죽어 나가지 않게. 뭐, 그래도 지금은 시간이 지나서 자제가 좀 될 텐데?”

    “…….”

    “미친 연쇄 살인마를 납치했다고 생각하면, 감금 정도야 애교 수준이지.”

    에르제가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후우.”

    한숨을 쉰 녀석이 눈알을 이리저리 돌린다. 김지원이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래서 놈이 이상한 생각을 하기 전에 에르제는 거짓을 섞어 쐐기를 박았다.

    “네가 제이 때문에 뱀파리스가 됐다는 사실은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어.”

    “!!”

    김지원의 뇌가 잠시 정지한 듯 보였다.

    “그래서 플랑을 시켜서 널 잡아 오도록 시킨 거야. 그러니까 나쁜 머리 굴리지 말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 줄 테니까.”

    “크윽…….”

    묘한 압박감이 에르제에게서 뿜어 나오자, 김지원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 그럼…… 두 개가 뭔지 설명만…… 좀 해 줘.”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에르제는 압박을 풀고 두 가지의 과정과 결말을 설명해 주었다.

    “쥐 죽은 듯이 살겠다고 하면, 네 기억을 모두 지우고 세리나 밑에 둘 거야.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아, 세리나가 누구인지는 알지?”

    에르제가 세리나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멋쩍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네가 뱀파리스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뭐 지속적인 관리도 해 주겠다는 뜻이야.”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본의 아니게 형제 모두 자신과 엮인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김지태는 세리나를 건드린 장본인이니 살려 둘 수 없었지만, 김지원은 아직 그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으니까.

    나름 로드로서의 자비를 베풀어 주는 행위였다. 뱀파리스를 인간으로 다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 그게 녀석에겐 최선일 터.

    잠시 생각하던 김지원이 바닥을 보며 물었다.

    “그럼 복수를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멀쩡한 인간인 널 멋대로 이용하고 뱀파리스로 만든 제이에 대한 복수겠지.”

    “……제이한테?”

    “어. 네가 직접.”

    “……하, 뭐 제이를 죽이기라도 하겠다고?”

    “가능하면?”

    김지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는 거잖아.”

    “그래?”

    결국 복수인가? 김지원은 제이를 두려워했던 만큼 원망도 컸던 건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에르제에게 내놓은 김지원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차라리 쥐 죽은 듯이 사는 게……. 아냐. 아니지. 어차피 제이가 찾으러 올 텐데, 그때까지 버티는 게 낫겠어.”

    “……?”

    “제이가 오면 너희가 무사할 것 같아? 복수? 네가 제이의 진짜 힘을 몰라서 그딴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쥐 죽은 듯이 살면……. 풉.”

    김지원이 실소했다.

    “쥐 죽은 듯이 살다가 ‘죽는다’는 말이 빠진 거 아니냐? X발, 더럽게도 꼬였네. 차라리 그냥 여기서 죽여라. 내 형도 네가 죽였다며? 그냥 죽여, 죽이라고!!”

    본인도 말을 하다가 순간 울컥했는지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하아.”

    에르제는 그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친 건가. 최소한 어딘가가 망가진 게 분명해 보였다.

    ‘생존 본능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데.’

    그것보다 제이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라…….

    애초에 제이가 자신의 결계를 뚫고 이 장소를 찾을 수 없을뿐더러.

    ‘지금은 김지원을 찾으려는 것 같지도 않던데.’

    만약 찾으려고 했다면, 현재 제이가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안병인을 통해서 뱀파리스의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있었고, 그들은 김지원의 실종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고 있었던 것이다.

    ‘제이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해도, 놈조차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했으니까.’

    자신과 제이가 가끔씩 주고받았던 메시지에서도 무언가를 눈치챌 만한 건더기조차 없었다.

    장기짝으로 쓰려는 녀석이 자신에게 잡혔다는 사실을 안다면 다른 행동을 취했겠지만, 제이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 사실을 모른다는 소리였다.

    결국.

    ‘김지원에게 세뇌의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는 건.’

    그냥 김지원이 어지간히도 제이에게 당한 게 많았다는 것.

    제이의 가스라이팅 실력을 보니, 두려움을 심어 주는 작업도 충분히 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궁금해지네.”

    에르제가 쿡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더 큰 힘이 그 두려움을 찍어 누를 수 있을까?”

    “……뭔 X소리야?!”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김지원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에르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끝에서부터 혈기를 끌어올렸다.

    “X소리가 아니라 내가 자존심이 상했다는 뜻이야.”

    고작 제이 따위에 대한 두려움이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섰다는 사실에.

    “지는 걸 싫어해서.”

    곧 에르제의 주위에서, 검은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사각, 사각, 사각.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눈알이 하나둘씩 안개 속에서 뜨였다.

    데룩데룩 구르던 눈알이 이내 대상을 찾았다는 듯 김지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히…… 히익.”

    김지원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제이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기괴한 광경에 온몸에서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자, 잠깐!!”

    검은 기운이 안개가 퍼지듯 스며들자, 김지원은 소리를 질렀다. 본능적인 공포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르제는 멈추지 않았고, 김지원은 이내 검은 기운에 그대로 둘러싸였다.

    “물어.”

    곧 에르제의 명령이 떨어지고, 눈알 하나의 밑에 기다란 입이 생겨났다. 그리고 점점 하나씩 늘어났다.

    콰드득―.

    입속에서 튀어나온 송곳니가 김지원의 몸을 파고들었다.

    “끄…… 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이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구멍이 난 김지원의 몸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아니, 상처조차 없었다.

    그러나 김지원은 실제로 고통을 느끼는 듯 크나큰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뒤틀었다.

    “제발, 제발, 제발.”

    바닥을 기며 뱉어 내는 간절함이 다시 검은 기운에 먹혀 사라졌다.

    그렇게 5분쯤 흘렀을까.

    녀석에게 5년, 아니 50년 정도로 느껴졌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에르제는 힘을 거두었다.

    송곳니에 그렇게 물렸음에도 김지원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흠.”

    에르제는 무릎을 굽혀, 바들바들 떨고 있는 김지원의 볼을 쿡쿡 찔렀다.

    “환각이야, 환각.”

    “……흐…… 흐어, 어으어…….”

    제대로 된 말도 못 하는 놈을 보며, 에르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로 쉽게 망가지니 제이한테 그렇게 이용당했지.’

    덕분에, 자신도 다루기 쉽다는 뜻이 되긴 했지만.

    에르제는 계속해서 볼을 쿡쿡 찌르며 김지원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아…….”

    이내 정신이 돌아온 김지원은 에르제와 눈을 마주쳤다.

    “힉……!!”

    그러고는 바닥을 굴러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에르제가 굽혔던 무릎을 펴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서 어떻…….”

    “할게! 할게요!! 제발 하게 해 주세요!!”

    겁이 많은 성격인 건지 환각의 효과는 확실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굴복시킬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자비를 베풀어 주기로 결정한 일이었고, 그래서 선택권을 준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환각이 아닌, 진짜 송곳니가 놈의 몸을 파고들었을 테니까.

    “나는 분명 선택권을 준다고 했어.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해 줄 생각이야. 그러니까 잘 생각하고 대답해.”

    “……저, 정말이…… 에요?”

    김지원의 말투가 공손하게 바뀌었다.

    “그래.”

    “쥐, 쥐 죽은 듯이 살겠다고 하면…….”

    “그것도 상관없어. 제이가 널 찾는다면 지켜 줄 생각도 있고.”

    “……!!”

    “대신, 그건 조건이 있어.”

    “뭔…… 데요?”

    “네가 했던 잘못을 제대로 언론에 공표해. 토트윈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도, 예전 모카 엔터테인먼트에서 네가 했던 짓도 모두.”

    에르제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육시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제이가 시킨 일이라고 해. 데뷔시켜 주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건……!!”

    “사실이잖아?”

    “그렇…… 기는 한데.”

    아직도 제이가 무서울까, 아니면 자신이 더 무서울까.

    에르제가 궁금증을 참으며 대답을 기다리자, 김지원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생각할, 생각할 시간 정도는 주시면 안…… 될까요?”

    에르제는 LAK와 토트윈의 컴백 시기를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3일. 그 이상은 안 돼.”

    “아, 알았어요.”

    만약 김지원이 제이가 한 짓이라고 폭로해 준다면, LAK의 컴백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물론 사회적으로 매장된 김지원이 한 말이라 큰 힘은 없을 거고, LAK 소속사에서도 필사적으로 루머라고 치부하며 무마할 것이다.

    ‘잘 빠져나가기는 하겠지.’

    그러나 한번 구설수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토트윈에게는 충분한 힘이 될 터.

    ‘복수를 한다고 하면 제이의 목숨을 끊게 되겠지만.’

    뱀파리스의 심기를 더 건드릴 필요성은 딱히 없어 보였다.

    제이의 목숨이 그 정도로 가치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오히려 이걸 이용해서 토트윈에게 힘을 실어 주는 편이 더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에르제는 아육시 녹음 파일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혹시나 싶어서 녹음한 것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어 낸 듯해서였다.

    김지원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지하실을 빠져나온 뒤, 에르제는 세리나에게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예, 로드. 별일은 없을 거예요.”

    “응.”

    에르제는 결계가 잘 쳐져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숙소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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