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107화
― 애들 너무 기특해. ㅠ
┖ 우리 불안해할까 봐 일부러 앨범 언급도 해 준 것 같아. 너무 착해도 큰일인데.
┖ 그러니까 괜히 다른 선배들한테 갑질만 당하지. ㅠㅠ (대충 이채선 욕하는 글)
― 아……. 이렇게 또 치인다……. 동물 탈 너무 귀엽잖아. 영화 또 보러 가고 싶어지네.
― 윤고양, 태구리, 안댕댕, 서늑대 그리고 민뀨잉까지. 진짜 웅장이 가슴해진다.
┖ TMI, Too Much I Love you.
┖ ㄹㅇ ㅋㅋ
┖ 아니, 민뀨잉 미쳤냐곸ㅋㅋㅋㅋ
늑대 역할을 맡았을 때부터 대충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막상 에르제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카테이아 대륙의 악연을 끝맺기로 해서 그런가.’
구두 합의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늑대인간의 (구)우두머리 지서후와 평화협정을 맺어서 그런 듯했다.
‘사실, 싸운 것도 그렇게 대단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지.’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대립 역사가 굉장히 오래되기는 했지만, 그 이유를 지금 생각해 보니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고귀함, 청결, 규율 등을 강박적으로 지키며 사는 뱀파이어와, 자유분방함으로 인해 그 모든 것들을 깨부수는 늑대인간.
굳이 인간으로 따져 생각해 보면, 사실은 성격 차이에 기인한 싸움이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싸움이었으나 점점 종족 간의 전쟁으로 변질되었고, 그게 아주 오래되다 보니 싸움의 원인조차 잊었을 뿐.
‘……뭐, 그걸 이제 와서 깨달아 봐야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래도 지구라는 차원에 와서 그들과 또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족이 아닌 뱀파이어와 뱀파리스들 때문에 머리가 아팠으니까.
‘뱀파리스…….’
뱀파리스를 떠올리던 에르제는, 머리 한구석에서 무언가 꿈틀대는 기분을 느꼈다.
저번에 무언가 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과 관련된 모양이었다.
“뱀파리스……. 뱀파리스…….”
뭐였지? 중요한 기억이 아니었나?
하지만 그렇게 넘기려고 해도 이미 한 번 생각한 것을 멈추기 쉽지 않았다.
잊으려고 하면, 오히려 더 잊기 힘든 것처럼.
그렇게 에르제가 끙끙대고 있을 때, 거실에 같이 앉아서 TV를 보던 윤치우가 물었다.
“뱀파리스가 뭔데?”
“어?”
에르제가 고개를 들어 윤치우를 바라보았다.
뱀파이어라는 건 말해 줬지만, 뱀파리스에 대해서 말해 줘도 되나?
잠깐 고민하던 에르제는 설명하기 귀찮아서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괜히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
“뱀파리스……? 나는 뱀파이어라고 했는데?”
“아, 그래? 잘못 들었나 봐.”
윤치우가 고개를 갸웃하곤 다시 TV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확실히 서바이벌 출신이라 그런지 독기 품은 게 다르기는 하네.”
“?”
스마트폰으로 팬들의 반응을 보고 있었던 에르제가 그제야 TV를 바라보았다.
―어둠을 뚫어
세상을 밝혀
그곳에는 ‘D.D.(Dead Dragon)’가 음악 방송에 출연해 무대를 선보이고 있었다.
‘타 아이돌 모니터링 중이었나.’
주말에도 일중독자처럼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혀를 내두른 에르제가 그를 따라서 D.D의 무대를 지켜보았다.
확실히 윤치우의 말대로 눈에 독기가 가득하다.
다른 이들을 짓밟고 최종 인원에 들어서 데뷔한 만큼, 성공에 대한 열망이 아주 강렬해 보였다.
“춤 난이도도 상당하고, 보컬도 탄탄해. 비주얼로도 꿀릴 게 없고.”
“그러기에는 LAK나 우리보다는 아직 부족해 보이는데.”
“그건 당연하지.”
윤치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무대를 하다 보면 성장하게 되잖아. 우리도 그랬고, LAK도 과거에 그랬을 거고.”
하긴. 에르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트윈이 처음 데뷔했을 때만 보더라도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다.
안단테와 윤치우의 기본기가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각자의 능력을 개화하고 있는 상태였다.
민주혁과 태현우는 춤과 노래로, 안단테는 작곡으로.
‘윤치우는…… 일단 리더 포지션이라 그런가, 뭔가 따로 하지는 않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이제는 커뮤니티에서 욕을 먹고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본인도 다른 멤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계속 노력하는 거 같고.’
최근에 읽었던 웹소설에 나오는 ‘스탯창’ 같은 게 있었다면, 윤치우는 분명 등급이 1개 내지 2개는 올랐을 정도로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자기객관화가 잘 되지 않아서 에르제는 윤치우에게 물었다.
“……나는?”
“너는 원래 잘했으니까 뭐.”
되레 윤치우는 부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원래 잘했다…….’
그렇다는 건 자신의 등급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뜻일까?
S등급이라 해도 SS, SSS등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거 아닌가?
뭔가 불만스러워진 에르제가 입술을 비죽거릴 때, 다시 TV를 시청하던 윤치우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김지원, 걔는 이제 아예 안 나타나려나? 아육시에서 자진 하차를 하더니, 오히려 너 덕분에 역풍 맞고 사라졌잖아. 흠……. 미운 털이 박혀서 다시 방송계 복귀하는 건 어렵겠지?”
“그거야…….”
당연하다고 얘기하려던 에르제가 움직임을 딱 멈췄다.
돌이 박힌 듯 멈춰서 끼익끼익 소리를 내던 톱니바퀴가 다시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해서였다.
“아……!!”
잊고 있던 기억의 파편이 윤치우 덕분에 하나로 합쳐진 듯, 뿌옇던 머리가 개운해졌다.
‘김지원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
“땡큐.”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감사 인사를 전한 에르제는 곧장 옷을 챙겨 입었다.
“뭐야?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어디 가?”
“친척집!”
친척집이라는 말에 윤치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에르제가 몇 번 탈주했던 이후, 윤치우도 친척집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다.
자신과 이야기하다가 뭔가 생각났겠지, 그렇게 여긴 윤치우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주말이라 별말은 없겠지만, 그래도 너무 늦지는 마.”
“응. 오래 안 걸리는 일이야.”
에르제는 완전 무장을 하고, 곧장 세리나의 집으로 향했다.
* * *
세리나에게 그쪽으로 가겠다고 연락을 한 뒤, 에르제는 금세 도착했다.
“로드!!”
세리나가 거의 맨발로 뛰어나오다시피 마중을 나왔고, 옆의 플랑은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로드 때문에 잘릴 뻔했다.”
“왜?”
“토트윈 전용 경호원으로 붙여 놨더니, 일 안 하고 돌아다닌다고.”
“……아.”
세리나 혼자는 위험할 수도 있어서 플랑을 김지원 옆에 붙여 놨는데, 그래서 경호원 직에서 잘릴 뻔한 모양이었다.
“……??”
거기까지 생각한 에르제가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안 잘렸다고? 거의 한 달 넘지 않았어?”
“무상만 아니었으면 진즉 잘라 버렸을 거라고 했다.”
“너…… 무상으로 일하고 있었어?”
에르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예나 지금이나 앞만 보고 달려가는 녀석이었다.
자신의 옆에 있겠다고, 지금까지 무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니.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르고……. 아니, 잠깐만.’
에르제가 순간 떠오른 생각에 움직임을 멈췄다.
‘장 대표는 무상으로 일한다고 하는데, 그걸 의심을 안 해?’
장 대표도 능구렁이라 공짜라고 마냥 좋아했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무상으로 일한다는 건 속에 다른 흉계가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은데.’
에르제가 플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히 장 대표한테 자신과의 관계를 이상하게 알린 건 아니겠지?
“플랑, 너…….”
뇌 빼고 사는 일족 때문에 불안해진 에르제가 그를 추궁하려는 순간, 세리나가 빠르게 곁으로 다가와서 속삭였다.
“플랑 님은 제 소개로 일하는 거예요. 그렇게 막무가내로 일 처리를 하지는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수당은 제가 따로 받고 있고, 이번에는 무급 휴가 처리를 했으니까요.”
“아아, 그래?”
에르제가 안도하는 빛을 띠며 세리나를 토닥여 주었다.
“잘했어. 그럼 돈은? 네가 따로 관리하고 있는 거야?”
“네. 나중에 요긴하게 쓰려고 모아 두고 있어요. 이제 들어가시죠. 로드.”
세리나는 쿡쿡 웃고는, 안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왔다.
“김지원은?”
“지하실에 뒀어요. 정신 차린 지는 2주 조금 넘었고요.”
“계속 여기에 둔 거야?”
“네. 몇 번 탈출하려고 시도하긴 했는데, 플랑 님이 지켜 주셔서 문제는 없었어요. 어차피 결계에 막혔겠지만.”
“외부랑 연락을 주고받을 방법도 다 차단한 거고?”
“일단 저희가 알고 있는 상식 내에서는요.”
“그럼 괜찮겠네.”
플랑과 다르게 세리나는 이런 면에서 꼼꼼하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곧 지하실로 들어서자, 세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혹시 죽이시려는 건가요?”
“그건…… 상황 봐서.”
만약 녀석이 자의로 뱀파리스가 되었고, 여전히 자신에 대해 증오심을 품고 있다면 미리 싹을 자르는 것이 맞다.
인간 시절에도 ‘악의’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제이에 의해 뱀파리스가 되었다면……. 그 이후에 기억을 지우는 것으로도 충분할 거란 생각이었다.
“그 전의 기억을 읽어 봐야겠지.”
“읍읍읍!!”
뱀파리스답게 어둠 속에서도 에르제를 찾아낸 김지원이 입에 재갈이 물린 채로 마구 발버둥을 쳤다.
커다란 쇠기둥에 묶어 뒀음에도 살짝살짝 흔들릴 정도의 힘이었다.
“팔팔하네.”
에르제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버틸 정신력은 충분하겠어.”
그러고는 김지원의 입에 물려 있던 재갈을 풀어 주었다.
“쿨럭, 케헥.”
오랫동안 재갈이 물려 있었는지 김지원이 마른기침을 뱉어 냈다.
“너어, 너허.”
에르제를 노려보며 말하는 목소리도 가뭄때문에 말라 붙은 땅처럼, 쩍쩍 갈라져 나왔다.
“네가 왜…… 여기, 크으. 여기에 있어…….”
“내가 못 올 곳을 온 건 아닌데.”
에르제가 픽 웃으며 말하자, 김지원이 미간을 좁혔다.
“너……. 뭐야……. 너.”
“서은우, 토트윈의 비주얼 센터.”
“내가 그걸 묻…… 는…… 으으읍!!”
에르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김지원에게 재갈을 물렸다.
자신에게 악의를 드러낸 이에게 이 정도로 대화를 나눠 주었으면 충분한 자비를 보여 준 셈이었다.
“아플 수도 있기는 한데, 웬만하면 견뎌라. 깨우기 귀찮으니까.”
싸늘한 목소리에 김지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읍……!!”
잠깐의 발악이 있었으나, 에르제의 손이 김지원의 이마에 닿는 순간 금세 축 늘어지며 잠잠해졌다.
“…….”
에르제는 차분히 김지원의 기억을 과거에서부터 훑어 나갔다.
‘굳이 모카 엔터의 과거 사건까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거야 이미 이윤에게서 들었으니, 시기는 아육시가 시작될 때쯤이 좋을 듯싶었다.
화아아악―!
한 공간으로 빨려 드는 기분과 함께, 김지원과 제이가 처음 만났던 장면을 찾았다.
‘여긴가.’
김지원은 아육시 제작진을 만나기 위해 방송국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처음 제이와 마주친 모양이었다.
― 반갑습니다. 김지원 참가자님.
― 헉……. 제이님?! 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 아하하, 선배는 무슨.
제이는 그렇게 말하며, 냉정한 눈빛을 띠었다.
― 아직 데뷔도 하지 못했는데, 선배라고 부르면 제가 좀 곤란하네요.
― 아……. 죄, 죄송합니다.
그날은 그렇게 넘어갔지만, 제이의 계획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에서 제이는 지속적으로 ‘데뷔’라는 단어로 김지원을 가스라이팅을 한 것이다.
― 아! 그……. 김…….
― 김지원입니다.
― 미안해요. TV에 나오는 얼굴이 아니면 잘 잊어 먹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거나.
― 아! 최선규 참가자는 제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좋은 모습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참가자가 있을 때는 은근히 그와 비교하는 방식도 서슴지 않았다.
‘최선규가 이번에 아육시 2등인가로 데뷔했지.’
그런 의미에서 기대한다는 말은 완전 빈말은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김지원한테 더 잘 먹힌 것 같고.’
결국엔 제이가 원하는 상황이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 무슨 짓을 하더라도 꼭 데뷔하고 싶습니까?
어느 날 문득 툭 던진 질문에 김지원은 덥석 미끼를 물었고, 최종적으로는 토트윈을 저격하는 포지션을 맡게 되었다.
‘……결국에는 쓰다 버려졌군.’
에르제는 모든 계획이 실패한 이후, 김지원이 제이의 발밑에서 끅끅대는 장면까지 모두 확인했다.
그리고 그날 제이에게서 피를 강제로 주입당한 뒤, 뱀파리스로 변하는 장면까지도.
‘…….’
에르제는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솔직히 안쓰럽지는 않았다.
김지원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고, 여전히 그가 적대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제이가 김지원에게 했던 ‘네 형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라는 말.
그게 마음에 아주 조금 걸렸다.
‘김지태…….’
김지원의 친형과 자신이 죽였던 김지태는 동일인이었다.
그리고 에르제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제이의 속내를 짐작했다.
‘괜히 평화협정을 맺자고 한 게 아니었어.’
놈은…….
김지태를 트리거 삼아서 김지원을 자신에게 사용할 장기짝으로 만든 것이었다.
자신에게 복수심을 불태우는 장기짝으로.
앞에서는 평화협정을 맺자고 해 놓고 뒤에서는 총을 겨누고 있었다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야 꿈을 향해 뛰기 시작했는데, 벌써부터 방해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이 김지원의 기억으로 인해 뱀파리스로 확정된 제이라면 더더욱.
잠시 고민하던 에르제는 김지원의 이마에서 손을 떼어 냈다.
김지원은 정신을 잃지 않고 꿋꿋이 버텨 낸 모양이었다.
“으읍……. 흐읍…… 흐읍…….”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를 향해 에르제가 살짝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쥐 죽은 듯이 살래, 아니면 복수를 할래? 둘 중 하나를 선택해.”